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독식왕 : 클리어러 179화
열흘 가까이 약에 취한 사람처럼 흥분해 있던 가브리엘의 얼굴에 이제야 평온함이 깃들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블러드 스톤과 콜드 스톤을 하나씩 집어 들어 흡수했다.
콜드 스톤은 남김없이 흡수되어 능력을 일부 상승시켰으나 블러드 스톤은 반대로 대부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못 쓰는 돌멩이가 되어버렸다.
상식적으로 상성에 맞지도 않는 블러드 스톤은 자신이 흡수하는 대신 파는 게 이익이었지만 그는 애초에 돈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짐꾼들이 수거한 결정석도 챙기지 않았다.
붉게 물들었던 피부가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전신을 뒤덮었던 흉흉한 마나가 수증기가 되어 피어올랐다.
“후…….”
낮게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드러났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귀환서에 손을 올렸다.
가브리엘이 던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접한 피스&호프 브라질 지부는 던전에 게이머들을 투입해 시체의 옷가지와 버려진 결정석들을 수거했다.
가브리엘은 곧바로 지부에 복귀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대식가인 게이머의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먹고, 48시간 이상 잠을 잤다. 그러고도 이틀 더 휴식을 취한 뒤 지부에 출근을 했다.
니콜라스의 하명이 전달된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피스&호프 안에서 길드장의 위치는 절대적이지만 적어도 브라질 지부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지부의 직원들이 첫 번째로 두려워하는 것은 가브리엘이다. 지부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냥을 방해하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중에 보고를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본부에서 지령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 변화에 심장을 졸이면서 비서가 나머지 보고를 마쳤다.
“한국……?”
가브리엘은 제출된 보고서를 느린 태도로 훑어보았다.
그 안에는 조성오와 노아, 그리고 OG 멤버들의 사진도 포함돼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니콜라스의 친동생인 노아가 표적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크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길드장에게 직접 내려온 명령이기에 거부할 권한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게다가 스스로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보수는?”
“A급 콜드 스톤 다섯 개, B급 열 개, C급 서른 개, 삼천만 달러와 브라질 지부의 격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다고 합니다.”
“……A급 콜드 스톤 오십 개.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고 전해.”
“네…….”
길드장이 내건 조건을 일방적으로 수정하다니.
비서는 본부에 이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동시에 희열도 느꼈다.
가브리엘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길드장에게 흥정을 요구하겠는가?
가브리엘이 내건 조건은 곧바로 승인이 났다. 동시에 구체적인 지시사항도 하달되었다.
10인 이상의 정예로 움직일 것.
기한은 한 달.
절대 방심하지 말 것.
가브리엘은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사냥을 하게 됐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꼈다.
A급 콜드 스톤을 오십 개나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게다가 이번 일을 수행하는 중에도 적지 않은 보상이 따라붙을 터였다.
그의 입가에 자주 볼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7
나는 곧장 B급 던전에 예약을 했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각 언론 기사에 OG가 B급 던전 공략에 나섰다는 사실이 대서특필된 것이다.
마리아의 인터뷰 이후 나와 OG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올라가 있던 터라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C급 던전을 공략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기사거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B급 던전부터는 그야말로 한가락 하는 게이머들만 공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가장 기대하는 게이머, 길드가 이만큼의 실력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 셈이니까 모두 신이 나서 기사에 올린 것이다.
“음…….”
나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주거지를 옮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귀찮아졌을 테니까.
B급 던전 공략은 3일 뒤로 정해졌다.
급히 잡은 예약치고는 빠른 편이지만 이마저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가브리엘이 언제 한국에 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행인 점은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만 촉각을 세우면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셰릴을 죽일 때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면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노아가 가브리엘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B급 던전에 들어가기까지의 3일이 내게는 결코 한가한 시간이 아니었다.
사업 준비가 모두 갖춰졌기 때문에 곧 출시될 OG 상품들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이머들이 기대해 마지않고 있는 OG의 라인업은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닌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제작된다. 그리고 상품을 찍어내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애초에 공개가 되었던 돌개 보드와 리에고 등불을 중심으로 다른 던전에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들이 출시 목록에 포함되었다.
사전 예약은 한 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고, 1차 출시 상품은 이미 구매자가 모두 정해졌다.
티코이의 말에 따르면 한 시간 만에 모든 상품이 예약 완료되었다고 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한참 적기 때문에 1차 구매자들은 그만큼의 프리미엄을 갖는 셈이었다.
웃돈을 받고 되팔 수가 있고, 개인 블로그에 자랑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OG의 상품 가치는 점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상품 재고를 넉넉히 준비하고, 2차 출시 라인업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재밌는데?’
