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독식왕 : 클리어러 178화
4
강해지려면 레벨을 올려야 하고, 레벨을 올리려면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아직 달성하지 않은 영토 퀘스트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B급 던전.
이 단계부터 던전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A급 던전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일류 길드, 일류 게이머가 아니면 도전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D급, C급 던전에 처음 도전할 때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으나 지금은 크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C급 던전 네 개를 공략하는 동안 레벨이 빠르게 상승했고, 이 정도면 B급 던전도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10년 이상의 순수한 사냥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감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
노트북으로 서울에 있는 B급 던전 정보를 검색했다.
서울에는 B급 던전이 세 개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던전 등급이 올라갈수록 공개된 세부 정보의 양이 줄어들어서 자세히 따져 보고 결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는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에 티코이나 노아를 통하면 어렵지 않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테마나 간단한 정보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이 던전들이 어느 정도 난이도이고, 등장하는 몬스터가 어떤 녀석들일지 판별하는 것이 가능했다.
‘셋 다 엇비슷하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이번 페이즈에 아직 달성하지 않은 다른 퀘스트가 있다는 게 생각났다.
오랜만에 추가된 ‘동료’ 퀘스트.
그 동료가 B급 던전에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플레이 중인 게임은 그런 측면에서는 친절하니까.
대체로 돌아가지 않도록 루트가 짜여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흐름이 어긋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트북을 치운 뒤 메뉴를 실행시켜 탐색 모드에 들어갔다. 내가 고른 코어는 당연히 B급 던전에 최대한 인접해 있는 던전의 것이었다.
탐색도 여러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오랫동안 헤매지 않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정보의 빛줄기 중 주요한 가닥을 찾아 NPC가 발산하는 고유의 감각을 좇았다.
구석구석 찾지 않아도 첫 번째는 실패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포기하고 곧바로 두 번째 코어에 접속했다.
두 번째도 실패.
‘음…….’
나는 B급 던전에 NPC가 없을 경우 동료를 찾는 일은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NPC를 만나느냐는 결국 랜덤이기 때문에 가브리엘을 상대하는 데 백 퍼센트 도움이 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 내 레벨을 올리면 현재 파티원들의 실력도 늘어서 백 퍼센트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료 퀘스트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퀘스트인지라 이왕이면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지만.
세 번째 코어는 앞의 두 개와는 다르게 C급 던전의 코어였다. 때문에 더욱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여 한꺼번에 넓은 지역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했다.
‘……!’
오 분가량이 지나자 나는 이번 탐색의 결과가 앞의 두 번과는 다르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희미한 감각을 따라 집중하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기운이 B급 던전이 있는 장소와 맞닿아 있었다.
‘오케이, 선택 완료.’
낙점된 던전은 일명 ‘미법사의 동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이유는 이 던전에 마법사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비단 인간 종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다양한 종족이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곤 한다.
마법사의 동굴은 가성비로 따지면 애매한 던전이었다. 다른 B급 던전보다 규모가 크지 않아 공략 시간 자체는 짧지만, 사냥감이 마법을 사용하는 탓에 대응하기가 까다롭다.
결과적인 보상은 다른 B급 던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실력 있는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5
상파울루, 피스&호프 브라질 지부.
이곳 지부장인 가브리엘은 며칠 전 본부로부터 지령을 받았다.
길드장으로부터 직접 하명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정상적인 절차라면 곧바로 지부장에게 전달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브라질 지부는 다른 지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모든 질서가 지부장인 가브리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그가 현재 부재 상태였기 때문에 하명은 전달되지 못한 채 보류 중이었다.
브라질 출신인 가브리엘은 본부에서 몇 년을 보낸 뒤 지부장의 신분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전설적인 행적은 브라질에 있는 게이머와 관계 공무원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속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했고, 내막을 아는 이들은 공포의 화신으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부정을 저질렀던 많은 게이머가 죽었지만 가브리엘이 그들을 죽인 것은 정의감의 발로가 아니었다. 그를 직접 상대하고, 목숨을 건진 소수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가브리엘이 브라질로 돌아오려고 했을 때 많은 세력가와 게이머들이 그것을 막으려고 했다.
처음엔 같은 입장을 고수했던 브라질 정부였으나, 피스&호프의 로비와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했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가브리엘이 정신감정을 받는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정신감정이 정상으로 판별되고, 가브리엘은 브라질로 귀환했다.
