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독식왕 : 클리어러 169화
“지금 내 자질을 의심한다는 거야?”
피오리오에게서 무겁고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는 단순히 능력 자체에서 흘러나온다기보다 전설의 창술사로 오랫동안 추앙받아 온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진중한 기백에 가까웠다.
아르바난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호기심과 호승심이 어우러진 얼굴로 피오리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법이군. 하지만 한참 멀었다. 아마 네 가벼운 성품이 한계를 한 단계 낮추고 있는 것 같군.”
‘어휴…….’
나는 아르바난의 돌직구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피오리오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피오리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짙은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잘도 지껄이는군. 나도 모르는 내 한계를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야?”
이번에도 아르바난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보인다, 내 눈에는.”
피오리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웬만한 사람이 도발을 했다면 지금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동경을 품었던 인물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더욱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가만 두어서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둘에게 말했다.
“같은 편끼리 괜히 감정 다툼하지 마시죠. 제가 볼 땐 두 분 다 전설의 칭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춘 분들입니다. 아니라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이름이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피오리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감정 다툼이 아니야! 내 자존심, 즉 인생이 걸린 문제다!”
반면 아르바난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성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내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애송이. 원래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으으…….”
아르바난의 말은 오히려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금방이라도 창을 들고 뛰어들 듯한 피오리오에게 내가 다시 말했다.
“피오리오! 당신은 무기도 갖지 않은 상대를 공격할 생각입니까? 자존심이 상한 건 알겠는데 그건 앞으로 실력으로 증명하면 될 일입니다. 누구도 당신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괜히 전설의 칭호를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흐음…….”
피오리오를 휘감고 있던 거친 기운이 가라앉았다.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네 말이 맞아, 조성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를 지휘하는 대장은 너인데 내가 너무 경거망동했군. 사과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깔끔하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아르바난에게 던졌다.
“실력을 보여주시지. 나도 귀로만 들었지 당신 실력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니까.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공중에서 던져진 창을 낚아챈 아르바난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확인하고 싶다라……. 건방진 말을 하는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내가 살아왔던 때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 손 안에 있는 창의 무게를 가늠했다.
“훌륭한 창이로군. 소재의 한계는 있으나 그것이 가진 잠재력을 극대로 뽑아냈어. 게다가 이 창에는 무사할 수 없는 전투의 흔적이 갈음되어있다. 만약 이것을 사용한 것이 너라면 내가 조금 경솔한 말을 했던 것 같군.”
아르바난의 솔직한 말에 피오리오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너무 솔직한 아르바난이었다.
그녀가 살았던 때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런 성격이라면 꽤 잦은 분란을 일으켰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르바난이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마나가 흘러나왔다. 잠시 어색한 듯 표정을 굳혔던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내 힘의 전부를 쓸 수는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이 정도로도 나쁘지는 않아.”
그녀의 창무가 시작되었다.
여성의 몸이지만 큰 키와 발달된 근육 탓에 연약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이기에 보일 수 있는 가벼운 몸놀림과 섬세함이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창술은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이 더욱 정교해지고, 창끝에는 힘이 실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물이 그녀의 창무를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아르바난이 제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 누구보다 먼저 피오리오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창술이 있다니 나는 본 적도 없어. 마치 보물 상자를 연 기분이야. 빨리 따라해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군.”
“당연히 본 적이 없겠지. 이 창에서 얻은 영감으로 내가 방금 만들어낸 동작이니까.”
아르바난의 말에 피오리오의 눈이 땡그래졌다.
“뭐? 바, 방금 만든 거라고?”
아르바난은 창을 던져서 피오리오에게 돌려주었다.
“무의 진정한 경지에 들어서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무란 이론에 얽매이는 게 아니야. 내 판단에는 네가 나보다 몇 세대 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역사와 이론에 노출된 게 아닌가 싶군. 모든 건 기본에 달려 있다. 시간을 들여 정진한다면 잡다한 지식 없이도 진실 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아…….”
피오리오는 자기 손 안의 창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긴 해도 그의 안에서 많은 영감이 휘몰아치는 모양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싸움이 끝났으니 그가 다시 있던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아마 그곳에서는 창술을 연마하기가 불가능하리라는 점이었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창을 괜스레 쪼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르바난은 가볍게 팔다리를 움직여 몸을 이완시켰다.
“너무 오랜만이라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아. 이런 기회를 주어서 참 고맙군.”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지 몰라 미소만 마주 지어 보였다.
