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독식왕 : 클리어러 165화
6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이번 층도 사이즈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 말은 곧 수보타의 추측이 사실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결투의 탑 7층에 입장했습니다. PHASE 5의 클리어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명예 : A, 영토 : A]
최상은 아니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결과였다. 어차피 퀘스트 초과 달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S등급은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달성한 특수 퀘스트가 있습니다. 스페셜 포인트(SP) 2,000을 획득했습니다. SP로는 ‘특수 파티원 소환권’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특수 파티원 소환권의 가격은 장당 SP 1,000입니다. 포인트를 소환권과 교환하시겠습니까?]
“그래.”
나는 SP 2,000을 특수 파티원 소환권 두 장으로 바꾸었다.
특수 파티원이라 함은 나와 생활을 같이 하는 파티원 이외에 결투의 탑에 왔을 때만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을 일컫는다. 현재 특수 파티원은 딱 한 명 존재했다.
인벤토리에 저장된 은색 티켓을 꺼내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수 파티원을 소환하시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한 명밖에 없어서인지 소환권을 몇 장 사용할지, 누구를 소환할지와 같은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다.
번쩍 한 줄기 빛이 떨어지더니 오래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마르고 키 큰 피오리오가 나타났다. 복장과 무기는 내가 전에 건네줬었던 전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다소 어색한 듯 뒷목에 손을 얹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손에 들고 있는 창을 붕붕 몇 번 휘두르고 나서야 나를 보았다.
“여~ 조성오. 오랜만이야. 자주 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군.”
“죄송해요. 제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아니네. 내가 있는 곳은 뭐랄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곳이라서. 오랜만이라는 감각만 있을 뿐이지, 어떻게 보면 바로 어제 자네를 만났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네.”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짓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하면 자네도 한 번 죽어보든가, 그러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게 될 거야.”
“사양하겠습니다.”
피오리오는 나이나 ‘전설’이라는 품격과 무관하게 편안한 태도로 내 옆에 늘어선 파티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새 동료가 많이 늘었군. 숱하게 많은 용병 집단을 보았지만 이처럼 다채로운 구성은 한 번도 보지 못했네. 동료들을 보면 리더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법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참 대단하군.”
나를 바라보는 피오리오의 눈빛이 새삼스럽게 호기심을 띠었다.
그때 내 앞에 주위를 환기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결투가 시작되기까지 오 분 남았습니다.]
나는 아린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내 뜻을 알아채고 피오리오와 파티원을 소개하는 역할을 대신했다. 그동안 나는 퀘스트 정산 포인트로 소환 몬스터를 선택했다.
가장 먼저 고른 것은 드로스트킹이다. 남은 포인트로는 일반 드로스트 두 마리를 선택했다. 팔이 네 개 달린 하늘 던전의 마스터.
이놈을 고른 것은 당연히 새로 추가된 파티원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시키기 위함이었다.
타로가 드로스트킹을 보고 반가워했다.
“우와~ 여기에 이 녀석을 불러내다니! 역시 주인은 대단해! 이런 신기한 재주를 타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방심하고 있는 사이 그가 날아와 내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
크기가 조그맣고 손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아서 아프기보다는 철없고 귀엽다는 느낌이었다.
타로는 헤헤거리며 날아가 드로스트킹에 빙의했다.
마치 오랫동안 창고에 묵은 로봇이 기동하는 것처럼 드로스트킹의 눈빛이 살아나고 신체와 마나에 활력이 더해졌다.
오 분이 채워지자 방 안 여기저기에서 굵은 빛줄기가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이번 층에는 평소보다 떨어지는 빛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렇다 해도 최대 스무 개를 넘지 않았다. 확실한 추측인지는 몰라도 아마 군주가 동원할 수 있는 부하의 숫자가 스물이 한계지 않을까 여겨졌다.
수보타는 결투의 탑이 방의 크기가 제한적이어서 소환되는 적의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만, 나는 다른 요소도 작용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탑은 상식의 범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두 가지 세상의 균형을 위해 창조한 공간이다.
일반적인 물리력이 그대로 통용되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내 파티의 전투력이나 규모에 맞추어 상대 전력의 규모도 정해지는 것이리라.
어쨌든 어떻게 가정을 해도 67위 군주 발루아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같았다.
발루아는 비대한 몸집에 다소 게으른 눈을 가진 놈이었다.
이제까지 겪은 군주들이-아군이 된 오더 군주를 제외하고- 다 시답잖은 놈들이었음을 감안해도 이놈은 어딘지 나사가 몇 개는 더 빠진 것처럼 보였다.
허공을 한번 쳐다보고 나를 한번 보고 하는 행동을 다섯 번인가 반복하더니 거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계의 인간들인가?”
“그건 네 기준이지. 내 입장에서는 네가 이계인이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여 생각에 빠진 발루아의 행동을 보고 내가 말을 잘못 꺼냈음을 깨달았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능도 한참 부족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내가 발루아를 마주하고 받은 또 하나의 충격은 녀석의 레벨이 67위 군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것이었다.
레벨 44.
이런 레벨로 어떻게 군주 자리를 유지했는지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수보타의 말마따나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만큼 쉬운 싸움이 되리라고 예상되었다.
