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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68화 (168/245)

# 168

독식왕 : 클리어러 168화

파라얀은 망연한 모습이었다.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걸로 모든 것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주민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자신의 가문을 따르던 사람들임을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된 이상 이곳에서 더 살아갈 수가 없다. 인투스 뒤에는 크레도가 있고, 그의 집착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인투스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집요하게 자신을 노릴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어두운 선택지를 가슴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크레도에게 투신하는 것.

스스로 그를 찾아가는 것이 파로나와 마법사들, 그리고 주민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파라얀, 이야기 좀 할까?”

파라얀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선 남자를 보고 또다시 상념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동요가 심해졌지만 싸움이 끝난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9

로치온과 파라얀은 피해를 입지 않은 천막 안에서 독대를 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뒤에 파라얀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난 어떤 기대에도 부응할 수 없어요. 복구가 끝나면 혼자서 크레도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당신이 파로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도달할 때까지만 함께해 줘요.”

“혼자서 크레도를 찾아가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도 알잖아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인투스는 당신 덕분에 막아냈다 하더라도 다음번엔 더 큰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태로 떨어질지도 모르죠. 더 이상 내 자존심 때문에 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요.”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왜 방법이 없다고 속단하는 거야? 내가 왜 여기 왔는지도 모르면서.”

파라얀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로치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오랜만에 다시 봤을 때는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먼저 떠올라 그 상념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이 느껴져 대화 자체를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로치온이 자신과 남녀 관계를 이어가고자 찾아온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자존심이 센 남자이다. 이곳을 떠났을 때 안고 있었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해봐요. 왜 이곳에 다시 온 거죠?”

로치온은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역시 오랜만에 그녀를 보고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잔재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본의 아니게 큰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고.

오히려 그 덕분에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지난 몇 달간 겪었던 일들을 그녀 앞에서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파라얀은 생각에 잠겨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로치온은 그녀의 표정이 아까와 긍정적인 의미로 달라졌음을 느꼈다. 적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겠지.

그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얹어진 무거운 돌덩이가 치워진 기분이었다.

이내 파라얀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 말이 모두 사실인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로치온이 허튼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런 식의 반문을 하는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을 떠났던 이유는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기 때문이었어. 솔직히 당신과 마을을 떠나서도 해결될 거란 보장이 없는 문제였지. 숙명을 안고 있는 처지에 안락과 행복에 물들어 가는 내 모습이 죄스러웠어.

당신을 떠나고 예상대로 많은 후회를 했었지. 때문에 내게는 이 일이 축복 같은 기회로 여겨져.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카오스 군주의 지배를 거북해하고 자신의 신념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군주들, 신민들,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될 수 있어.”

“희망은 공짜가 아니에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제껏 보고,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희생을요.”

“알아. 하지만 희망에 목숨을 걸 각오를 지닌 게 나와 당신뿐이라는 것은 오만한 가정이야. 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해. 긴 역사 속에 판도를 뒤집을 유일무이한 기회가 찾아온 거야.”

“…….”

파라얀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물론 자신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레도에게 압박을 받으며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로치온의 말마따나 자신에게도 축복 같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이 무거운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좋아요, 로치온. 내가 비어 있는 군주 자리를 맡겠어요. 하지만 신민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겠어요.”

“당연하지, 파라얀. 나도 그들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몸이 서로에게 조금씩 기울어졌다. 처음에 움찔대던 손이 테이블 위에서 가까워지던 차였다.

천막 입구가 홱 젖혀지며 익숙한 인물이 불쑥 들어왔다.

“언니, 묻어야 할 시체와 태워야 할 시체를 나 혼자서 구분하기가 어려워. 언니가 나와서 좀 봐줘야겠어.”

파로나의 시선이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두 남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될 걸 괜히 삼자인 내가 걱정했었네. 역시 연인 간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하게 내버려 둬야 한다니까.”

토라진 투로 천막을 다시 닫고 나가 버렸다.

로치온과 파라얀은 몇 센티미터 거리로 가까워진 자신들의 손을 얼른 감추었다.

로치온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파라얀…….”

파라얀은 미소를 짓고 차분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아직이에요, 로치온.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

두 사람은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언제 역병을 일으킬지 모르는 언데드 사체를 먼저 처리하고, 파라얀은 마을 사람들에게 거주지를 옮길 계획이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더불어 자신이 비어 있는 군주 자리를 맡게 되리라는 사실도 알렸다.

그녀의 말에 마법사와 주민들은 인투스를 쓰러뜨렸을 때보다 더욱 크게 환호를 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는 넘겼다고 해도 자신들의 운명이 암울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중에 파라얀의 말은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아니, 그녀가 영주가 되고 어엿한 영지가 생긴다는 것은 엄청난 반전이었다.

파라얀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전율을 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새삼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주거지를 옮긴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로치온의 말대로 희망에 목숨을 거는 것이 비단 자기뿐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안전을 위해 움츠리기보다 군주가 되어 야망을 펼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물론 당장의 희생을 불러온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미래 세대까지 아우른다면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이고 자신들이 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이 곧 신민들의 자존심이며 그 무거운 책임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한편 로치온은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새 정착지를 찾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크레도와 동맹을 맺고 있는 군주의 영지를 거칠 필요가 없고, 웬만한 위협은 파라얀과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보다는 발루아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67위 군주 자리가 아쉬웠다. 적당한 동맹이 그 자리에 앉아준다면 아주 좋은 전략적 거점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당장 적합한 인물을 섭외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게다가 이 땅에는 크레도의 시선이 닿아 있다.

그가 전면전을 일으킬 각오로 싸움을 걸어온다면 이겨낼 가능성이 없었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접기로 했다. 물론 발루아의 영지를 차지해 파라얀의 군락지까지 흡수한다면 대륙으로 이어지는 유리한 거점이 생기겠지만, 이곳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고개를 한 차례 내젓고, 때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파라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Chapter 44 - 합당한 대가

1

나와 파티원들의 시선이 방금 떨어진 빛줄기 쪽으로 향했다. 이제 막 싸움을 끝냈는데 설마 또 다른 적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보다는 뭔가 시스템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짐작했다.

가정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연관이 없다면 당연히 새로운 분기가 펼쳐진다는 얘길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 등장한 인물은 적이 아니었다.

큰 키에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여자가 나타나 놀라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 시선에는 마치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것 같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랜 세월 영계에 머물러 있던 자가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생을 얻은 것 같은 눈빛.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녀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특수 파티원이 추가되었습니다.]

[유저는 다음 군주전부터 ‘특수 파티원 소환권’을 사용하여 ‘아르바난’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아르바난…….”

내가 읊조린 이름에 아르바난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게 누구냐고 묻기 전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녀에게는 저절로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일국의 여왕이나 가질 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아르바난이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조성오인가?”

“네.”

“흠…….”

긴 대화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피오리오를 만났을 때 같은 일을 한 번 겪었기 때문에.

똑같은 특수 파티원의 입장인 피오리오가 그녀를 보고 강한 호기심을 띠었다.

“아르바난? 당신이 그…… 전설 속의 궁신, 아르바난이라고?”

전설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르바난에게는 전혀 부끄럽고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

“너는 누구지?”

피오리오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하하! 놀랄 노 자로군! 나보다 몇 세대 전의 인물을 만나게 되다니! 나는 어렸을 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 전설을 접하고 궁사가 되는 꿈을 갖기도 했었지. 결국 내게는 창이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두 가지 무기 모두 대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잖아?”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아르바난의 대꾸에 장난기 넘치던 피오리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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