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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64화 (164/245)

# 164

독식왕 : 클리어러 164화

로치온의 가세로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비록 발루아가 거느린 병졸의 숫자가 대단히 많기는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로치온은 당장 객관적인 군주 서열을 따져 보면 30위 안에도 들 수 있는 강자이다.

그가 발루아의 군세를 휩쓸어버리는 데에는 단지 시간이 관건일 것처럼 보였다.

로치온의 가세가 전투에 일으킨 긍정적인 요소는 비단 전투력 상승에만 그치지 않았다.

양쪽에서 협공 당하던 마법사들의 혼란도 일정 부분 잦아들었다.

파라얀은 쉴 틈 없이 스킬을 퍼붓는 중에 전장에 생긴 변화를 감지했다. 이만한 변수를 일으킬 요인은 많지 않다.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로치온…….’

그를 20년 만에 다시 보게 되자 격렬히 반응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강점 중 하나는 흔들림 없는 마나 컨트롤 능력이다. 오늘 전투에 앞서 마나를 날카롭게 벼렸던 그녀 입장에서는 로치온의 등장이 더욱 반갑지 않았다.

마법으로 가두어버린 뒤 더 이상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로치온의 능력을 감안하면 어스 바인딩으로 오랜 시간 묶어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0년 전의 그는 자신과 유형은 달라도 전반적으로 엇비슷한 수준의 능력자였다.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군주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싸움에 가세해 준 것은 로치온의 성품이 전과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파라얀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쓸쓸하게 느껴졌다.

‘왜 돌아온 건가요, 로치온…….’

그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었던 이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숙원을 풀어야 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넋두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말을 할 때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진한 자괴감이 배어 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느꼈다. 영원히 그를 자기 옆에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거라고.

그가 사라졌을 때, 때가 왔을 뿐이라고 자기 위로를 했지만 그렇다고 슬픔과 상실감이 반감되지는 않았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언젠가 같은 슬픔을 느껴야 한다면 당연히 멀리하고 싶었다.

파라얀은 머릿속 가득한 생각을 떨쳐 냈다.

인투스가 부리는 언데드들이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고 살기등등하게 밀고 내려왔다.

언데드들의 무서운 점은 인투스가 버티고 있는 한 죽어도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인투스가 언데드를 재생시키는 것보다 이쪽에서 죽이는 속도가 더 빨라야 한다.

파라얀은 스킬을 터뜨려 잠깐의 여유를 만든 뒤에 마나를 회복하는 물약을 복용했다. 희미해졌던 스태프의 수정이 다시 밝은 빛을 띠었다.

로치온은 쉽게 적을 제압해 가면서도 찜찜함을 느꼈다. 그는 대부분의 군주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지만 빈틈없이 완벽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헤레디투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카오스로 뒤덮인 이곳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다.

수만 년 동안 역사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아버지가 꿈꿨었고 아들인 자신이 이어받았다.

목표가 큰 만큼 타깃은 높은 서열의 카오스 군주들에 집중되었다.

모든 군주에게 동등한 관심을 줄 수는 없었다는 뜻.

‘발루아의 특기가 무엇이었더라…….’

군주 자리를 차지한 인물들은 대체로 매우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특별한 가전 스킬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발루아 일신의 전투 능력은 모든 군주를 통틀어서도 바닥 수준이다.

그런 그가 한 번의 물러남 없이 군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터.

로치온은 그게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아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오래지 않아 전투에 또 한 번 변곡점이 찾아왔다.

물밀듯 내려오는 병졸들 사이에 보랏빛 안개가 흐르기 시작했다. 연기를 마신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상체를 곧추세우고 고함을 질러댔다.

전장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기이한 함성은 파라얀 측 마법사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언덕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았다. 비대한 몸뚱이에 일반 병졸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인물.

로치온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바로 군주 발루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루아가 언덕 위에 서서 마치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하듯 양손을 휘저어 댔다. 마법처럼 피어난 보랏빛 연기가 병졸들 사이에 흘러내렸다.

연기를 마신 병사들의 첫 번째 변화는 피부색이었다. 안개 빛깔과 똑같은 보라색 피부를 갖게 된 그들은 근육이 부풀고 눈빛이 바뀌었다.

로치온의 가세에 퇴로가 없어 주춤거리만 할 뿐이었던 허수아비 병사들이 두려움을 모르는 광전사가 되었다.

‘젠장!’

로치온은 이제야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발루아는 정신 오염 능력에 특화된 군주였다. 일반적으로 정신 오염 스킬은 적을 혼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그의 능력은 동시에 오염된 인물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했다.

