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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80화 (180/245)

# 180

독식왕 : 클리어러 180화

나는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지라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유진이의 반응은 생각보다 즉각적이지 않았다.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암젤을 한 번 바라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왜?”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서. 너야 십 년 동안이나 그곳에 있어서 모든 게 자연스러울 테지만 나한테는 모두 새로운 것뿐이잖아. 내게는 어렸을 때 너의 이미지와 지금의 모습에 갭이 너무 커. 차라리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적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나는 유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지난번 그녀가 쓸쓸한 뒷모습을 보였던 이유나 며칠 동안 내내 생각만 했다는 게 이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녀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알았다는 사실보다 내게 가지고 있던 개념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게 더 큰일이었을지도…….

OG에 들어오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유진이가 말했다.

“밖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어떤 일……?”

유진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무엇일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한호는 던전 사고 처리반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OG에 들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유진이는 어디까지나 일개 게이머일 뿐이다. 실력이 좋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군주의 대리인이 된 게 몇 가지 조건이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했지? 미리스와도 얘기를 해봤지만 아직 대리인을 찾지 못한 군주들이 많다면서. 그들을 찾는 일을 내가 하면 어떨까? 나는 개인이니까 티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고…….”

내 이마는 자연스럽게 찡그려졌다.

이계의 군주들은 성향을 불문하고 대리인을 찾지 못해 안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년 가까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조건에 부합하는 게이머를 찾기 어렵다는 뜻.

내가 이한호와 유진이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건에 맞는 사람과 마주할 경우 자동으로 시스템이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유진이가 대리인을 찾으러 다닌다는 것은 일견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면 이계의 군주들이 애를 먹은 것에 반해 나는 비교적 쉽게 대리인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조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까다로운 것들이 아니다.

군주들이 대리인을 찾지 못한 것은 단지 이쪽 세상의 게이머를 색출할 수 있는 수단이나 기회가 제한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부정적이었던 마음이 혹시나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유진이의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 입장에서는 퀘스트를 달성하는 일에 우선이어야 해서 대리인을 찾아다닐 시간이 충분치 않다.

비밀을 알고 있는 아군이 나 대신 그 일을 해준다면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어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티코이에게 연락했다.

“네,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접객실인데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이쪽으로 좀 건너와 줄래?”

“넵, 바로 가겠습니다.”

오 분쯤 지나서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안경을 쓴 이지적인 풍모의 남자가 밝은 얼굴로 들어왔다.

“상의하실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티코이가 대각선 의자에 앉자, 나는 유진이와 나눈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아!”

티코이는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무릎을 탁 쳤다.

“하긴 그렇겠네요. 이계인들은 이쪽 세상의 게이머를 볼 기회가 별로 없으니 자연스럽게 대리인을 찾는 게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주인님처럼 신묘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에 반해 이쪽에서는 인간 게이머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으니 대리인을 찾기가 훨씬 쉬울 겁니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부끄럽네요.”

“그 말은 유진이가 그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네, 두 개의 사례가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동맹 군주들의 특징을 데이터화하면 거기 상응하는 게이머들을 추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유진 씨가 접촉을 해서 성향과 성품 등을 고려해 2차 선별을 하면, 최종적으로 주인님이 낙점하면 됩니다.”

“그렇군!”

나는 티코이를 불러 확인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맹 군주들의 데이터를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30분이면 됩니다. 대리인이 되기 적합한 게이머 목록을 만드는 데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요.”

나는 유진이에게 말했다.

“게이머들과 접촉할 때는 항상 신중해야 돼. 겉만 보고 속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그럼 티코이가 데이터를 만들 동안 우리는 집 구경이나 할까?”

“좋아.”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암젤이 갸르릉거리며 불만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나도 집 구경시켜 달라옹.”

“너는 나보다 여길 잘 알잖아. 무슨 집 구경을 시켜달라는 거야?”

“흥!”

암젤은 휙 몸을 일으키고, 화가 난 동작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유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화난 거 같은데?”

“고양이 마음은 여름 날씨처럼 변덕스러우니까 금방 풀릴 거야. 걱정하지 마.”

Chapter 46 - B급 던전

1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명예 퀘스트를 달성하고 얻은 보상을 확인하기로 했다.

넘버링 아티팩트 전용 랜덤 보상 상자.

로또 스킬을 사용하자 4등에 당첨되었다.

[‘아판테스의 눈’을 얻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테이블에 나타난 것은 타원형의 검은색 보석이었다.

게임 안에서 대부분의 넘버링 아티팩트를 모은 경험이 있는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음, 쓸 만한 물건이긴 한데…….’

[아판테스의 눈]

넘버 : 100

효과 : 위대한 상인 아판테스는 상품의 가치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마법사 데피니온은 그가 지닌 재능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해 눈알을 도려내어 아티팩트로 만들었다. 아판테스의 눈은 백년에 한 번 열리며, 능력을 한 번 사용하면 백년이 지나야만 다시 열린다.

사용법 : 상인에게 눈알을 들이밀면 그가 아끼는 어떤 물건이나 비밀도 술술 불고 만다. 하지만 한 번 사용하면 백 년 동안 다시 사용할 수 없으니 신중할 것.

