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독식왕 : 클리어러 170화
2
현실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음 페이즈 퀘스트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PHASE 6
[부] - 주거지를 마련하라.
[명예] - 카오스 게이머 집단을 하나 이상 궤멸시켜라.
[지위] - 랭킹 1,000위 안에 진입하라.
[영토] - B급 이상의 던전을 획득하라.
[동료] - NPC를 1인 이상 영입하라.
눈에 띄는 것은 ‘부’ 퀘스트의 목적이 바뀌어 돈 자체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퀘스트가 말하는 부란 당연히 목표를 완수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서의 부일 터다.
뭘 하든지 간에 큰일을 하려면 일정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돈은 부를 나타내는 표징일 뿐이고 꼭 그게 기준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집이나 땅도 어엿한 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거지 마련은 합당한 퀘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슬슬 거주지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니까.
큰 공사이기는 하지만 노아가 직접 담당하고 있으니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더불어 간만에 다시 생긴 지위 퀘스트.
직전 기준이 랭킹 10,000위였음을 감안하면 난이도가 대폭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1,000위가 되려면 레벨이 얼마나 되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물론 랭킹이 꼭 레벨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아마도 복합적인 기준이 고려되겠지.
한편으로는 내가 아직 게이머들 중 1,000위 안에 드는 강자가 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하는 퀘스트이기도 했다.
온라인 게임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랭킹 시스템에는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남들보다 순위가 밀린다는 것이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승부욕 돋네…….’
영토나 동료 퀘스트는 지금까지의 패턴과 다르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할 수 있다. 그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명예’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카오스 게이머 집단 하나를 궤멸시켜라.
지금까지처럼 몇 명을 처치하라가 아니기 때문에 조건 자체에 애매함이 있었다. 집단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일지 명확하지 않으니까.
단순히 생각하면 ‘집단=길드’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만약 그랬다면 애매하게 집단이라고 하지 않고 길드라고 명시되었을 테니까.
이 퀘스트를 접하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부도 집단에 해당하려나?’
아마 피스&호프 같은 거대 길드의 지부 정도라면 당연히 해당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셰릴의 얼굴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있었더니 사람을 가마니로 보고 있어…….’
이제까지는 힘을 기른다는 명분으로 너무 웅크리고 있었던 면이 없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판단하면 아직 적절한 때인지 의구심도 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먼저 치고 나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퀘스트도 그 시기를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퀘스트 창을 닫은 뒤 기지개를 켰다.
달성해야 할 퀘스트를 보면 반사적으로 마음이 바빠진다.
내 이런 점이 ‘선택’을 받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3
한나절 가량 휴식을 취한 뒤 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지 않아 그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성오 씨!”
“노아, 잘 있었어요?”
“안 그래도 한번 전화를 드리려던 참입니다. 이제 준비가 거의 마무리 되었거든요.”
“준비요?”
“사업 준비도 그렇고, 주거지 공사도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습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연락한 건데.”
“궁금할 만도 하죠. 새집이 지어지고 있는 것치고 성오 씨는 그동안 너무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내가 그랬나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게이머가 아직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면 모두 놀랄 겁니다.”
“이제 그럴듯한 곳으로 이사 갈 건데요 뭘.”
“그럴듯한 것 이상이죠. 집은 이미 완성이 됐고, 보안을 위한 마지막 설비 점검을 하는 과정만 남았습니다. 원하신다면 당장에라도 입주가 가능합니다.”
“그렇군요.”
“혹시 더 주문하실 게 있으신가요?”
“제가 그곳으로 이사를 가면 어머니와 누나는 최영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집 자체는 충분히 크고 좋으니까 걱정이 없는데, 다만…….”
“아……. 보안이 걱정이군요. 당연히 제가 봐드려야죠. 사실 현재 기술 수준으로 게이머가 뚫을 수 없게 보안 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설비도 설비이지만 결국 사람이 중요하죠. 카일에게 직접 가족분들 보안을 담당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러면 될까요?”
“카일을요? 그건 너무 과하지 않나요?”
“물론 그가 직접 24시간 가족분들을 경호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팀을 꾸려야죠. 그리고 그 팀을 카일에게 담당하도록 하는 겁니다. 카일이 그쪽 일을 꽤 오랫동안 해서 아마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레벨 100이 넘는 게이머가 가족의 보안을 담당해 준다면 당연히 그 이상을 바랄 수 없다.
나야 좋지만 카일이 노아가 신뢰하는 최정예 게이머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조금은 부담이 되었다.
나는 조금 생각한 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노아.”
“뭘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OG는 성오 씨가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길드입니다. 성오 씨가 가족의 안전이 걱정되어 백 퍼센트 길드에 전념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부길드장으로서 조치를 취해야지요. 사냥 능력이 부족한 제가 하는 일이 결국 이런 거 아니겠어요?”
