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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66화 (16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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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66화

    내가 발루아를 죽이자 스킬이 풀리면서 병사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본래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채 오 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병사들은 마치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중노동에 시달린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한 상태가 되었다.

    군주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니 약간 동정심이 일기는 했지만,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나와 파티원들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적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결투의 탑에서는 승리가 선언되지 않는다.

    “으악!”

    “끄아아악!”

    순식간에 모든 병사가 죽임을 당했다.

    [67위 군주를 물리쳤습니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적들의 레벨이 낮았기 때문인지 추가 경험치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레벨이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군주가 하나 더 제거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성과가 있는 일전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 결투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었다.

    코리우스의 검을 인벤토리로 되돌리는 순간, 방 중앙에 또 하나의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7

    로치온과 파로나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발루아가 등장하고 전투는 다시 적들의 우세로 돌아갔다.

    발루아가 거느리는 병사들 자체가 수준이 높지 않고, 그런 그들이 광전사가 되었다고 해서 극적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 숫자가 수백 단위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법사들은 어차피 수준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보통 상태일 때의 발루아 병사와 비슷했다.

    로치온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적의 규모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갑자기 발루아 병사들 사이에 흐르던 보랏빛 안개가 사라졌다.

    새로 광전사가 되는 병사가 없어진 것과 더불어 기존에 광전사가 됐던 이들도 점점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명백히 발루아의 스킬이 멈추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 로치온은 그가 서 있던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비대한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던 군주가 보이지 않았다.

    로치온은 의아했다. 유리한 싸움을 팽개치고 도망갔을 리는 없고,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불가사의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식의 범주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렇군.”

    발루아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그의 서열이 몇 위인지조차 잊고 있었다.

    67위.

    순서를 따져 보면 조성오가 다음으로 싸울 군주가 바로 그였다.

    ‘타이밍이 절묘하군!’

    그는 여전히 어찌 된 영문이지 모르는 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발루아는 제거되었다! 남아 있는 그의 병졸들을 쓸어버리자!”

    워낙에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는 싸움인지라 마법사들은 왜 갑가지 그런 일이 발생한 건지 의아하게 여길 겨를도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절망적이던 전세가 바뀌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로치온의 힘 있는 목소리에 고무된 마법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발루아 병사들에게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세하다 못해 일방적으로 뒤바뀐 전황은 잠시 전의 상황과 완벽히 대비되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파로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에서 발루아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파라얀과 로치온 정도밖에 없는데, 파라얀은 정반대 쪽에 있고 로치온은 내내 자기 시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물음에 로치온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싸움이 끝나면 얘기해 줄게. 이건 내가 파라얀을 만나러 온 이유와도 직결되니까.”

    파로나는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전투 중에 그 이상을 묻기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갑자기 찾아와 언니를 혼란시켰던 로치온이 이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제 그녀는 로치온을 더 이상 미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인 동경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힘내라! 얼마 남지 않았다!”

    로치온은 아버지 옆에서 싸울 때도 리더의 자질을 인정받았었다. 군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이룬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와 함께 성숙한 그가 마법사들을 통솔하기 시작하자 마치 몇 년은 함께 훈련한 병사들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광전사가 되었던 발루아 병졸들은 곧 자신들이 어떤 상태가 되었었는지 기억했다.

    그런 위험한 기술을 사용한 군주를 위해 더 싸우고픈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병사들 중 절반은 도망을 가고 절반은 무기를 던지고 항복했다.

    로치온은 항복하는 병사들까지 굳이 죽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아직 확실히 유리하다고 볼 수 없는 전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인을 잃은 말을 잡아타고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쉴 새 없이 밀고 내려오는 언데드들을 마법사들이 힘들게 막아내고 있었다.

    인투스가 조종하는 언데드들은 발루아 병사들처럼 오합지졸이 아니다. 오히려 지능이 없는 만큼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싸움이 일방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파라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터뜨리는 스킬이 언데드들이 늘어나는 속도를 제어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버텼다고는 해도 영구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중이었고, 조금씩 마음속의 희망이 흐려졌다.

    “파라얀!”

    갑자기 들린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로치온이 낸 것이었다.

    지친 눈에 맺힌 장면이 마치 20년 전의 환상을 보는 듯했다.