나는 이 과정이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처럼 흥미롭게 여겨졌다.
사업 능력이 출중한 동료들이 있고, 출시하는 즉시 상품이 쭉쭉 팔려 나가니 마치 치트키를 쓴 것 같은 희열이 있었다.
‘역시 장르는 편식하면 안 돼.’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도 재밌지만 현실 콘텐츠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나도 어른이 되었구나.’
시뮬레이션 장르에 흥미가 커진 것을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공예사 클래스에 손재주 스킬까지 갖춘 터라 재료만 있다면 한꺼번에 수십 개의 아이템을 합성할 수 있었다. 간단한 합성이라면 한 번에 수백 개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레벨이 낮거나 마나양이 적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미 나는 132레벨에 도달했다. 게다가 마법사와 소환술사 같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으므로 마나 운용에 있어서는 벌써 특별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합성을 이틀 연속으로 하고 나자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다음으로는 노아, 티코이와의 회의를 통해 2차 출시 라인업을 짜는 일을 했다.
아이템을 자체로 파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디자인을 세련되게 바꾸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파는 것이 낫다.
그래야 레시피를 유추하기가 어려워지고 구매자의 만족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B급 던전에 들어가기 전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합성 자체가 마나를 소모하는 일이라 컨디션 조절을 위해 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고는 이미 넉넉하게 있기 때문에 급할 것도 없었다.
뒹굴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을 보자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김유진.
지난번에 그녀를 구출하고 미리스의 대리자게 되게 한 뒤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당시 쓸쓸해 보였던 그녀의 뒷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생각이 복잡했을 텐데, 나는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보세요?”
“성오야.”
애써 밝은 티를 내려고 하는 것 같지만 유진이의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잘 지냈어?”
“그런 안부를 묻기에는 별로 날짜가 안 지났잖아.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집에만 있었어.”
“……그래.”
“혹시 안 바쁘면 만나지 않을래? 상의할 일도 있고.”
“아. 그래.”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주거지를 일러주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절대 알려주지 않았겠지만, 유진이는 가족 다음으로 신뢰가 가는 사람이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입으로 주소를 불러주고 있었다.
“이사 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런 데로 간 거야? 던전 옆이라고?”
“응, 너도 알다시피 던전 주변이 땅값이 싸잖아.”
“음…….”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유진이는 금방 여기로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수보타에게 손님이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주거지 안에는 손님 접대용 공간이 따로 있었다. 접객을 위해 지어진 건물만 두 채가 있고, 야외 접객 시설도 있다.
한 시간 만에 이곳에 도착한 유진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집이 아니라 궁궐이잖아.”
마중을 나간 나는 그런가 싶은 마음에 새삼 주거지를 돌아보았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비록 현실로 돌아온 이후 허름한 아파트에 살기는 했지만 가상현실게임 안에서는 왕 못지않은 대우를 받던 나이다.
물론 공략을 위해 자주 이동하는 생활을 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일국의 왕이 되는 일도 쉬웠으니까.
때문에 내게는 약간 일반인과는 다른 감각이 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좋다고 여기기는 했어도 대단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 나면 노아한테 고맙다고 말해야겠네.’
사업이 이대로만 잘된다면 노아가 내게 투자한 돈은 머지않아 회수가 되겠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 궁궐 같은 집을 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나도 참.”
계기야 어찌 되었든 나는 유진이가 조금은 긴장을 푼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천천히 구경시켜 줄게.”
접객실에는 수보타가 내놓은 향긋한 차향이 그득했다. 부르지도 않은 암젤이 이미 내가 앉을 소파 한쪽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냐옹.”
그녀의 눈매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유진이는 암젤의 말에 흠칫 놀랐다가 지난번에 내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시…… 한 번에 적응되지는 않네.”
“흥!”
암젤은 이것 보란 듯이 소파에 앉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약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하품을 한 뒤 눈을 감았다.
“이해해. 얘 성격이 원래 이래.”
“하하.”
유진이의 얼굴에 어이없음과 쓸쓸함이 동시에 담긴 표정이 떠올랐다.
고양이한테 진심으로 질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 심경이 복잡한 게 당연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물었다.
“생각을 해봤다고?”
“응, 너도 알겠지만 이미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나는 유진이의 분위기가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단순히 레벨이 오른 것뿐만 아니라 게이머로서 전해지는 감각도 훨씬 강하고 날카로워졌다.
미리스의 대리인이 된 것이 그녀에게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일 터.
모르긴 해도 미리스에게도 마찬가지 긍정적인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조금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너도 OG에 들어오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