그가 지부장이 된 후 지부의 활동은 지금까지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여기에는 국민들이 부정을 저지른 게이머들을 척결해 주길 요구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일개 길드 지부장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브라질 정부가 피스&호프에 도움을 청하고, 현상금이 붙어 있던 많은 범죄자 게이머들을 검거하는 데 지부가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이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브라질 정부와 피스&호프의 인기는 동반 상승했다.
이렇게 된 이면에는 애초부터 계획된 공모가 있었다. 일부 게이머가 처형되었지만, 다수는 다시 풀려나 범죄 전력을 세탁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부정은 더욱 교묘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재편되고, 브라질 국민은 단지 가브리엘을 앞세운 장난에 속아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니콜라스의 하명이 즉각 전달되지 못한 이유는 가브리엘이 던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 던전에 들어가면 공략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B급 던전에 들어간 지 오늘도 열흘째였고, 중간층부터 시작한 공략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젠장. 죽을 것 같네. 대체 왜 쉬지를 않는 거야?”
“쉿! 듣겠다. 불평은 그만해.”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우리 얘기는 들리지도 않을 거야.”
동료의 말에 금발의 남자 게이머가 가브리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커다란 몸뚱이의 그는 산발을 하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불꽃이 터지고, 손을 뻗는 곳마다 화염이 이글거렸다.
불 속성을 다루는 그는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며칠 동안 자거나 쉬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 막 던전에 들어온 사람처럼 팔팔해 보였다.
금발의 게이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네 말이 맞아. 저건 인간이 아니야. 살인귀지.”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전소시킨 가브리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헉!”
살인귀라고 혼잣말을 한 게이머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말없이 응시하는 충혈된 눈빛을 바라보다가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깨닫고 후다닥 이차원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훈제된 고깃덩이를 던져 주자 허공에서 낚아채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고기를 다 먹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쿵쿵거리며 던전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것을 지켜보다가 금발의 게이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죽는 줄 알았네…….”
가브리엘이 던전을 공략하는 방식은 특이했다. 길드의 게이머들과 공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프리랜서 게이머를 무작위로 고용해서 동행시키는 방식이었다.
주로 공략하는 것은 C급과 B급이고, 거의 모든 공략을 혼자서 전담한다.
동행하는 게이머들이 하는 일은 그저 짐꾼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던전에 나오는 모든 결정석을 보수로 주겠다는 것.
때문에 가브리엘을 따라나선 게이머들은 거의 쉬지도 못하는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
드디어 던전의 최하층에 이르렀다. 한 손에 창을 든 황갈색 도마뱀들이 긴 혀를 날름거리며 불청객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몬스터들의 공격은 대다수 게이머에게 미치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한 마리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모든 몬스터를 혼자서 상대했다.
그가 손에서 불을 뿜을 때마다 몬스터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불꽃이 코팅된 주먹이 몬스터의 뼈와 가죽을 부수었다.
던전 마스터는 머리 셋에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도마뱀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걸맞지 않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여덟 개의 커다란 창을 휘저어 댔다.
이번에도 전투를 전담한 것은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공략을 하며 쌓인 피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놀잇감을 두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싸움을 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세 시간 만에 가브리엘은 던전 마스터의 심장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던전 마스터가 쓰러지자 동행했던 게이머들은 죄다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 대부분은 C급 이하의 게이머이고, 평소라면 만져보지 못할 큰돈을 벌기 위해 이번 일에 자원했다.
전투를 거의 하지 않았어도 피로감은 매우 컸다. 열흘 동안 거의 쉬지도 못하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던전 안의 환경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던전 마스터가 죽자 이제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가브리엘은 피칠갑을 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아직 파열된 도마뱀의 심장이 들려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그에게 게이머들 중 하나가 용기 내어 말했다.
“길드장님! 이제 돌아가셔야죠. 저희들도 모두 지쳤습니다요. 하하!”
가브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빛을 마주한 게이머들은 순간적으로 B급 던전의 마스터에게도 느끼지 못한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가장 먼저 상황을 깨달은 누군가가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쳤다.
“사람 살려!”
그가 몇 발짝 옮기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손을 뻗어 화염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동료가 죽는 것을 본 게이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피스&호프의 지부장이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들을 공략에 동행시킨 것인지, 왜 거부하지 못할 조건을 내걸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어렴풋이 들은 소문을 떠올랐다.
가브리엘의 실체는 영웅이 아닌 악마라고.
게이머들은 차례차례 가브리엘이 뿜어낸 불길에 온몸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