피오리오와 그녀를 파티에 포함시킨 것은 내가 아니다. 시스템, 더 정확히 말해 이 판을 짠 누군가이다.
그때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수 파티원을 비어 있는 군주 자리에 배치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한곳에 복수의 인원을 배치하는 것이 가능하며 특수 파티원의 군주 배치는 결투의 탑 소환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오!”
나는 새롭게 열린 시스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긴, 전설 속의 인물을 살려냈는데 고작 군주전에만 동원할 수 있다면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다른 의미로 군주전을 치를 때마다 군주 자리가 하나씩 공석이 될 텐데 그것을 마냥 비워둔다는 것도 맹점으로 보이고.
[현재 배치 가능한 군주 자리는 67위 하나입니다. 이곳에 특수 파티원을 배치하겠습니까?]
“그래.”
나는 일단 대답을 한 뒤에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에게 물었다.
“두 분 중 한 명이 67위 군주 자리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하고 싶으신 분 있나요?”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이 마주 보았다.
이내 피오리오가 먼저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물론 하고 싶기는 하지. 하지만 경쟁 상대가 너무 특출해서 내가 함부로 나서기가 좀…… 민망하군.”
“그렇게 말할 것 없다. 나는 과거에도 군주를 한 적이 없어. 자리에 연연하면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지. 딱히 군주 자리에 있지 않아도 아무도 우리 부족을 건드리지 못했다. 네가 나보다 먼저 생명을 되찾은 것도 있으니 이번에는 내가 양보하마.”
“그게 진짜야? 겪을수록 마음에 드는데? 아르바난 당신이 같은 세대를 살았다면 아마…….”
“선을 넘지 마라, 애송이. 너 같은 게 감히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사실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메시지가 말하길 필요한 경우 같은 자리에 복수의 특수 파티원 배치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다만 군주 자리는 하나일 텐데 혹시 자존심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럼 67위 군주 자리는 피오리오가 맡아주세요. 그리고 아르바난도 함께 가서 도와주시는 걸로 하고요.”
피오리오를 도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을 텐데 아르바난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명을 따르도록 하지.”
피오리오의 입이 기쁨으로 벌어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곧바로 답답한 침묵 속에 갇히지 않아도 되고, 아르바난이 옆에 있다면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어쩐지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반한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나는 바닥에 털썩 앉아 수보타를 불렀다.
“수보타!”
“네! 주인님!”
“일단 식사부터 하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넵! 알겠습니다!”
수보타는 인벤토리에 비상식량을 넣어두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식탁이나 식기 같은 도구들도 챙겨 다녔다. 그밖에 집사로서 필요한 잡다한 물건도 있는 모양이지만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그에게는 인벤토리가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창고인 셈이다.
음식이 차려진 곳으로 모든 파티원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은 음식을 먹으면서 순수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건 내게도 익숙한 맛이군. 하지만 그 정도가 끝이 아니야. 요리 기술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발전을 한 모양이로군!”
“내가 군주 자리에 있을 때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야! 쥐처럼 생겨가지고 솜씨는 제법이구나!”
나는 식사를 하면서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일러주었다. 정보가 있어야 군주자리에 앉아서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은 신기해하는 한편 큰 기대감을 가졌다. 이제와 느끼는 건데 둘 모두 카오스나 오더 한쪽 성향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금의 군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오래전에는 성향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사이에 뭔가 계기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르바난에게 장비를 건네주었다.
바자야와 아르바난 세트.
사실 바키움이라는 그녀 전용의 활이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나도 활이 있어야 하니까 그것까지 주지는 않았다.
이계로 들어가면 둘 모두 자기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애초에 내가 갖게 된 물건들도 그들에게서 파생된 거니까 그쪽으로는 당연히 노하우가 있을 터.
아르바난은 자기가 오래전에 사용했던 장비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게 사라지지 않고 여태 남아 있다니 놀랍군! 고맙네! 조성오.”
“뭘요. 맡긴 일은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말게. 다시 죽음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으니까. 그곳에 있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확실히 생동감이 부족하거든.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아.”
“역시! 누나는 나랑 마음이 잘 맞는다니까. 우리 잘해봅시다! 아르바난 누님!”
피오리오가 아르바난을 부르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누나로 정해졌다. 아르바난은 다소 귀찮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딱히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리가 정리되자 피오리오와 아르바난이 먼저 빛줄기에 휩쓸려 사라졌다.
나와 파티원들도 티코이네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