“아유, 세계 제일의 브레인 게이머가 왜 그런 겸손의 말을 하시나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한 뒤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셰릴과 독대한 뒤로 생각한 것이 있다. 현실 쪽 공략에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고.
게임의 무대 자체가 현실, 그리고 세상임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내 행동반경은 너무 좁았다.
레벨 130에 이르렀고, 파티원들의 수준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게 되었으니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될 시기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셰릴 문제 말인데요.”
“네, 말씀하시죠.”
나를 따라 노아의 음성도 신중해졌다.
“가만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여우같은 여자라서 언제 허를 찌를지 모릅니다. 이쪽 전력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 대응하기 어렵겠죠.”
“맞습니다. 사실 이번에 성오 씨에게 접근한 것도 생각보다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녀의 역량을 감안하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죠.
다만 데이비드 정과 셰릴은 질적으로 다른 인물입니다. 같은 방식의 습격이 먹힐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죠. 이럴 때를 대비해 제가 준비해 놓은 게 있는데, 물리적인 타격은 안 되겠지만 셰릴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게 뭔데요?”
“전화로는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그냥 슬쩍 장난을 치는 수준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어요. 가만있기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뭐라도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셰릴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네요. 그리고 니콜라스도.”
“니콜라스요?”
미국에 있는 피스&호프의 길드장 이름까지 나오자 나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노아가 생각 없이 무슨 일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분명히 나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꾸민 일일 것이다. 그게 무엇일지 기대가 되었다.
4
이사는 한번 결정을 내리자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노아 말대로 집은 이미 완공이 된 상태라서 언제든 입주가 가능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보안 작업을 마무리하고, 멤버 개개인의 특성에 맞도록 가구나 실내 디자인에 추가 주문을 넣어서 수일 내에 완료가 된다는 얘길 들었다.
아울러 티코이네 집도 어머니와 누나가 살 수 있게 새롭게 꾸며졌다.
아파트만 낡은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집기나 가구가 모두 낡았기 때문에 몸만 그대로 옮기면 될 수준이었다.
내가 이사 얘기를 꺼내자 어머니의 반응은 예상대로 복합적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 자체는 싫을 리가 없지만,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말씀을 드렸다.
“사업을 하고 길드까지 운영하려면 아무래도 일이 더 바빠질 수박에 없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이 다른 일하고 좀 달라서 동료들하고 같이 생활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거든요.”
“……그래도 너는 몸만 어른이지, 아직 속은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밥은 누가 챙겨주고?”
“하하. 엄마나 그렇게 보지 아무도 저를 애로 안 봐요. 밥은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제가 집안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어휴…….”
어머니는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셨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아들과 떨어진다는 것이 기어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십 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있었던 아들이니까, 더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주 올게요, 엄마.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그래……. 전화 자주하고.”
“네.”
C급 던전 옆에 마련된 대규모 부지에 주거지, 더 정확히 말하면 OG의 기지가 꾸려졌다.
최초 공사 계획대로 베버리힐즈 풍 펜트하우스 여러 채와 각종 편의시설이 만들어졌다.
주위에는 높은 담이 둘러지고 감시카메라만 백여 대가 설치되는 등 웬만한 기밀 시설보다 삼엄한 보안시설이 갖춰졌다.
전에 이야기를 들은 대로 부지의 절반 이상은 집이 차지했다. 딱 열 채가 지어진 집은 파티원이 한 명씩 들어가 살기에도 여유가 있었다. 일부를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암젤은 나와 같이 살려고 할 것이고, 트레앙은 아린이 데리고 살 것 같으니까. 집의 개수가 더욱 남아도는 셈이다.
집을 이렇게 많은 지은 이유는 당연히 앞으로 파티원들이 더 늘어날 것을 감안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추가로 주택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아직 상당한 양의 부지가 남아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궁전 같은 주거 시설을 보자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사실 이런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큰 몫을 했다. 던전 주변은 일반인이 거주를 기피하고, 게이머의 숫자는 많지 않으니까.
이사 날짜에 맞추어 노아는 멤버들 각자에게 슈퍼카를 한 대씩 선물했다.
나를 따라서 모두 면허를 땄지만, 솔직히 몇 명이나 실제 운전을 즐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집 자체가 으리으리해서인지 슈퍼카가 여러 대 들어와도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사는 환경이 달라지니까 더 확실한 자각이 생긴다.
내가 더 이상 평범한 서민이 아니라는 것.
아울러 배포도 생겼다. 이제부터 더욱 큰일을 벌이고, 적들에 뒤지지 않는 사회적 지위를 얻어야겠다는.
내게는 물론 이런 모든 것이 게임을 하는 감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은 전투 콘텐츠만 즐겼다면 이제는 더욱 다양한 콘텐츠에 손을 뻗칠 차례이다.
나는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어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