눈알을 도려냈다는 점이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아티팩트 자체는 평범한 보석처럼 생겼다.

만약 사용 횟수에 제한이 없다면 매우 유용한 아티팩트겠으나 정보에서도 나와 있듯 백 년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설마 이 게임을 백 년 넘게 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딱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음…….’

나는 아판테스의 눈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팔짱을 끼었다.

‘왜 이걸 이 타이밍에 주는 걸까?’

지금까지 나온 보상들을 보면 당장 쓸 수 없는 아이템이 주어진 적은 없다.

로또 스킬의 영향도 분명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게 필요한 물건들이 퀘스트 보상으로 주어졌다.

가상현실 게임이었다면 ‘아판테스의 눈’은 바로 인벤토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높은 레벨에 맞는 고급 아이템을 구하는 데 사용해야 효율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과 지금은 상점 시스템이 같지 않다.

모든 던전의 상점이 연동되어 있고, 덕분에 특정 물품을 사기 위해 특정 던전에 찾아갈 필요도 없다.

결과적으로 상점이 하나인 셈이라면 굳이 나중에 사용하려고 아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내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판테스의 눈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다음 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처음 공략하는 B급 던전으로 향했다.

자동차로 이동했을 때 주거지에서의 거리는 대략 30분 정도. 슈퍼카들이 줄줄이 정문을 빠져나갔다.

게이머가 많이 거주하는 서울은 상대적으로 고소득자가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한꺼번에 여러 대의 슈퍼카가 동시에 도로를 질주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쏠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OG가 B급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더라도 기자들이 던전까지 몰려와 귀찮게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피스&호프와 OG의 관계가 이슈이기는 해도 시급한 현안인 것은 아니고, OG의 홍보 팀이 이미 각 언론에 취재 자제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게이머의 던전 공략을 방해하는 것은 법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보도진이 던전까지 들어오는 일은 드물다.

지난번에 OG에 미녀 게이머가 많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의 일이었고 특이한 케이스였던 것이다.

던전에 도착하자 시간에 딱 맞춘 것도 아닌데 입구부터 직원이 나와 우리를 맞았다.

“OG 길드장이신 조성오 씨 맞으십니까?”

“네.”

“저희 던전에서는 대리 주차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내리셔서 키를 주시면 저희 직원들이 주차를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알아서 할게요.”

“그러시군요. 주차장은 400미터 직진해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현재 이용 가능한 주차 공간은…….”

던전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관리에도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관리소의 규모가 크고 직원들의 숫자도 많다. 대개 직급들도 높아서 고급 게이머는 고급 공무원이 상대한다는 일반원칙이 운용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편리하다기 보다는 귀찮다는 느낌이 강했다.

주차를 마치자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던전에 바로 들어가실 게 아니면 관리소로 모시겠습니다. 안쪽에 전용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니 음료 등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관리소에서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는 무료입니다.”

동시에 국민의 세금이기도 하지.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의 과잉 의전은 문제가 되는데 왜 게이머에게는 그런 불만이 없는지 궁금했다.

던전과 게이머가 등장하고 나서 세금은 더 많이 늘었다. 던전 관리 명목, 그리고 게이머 장비 제공 등의 이유로 특별세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게이머가 스스로 장비를 마련하지만 어쩐 일인지 세금은 갈수록 오르기만 할 뿐, 처음보다 내려가지 않았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면 게이머의 등장 이후로 경기가 많이 살아났으니까, 세금으로 인한 실보다는 경제 전체 소득 증대 효과가 더 크기는 할 것이다. 그 소득이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인터넷 블로그에서 봤던 내용을 되새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바로 들어갈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전한 공략 되십시오.”

직원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딱 보기에도 직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 남자가 관리소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번들번들한 얼굴에 배가 상당히 나온 인물이었는데, 멀지 않은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뒤에는 직원 몇 명이 따르고 있었다.

“조성오 게이머님!”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그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저는 이곳 관리소장인 박관춘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함을 내미는데 나는 그것이 지금도, 앞으로도 필요할 것 같지 않아 받지 않았다.

“아, 그러세요.”

“던전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 있습니까? 들어가셔서 차 한잔 같이 하시죠. 다른 길드분들도 와 계시니 함께 담소도 나누셔도 되고요.”

“담소요?”

내 미간은 한층 더 찌푸려졌다.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방해받는 기분이 들어 언짢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마인드 리더가 발동해 어색하게 명함을 내밀고 있는 박관춘의 머리 위에 감정 메시지가 나타났다.

[무조건 인맥으로 만들어야 돼.]

[어린놈이 건방지기는!]

[내 던전에 찾아오다니 역시 나는 운이 좋아.]

교차하는 메시지들을 보자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휴…….”

“응?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나는 더 이상 박관춘을 상대하지 않고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빨리 가자.”

박관춘이 당황해서 내 팔을 잡았다.

“저, 게이머님? 차는 어떻게……?”

나는 내 팔에 닿은 손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 귀찮게 하지 마시고 인맥 놀이는 다른 게이머들이랑 하세요.”

그리고 그냥 가려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던전이 왜 당신 겁니까? 관리소장이면 맡은 일이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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