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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76화 (17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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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 클리어러 176화

마리아는 자신의 바뀐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콧잔등을 확 찡그렸다. 그러자 그녀의 등으로 마나로 형상화된 팔이 쭉 뻗어 나왔다.

그것은 천장을 퍽! 하고 때려서 가루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변신이 단순히 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라 스킬까지 흉내 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마리아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놀랄 것 없어. 이건 그냥 눈속임용 페이크야. 능력을 완벽히 복사할 수 있었으면 내가 세계 제일이게?”

하긴. 세계 제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하지만 그녀가 크레이지 핸드로 천장을 때린 위력만 보면 원래 능력의 절반 정도는 따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설퍼 보이는 이 계획에 왜 노아가 자신감을 보였는지 이해했다.

노아가 내게 물었다.

“따로 알아낸 건 없나요?”

“아…….”

나는 셰릴이 죽기 전에 언급한 일을 떠올렸다.

“가브리엘이라는 게이머가 한국에 오기로 한 모양이던데요.”

“가브리엘……?”

순간 노아와 마리아의 반응이 심각해졌다.

“왜요? 가브리엘이 누군데요?”

노아가 미간을 찡그린 채 내 물음에 대답했다.

“브라질 지부장입니다. 그를 보낼 생각을 하다니, 니콜라스가 작정을 한 모양이네요.”

“……강한가요?”

이번엔 마리아가 대답했다.

“응, 강하다는 말이 그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지. 본인이 들어도 좋아할 거고.”

나는 대체 얼마나 강한 자이기에 노아와 마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노아가 이 궁금증에 비교적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니콜라스가 그를 본사에서 떨어뜨려 놓은 것은 너무 위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도 강한데 성장 속도 역시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카리스마와 승부욕까지 있죠. 개인 독재 체제로 길드를 끌어가는 니콜라스에게는 여러모로 성가신 인물이었던 겁니다.”

“일부러 다른 지부에 쫓아 보낸 자를 이번 일에 투입한다고요?”

“그 점이 놀랍다는 겁니다. 아마 니콜라스는 더 이상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아니면 이 일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이유가 생겼거나요. 처음에 셰릴을 보낸 것은 저를 의식해서였을 겁니다. 셰릴은 전투능력은 약해도 수완이 좋은 게이머니까요. 하지만 이 이상 상황이 나빠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밀회설을 터뜨린 게 니콜라스에게는 자극이 컸나 보네요.”

“아니요.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니콜라스가 밀회 보도를 좋아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아마 그게 이유라면 다른 방식을 택했을 겁니다. 아마 가브리엘의 투입 결정은 그 전에 내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셰릴에게 얘기를 들은 거겠죠. 이쪽 일의 중요성을.”

노아는 나를 진지하게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멋쩍어졌다. 그는 이 일이 내가 셰릴과 독대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셰릴은 알고 자신은 모르는 어떤 이유 때문에 니콜라스가 자극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명색이 길드장과 부길드장 사이인데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니콜라스가 이쪽에 집중하게 되면 전보다도 훨씬 더 위험해질 테니까.

나는 오늘이 중요한 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노아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더 이상 숨기는 건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내게 의탁한 그를 무시하는 처사일 터.

하지만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노아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급한 일부터 처리하죠. 가브리엘이 무식하게 강하기는 하지만 이곳이 홈그라운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략만 잘 짜면 오히려 피스&호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어요.”

“음…….”

마리아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나오고부터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반응만 보면 과거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가브리엘과 마리아. 둘 다 남미식 이름이라는 점이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높였다.

더 이상 셰릴의 집에서 논의를 계속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의 전략을 확인하고 그곳을 나왔다.

2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하던 피스&호프의 한국 지부장이 죽었는데도 세상은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셰릴은 다음 날도 여느 때처럼 멀쩡히 출근했으니까. 우리가 떠난 뒤에도 마리아는 그곳에 남아서 정신을 잃고 있던 일반 직원들에게 거짓 정보를 주입했다.

습격이 있었고, 우리 쪽도 타격을 입었지만 범인이 모두 제거되었다고. 이번 일은 외부에 알리기 적절치 않기 때문에 각자 입단속을 하라고 지시했다.

일반 직원들이라고는 해도 전투 능력이 있는 게이머들이고 경호 업무를 맡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비밀 엄수는 당연한 책무였으며 누구도 길드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TV를 보면서 추이가 어떻게 돼 가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화면에 비친 뜻밖의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할 뻔했다.

셰릴의 모습을 한 마리아가 당당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뜸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사전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되어있었던 걸로 보였다.