혼자 머리를 굴리던 발루아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거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발루아는 느린 시선으로 나와 파티원들을 둘러보았다. 피오리오를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곧 67위 군주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죽여주마, 벌레들.”
레벨이 44밖에 되지 않는 놈치고는 과감한 발언이었다.
기실 그는 파라얀의 마을을 공격하다가 이곳으로 불려와서 나름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동안 싸움을 기피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에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만들어낸 광전사들이 적들을 무차별적으로 제압하는 광경을 보고 한껏 자신이 붙게 되었다.
나쁜 머리로 속단하기를, 그동안 괜히 파라얀을 겁내서 친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다.
크레도나 인투스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혼자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발루아는 뒤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구성에 전혀 통일성이 없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 병사들이 그의 앞으로 정렬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병사들은 숫자만 많을 뿐이지 레벨은 죄다 30중후반 대였다. 자기 군주를 닮아서인지 머리도 하나같이 나빠 보인다.
하긴, 그러니까 발루아 같은 놈을 따른 거겠지.
옛 기억을 더듬던 피오리오가 말했다.
“아~ 발루아였군. 놈이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지 말해줄까?”
“알아요. 부하들을 광전사로 만드는 특기가 있다는 거죠?”
“맞아. 하지만 별거 아니야. 신은 왜 저런 녀석에게 귀한 능력을 주었는지 몰라.”
산적 떼처럼 어설프게 늘어서 있는 발루아 병사들에게 피오리오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내가 얼마 전까지 입었던 장비를 착용한 전설의 창술가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현재 내가 갖추고 있는 장비보다 훨씬 떨어지는 무구를 착용하고도 그는 마치 날듯이 움직였다.
똑같이 레벨 130인데도 기본기가 달라서인지 창을 달고 달려가는 모습에서 설명하기 힘든 아우라가 느껴졌다.
긴 창을 머리 위로 회전시켜 떨어뜨린 스킬은 바로 ‘토네이도 스피어’였다. 그 기술은 내가 가장 먼저 얻은 창술 스킬이기도 하다.
역시 이 기술의 창시자는 피오리오였던 모양이다.
FM으로 터져 나간 스킬이 오합지졸 병사 세 명을 날려 버렸다.
우당탕!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생명력의 절반가량은 뚝 떨어뜨렸을 법한 광경이었다.
“이야~ 자네 말대로 지난번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데? 이거 정말 재미있군!”
이어서 다른 파티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발루아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춤거렸다.
“이, 이런!”
양팔을 활짝 펼쳐 공기를 흡입하자, 원래도 커다랬던 배통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트림을 하듯 꺼억 소리를 내며 입김을 뿜어냈다.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연기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병사들 사이에 흘러들었다.
연기는 특정 대상에게만 작용하는지 우리 파티원들에게는 전혀 흡수되지 않았다.
“하하하! 어리석은 놈들. 내게 도전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발루아의 능력은 곧장 효과를 발휘했다. 오합지졸로 보였던 병사들이 매서운 눈빛을 가진 광전사로 변신했다.
나는 게임 안에서도 적지 않은 광전사를 만나보았다. 이 능력의 요체는 인간적인 감정을 지우고 무차별한 살인귀로 변신한다는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광전사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다.
물론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이성을 약간이라도 남겨 놓아 최악의 선택지는 피하곤 하지만.
내 눈에 발루아가 만든 광전사들은 매우 어설퍼 보였다.
남에게 정신을 조종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애초에 전투 의욕 자체에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놈들은 보통 상태일 때 전혀 강하지 않았다. 광전사 능력은 자신이 가진 실력을 베이스로 그것을 부풀리는 기술이다.
1이 1.5나 2가 되는 일은 있어도 3이나 4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이 기술은 수명을 깎아먹는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아주 고차원적인 조정이 필요하고, 높은 경지에 있는 능력자라도 아주 단시간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내가 볼 때 발루아의 기술은 매우 저급했다. 부하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성숙하지 않은 기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하하하! 어떠냐! 내 병사들에게 네놈들은 뼈도 추리지 못할…….”
뎅겅.
발루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오리오가 병사 하나의 목을 날려 버렸다. 이어서 트레앙이 도끼로 다른 병사의 머리통을 쪼갰다.
“끄악!”
“으아악!”
피부색이 변했던 병사들은 죽음과 동시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저마다 자기가 모시던 군주를 향해 원망을 눈빛을 보내며 생을 마감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흙빛이 된 발루아의 얼굴을 보며 내가 간단히 정답을 일러주었다.
“네 병사들은 레벨 35에서 50이 된 것뿐이야. 우리는 각자가 레벨 130이고.”
“레, 레벨?”
다시 한번 발루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네가 졌다는 뜻이야.”
나는 의상을 점퍼 세트로 바꾸고 발돋움 한 번에 훌쩍 공간을 가로질렀다.
일직선으로 낙하해 코리우스의 검으로 두꺼운 발루아의 목을 찔렀다.
“컥!”
거리를 띄우고 6클래스 마법 스킬을 떨어뜨렸다.
‘파이어 레인!’
지붕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불비가 쏟아졌다. 발루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지옥 불에 몸뚱이가 모두 녹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