    “언데드들은 나와 마법사들이 맡을 테니, 너는 인투스에게만 집중하도록 해!”

    구체적인 지시가 머리를 맑아지게 했다.

    “그게 무슨…….”

    그녀는 그제야 반대편의 전황을 확인했다.

    발루아가 나타난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희망이 사라졌던 이유도 로치온과 파로나가 그 상황을 끝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발루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의 병졸들도 완벽히 제압당해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싸움에 승리하여 한껏 고무된 마법사들뿐이다.

    거짓말 같은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로치온이 그런 그녀에게 일갈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인투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너뿐이야!”

    “아…….”

    파라얀은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발루아가 없어졌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다. 가장 지긋지긋한 적이 건재했다.

    로치온의 말마따나 인투스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자기밖에 없다.

    그녀는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가까워진 로치온을 마주 보았다. 여러 가지 상념이 뒤섞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로치온이 미소를 지었다.

    “얘기는 나중에. 일단 저 시체처럼 창백한 놈부터 해치우자.”

    로치온의 창이 춤을 추었다.

    언데드들이 마치 썩은 통나무처럼 베어 넘어갔다. 몇 번 전투를 더 치르는 동안 그는 200레벨에 육박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언데드들의 레벨은 기껏해야 생전의 수준을 웃돌지 못한다. 다만 인투스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닌 탓에 버프를 받고 있기는 했다.

    파라얀은 몸을 추슬렀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마나를 모으고 가다듬을 얼마간의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 사실을 로치온과 파로나 역시 잘 알았다.

    파로나가 지시하여 십여 명의 마법사가 파라얀을 둘러쌌다. 조건이 갖추어지자 그녀는 주문을 읊조려 대마법을 시전할 준비에 들어갔다.

    인투스는 멀리서 전황을 관전하고 있었다.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조금씩 부담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발루아가 마치 텔레포트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불가사의한 현상을 자기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스킬이 풀리면서 그의 병졸들은 쓸모없는 종이인형이 되어버렸다.

    “제길…….”

    그는 크레도의 밑으로 들어간 것을 여태 후회하지 않았다. 연구 재료를 무한대로 공급받았고, 더 이상 시체를 구하기 위해 시간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불편도 있었지만, 소득에 비해 비용은 결코 크지 않았다.

    16위 정도의 군주가 뒤에 버티고 있다면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처럼 악명만 있고 백이 없는 마법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배경이 독이 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과거의 그였다면 미련 없이 꽁무니를 뺐을 법한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계산이 휘몰아쳤다. 만약 여기서 물러나면 크레도에게 책임을 추궁받을 것이 틀림없다.

    크레도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그가 파라얀에게 들인 공력을 감안하면 책임에 대한 벌이 죽음이 될 확률도 적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도 16위 군주를 피해 달아날 장소는 없다.

    더구나 자신처럼 오명만 그득한 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도처에 크레도의 동맹이 있고, 달아났다가 잡힐 경우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생존 가능성이 제로가 되어버린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고 해서 아직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없군.’

    그는 스스로를 살아 있는 네크로맨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 자부했다.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아 쉽게 최고 경지에 올라선 다른 네크로맨서들과 달리 자신은 처절한 과정을 거치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거듭된 연구를 통해 비기를 완성하는 직전에 와 있었다.

    이 기술이 완성되면 자신은 명실상부 최고의 네크로맨서가 될 것이며, 완벽해지기 전까지는 그 기술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계획을 어긋나게 만든 놈들에게 내릴 형벌은 죽음뿐이다.

    타인의 죽음은 그에게 늘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시체는 연구 재료가 되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기술이 더욱 완숙해질 수 있으니까.

    파라얀은 더할 데 없이 훌륭한 연구재료가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시체 한 구가 수백 년간 이어온 자신의 연구에 방점을 찍게 해줄지 모른다.

    쿠구구궁-!

    인투스가 양팔을 들어 올리자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루아의 스킬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마법도 자신이 풀어놓은 언데드들에게만 작용했다.

    언데드들의 몸뚱이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찌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수백 개의 시체 조각이 언덕을 향해 날아갔다.

    인투스의 몸뚱이도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쭉 찢어졌다. 사지가 절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창백하기는 해도 일반적인 신형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몸이 극적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몸뚱이가 들러붙어 언덕 위가 커다랗게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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