그렇다면 노아도 이 일에 관련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고, 그 말인즉 내가 셰릴의 집을 습격한 일이 성공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 사람 너무 믿네. 부담스럽게.’

하지만 노아가 나를 믿는다는 전제에서 일을 진행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걸고 있으니까. 세상에 그 정도로 순수한 호기심에 올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선했다.

적어도 일반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남 다른 데가 있으니까 세계 최고 브레인형 게이머라는 말을 듣겠지.’

천재의 생각을 따라잡으려는 것 자체가 헛된 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방송 인터뷰에 응한 마리아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모습을 바꾼 게이머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외견이 똑같은 것은 물론이고 목소리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다. 게다가 자잘한 습관이나 제스처까지도 셰릴의 것과 똑같았다. 셰릴을 잘 아는 사람조차도 백 퍼센트 속아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TV 속의 셰릴 즉, 마리아는 다리를 꼬고 여유 있게 진행자와 대화를 했다. 몇 가지 평범한 문답이 오간 뒤에 진행자가 작심하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일 가운데 지부장님이 피스&호프 길드장인 니콜라스와 연인 관계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사가 나오고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지만 아직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확인이 된 것은 아니라서요……. 혹시 그 대답을 오늘 들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입술을 몇 차례 오므린 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나이가 50대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성격이라는 것을 아는 나는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마리아가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네, 전부 사실입니다.

“풉!”

나는 깜짝 놀라 머금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뿜었다. 신선한 과즙이 테이블 위에 떨어지고, 집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수보타가 달려와 걸레로 그것을 닦았다.

암젤도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내 옆에 몸을 웅크렸다.

“흥! 저 여자 마음에 안 든다옹.”

암젤이 첫 만남에서 누군가에게 기가 눌리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물론 고양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만, 마리아는 겉으로 보이는 쾌활한 태도와는 달리 대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투시자의 눈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고, 감각이 예민한 묘족의 입장에서도 그런 특징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동질감이 느껴져서 암젤의 목 주변을 가볍게 긁어주었다. 그녀가 갸르릉거리며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TV에서는 마리아의 뻔뻔한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알려져서 저도 매우 부끄럽습니다.

-네, 아무래도 여자로서 갑자기 터진 열애설을 감당하다는 게 힘드셨겠죠.

진행자가 공감한다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이 짐작하기는 것처럼 저희는 실제 연인 사이가 맞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오!

진행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특종을 낚았다는 생각에 기쁜 반응을 보였다.

-이쯤해서 또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많은 한국인이 피스&호프에서 길드장의 연인인 셰릴 씨를 지부장으로 보낸 것이 이곳을 아시아의 전략적 중추로 삼으려는 목적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해주실 말씀은 없나요?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한국 지부는 저희 피스&호프의 아시아 진출의 요충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지부를 통틀어서도 최고 우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진행자는 고무된 나머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뭔가요?

-다른 이유가 있나요? 물론 한국에 OG가 있기 때문입니다. OG는 미래 게이머 산업에 있어 중심이 될 길드입니다. 노아가 저희 길드를 떠나서 조성오 게이머와 접촉한 것은 아무런 계획 없이 한 일이 아닙니다. 저희는 여전히 노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OG와의 협력 관계도 긍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중입니다. 많은 분이 덩치가 훨씬 큰 저희가 몸을 숙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OG에는 충분히 있습니다.

-오오……!

TV를 보던 나는 망연해졌다.

“뭐야, 이게.”

물론 마리아가 하는 얘기가 피스&호프의 공식 입장일 리가 없다. 어디까지 계획에 있던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경거망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다. 그것은 마리아를 믿는다기보다는 노아를 믿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인터뷰로 인해 내가 귀찮아질 것은 뻔했다. 셰릴이 그동안 언론의 관심을 멀리하며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에 되레 관심도가 증폭된 상태였고, 이번에는 그 관심이 OG로 넘어오게 되었으니까.

“휴…….”

나는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소파에 기댔다.

‘……상관없지.’

어차피 주거지도 옮겼고, 현실 콘텐츠에 집중하기로 한 마당이니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두 명의 비상식적 존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능력을 준 수수께끼의 인물, 그리고 내 생각을 읽고 한발 앞서 계획을 짜는 노아 알렌.

마리아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계속했다. 피스&호프가 역대급 조건으로 나를 스카우트하려 했는데, 내가 가족과 국가에 대한 책임감으로 그것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니콜라스와 셰릴의 사랑 이야기로 번져갔다. 여기 대해서도 마리아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술술 잘 꾸며냈다.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보고 있으면 저절로 몰입이 될 정도였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아 TV를 껐다.

옆을 보니 암젤은 이미 관심을 끊고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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