수명이 한 시간 이내로 짧아지는 대신 최후의 한 방울까지 모조리 전투에 쏟아붓는 광전사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강력하지만 자기 파괴적인 스킬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가 병사를 모으는 일차적인 목적은 질보다는 양이었다. 훈련을 거의 시키지 않고 대우도 잘해준다.

병사들 중 태반은 자기가 언젠가 쓰이고 불태워질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발루아의 등장에 반전되는 듯했던 전세가 또 한 번 뒤집혔다.

한쪽에는 언데드, 한쪽에는 광전사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파라얀의 마법사들이 그것을 버텨내기는 어려웠다.

검은색과 보라색이 흰색을 좁혀오며 압도하기 시작했다.

4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티코이네 집에 가는 것이었다.

어제 유진이 일을 겪느라 다소의 피로감이 있기는 해도 이 모든 고생이 다 군주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이 게임의 최종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수보타가 분주하게 차려낸 만찬을 즐기면서 오늘 군주전을 치르겠다는 말을 하자 다들 곧바로 수긍을 했다.

인간 파티원들이었다면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아니냐고 불평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NPC들은 그런 것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파티원이 전투를 즐기는 편이었다.

물론 딱 한 명만 빼고.

나는 음식을 서빙하는 손이 눈에 띄게 느려진 수보타에게 물었다.

“67위 군주는 어떤 녀석이지?”

“아…… 네, 이번엔 67위 군주와 싸울 차례로군요.

수보타가 빈 의자에 앉아 나를 마주 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의 얼굴이 잠깐 사이에 부쩍 밝아진 것 같았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주인님의 실력이라면 개미를 찍어 누르는 것만큼 쉬운 싸움일 것입니다.”

“그래?”

수보타의 말로 이번 싸움이 쉽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보다운 정보를 얻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 자세히 말해봐.”

“67위 군주는 발루아입니다. 물론 제가 이곳에 건너온 뒤로 군주 서열이 바뀌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말씀드리는 거지만요. 예상컨대 그가 군주 자리를 뺏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군주들은 그를 상대하기 무척 껄끄러워하거든요.”

“그건 무슨 말이야?”

나는 개미를 죽이는 것만큼 쉬울 거라는 말과 대치되는 설명에 반문했다.

“발루아의 특기는 병사들을 광전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부하의 숫자가 많다는 전제가 필요하죠. 그런 점에서 이번 싸움은 저희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험상 결투의 탑 각 층의 공간은 결코 넓지 않습니다. 소환되는 부하가 많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주인님의 쉬운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입니다.”

“그래?”

나는 방금 들은 얘기로 67위 군주 발루아의 특기가 일종의 마인드컨트롤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본인 스스로 광전사로 변신하는 것은 흔한 능력이지만 부하들을 그렇게 바꾼다는 것은 희귀한 축에 속했다.

다만 서열이 67위라는 점에서 그 기술이 막강한 위력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수보타의 말대로 인해전술로 밀어붙여야 효과가 클 것이며 결투의 탑에서 수백 명의 병사가 소환되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렇군.”

싸우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은 나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이번 싸움에 자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슬쩍 꺼내려던 수보타에게 말했다.

“너는 이번에는 꼭 같이 가야겠다.”

“네에~? 왜, 왜입니까……?”

“왜긴, 마인드 컨트롤된 광전사라면 머리가 나쁠 거 아니야. 놈들 어그로를 네가 끌어줘야지.”

5

군주전을 치르기 데는 특별한 준비가 필요치 않았다. 출전 멤버들을 거실에 모으는 것이 전부.

이곳에 있는 멤버 이외에도 한 명을 더 불러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그를 불러내야 하나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 적절한 타이밍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먼 곳에 있는 소환가능 파티원을 불러낼 때에는 시스템 메뉴 ‘파티-전언’을 이용하면 됩니다. 다만 유저가 ‘전언’ 스킬을 보유한 경우, 메뉴를 활성화하지 않고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으음…….’

직관적이지는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다행히 나는 이미 전언 스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사용했다.

“타로, 내 말 들려?”

-응? 주인 목소린데? 나 불렀어?

“안 바쁘면 지금 여기로 와줄래?”

-주인이 부르는데 바빠도 가야지. 시답잖은 놈들이랑 싸우는 중이었는데 지루하기 짝이 없었거든. 요즘 나 불감증인가 봐.

잠시 후 날개를 파닥거리며 두 가지 몸 색깔을 가진 정령이 거실에 소환되었다.

그는 낯선 표정으로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멤버 중 몇 명은 처음 보는 사이여서 서로 소개해 주었다.

“와! 파리가 우리 편이 됐다! 쿵. 때리면 찍. 죽어버릴 것 같은데!”

트레앙의 말에 타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그가 휭 날아가더니 트레앙의 앞에서 눈알을 부라렸다.

불안감을 느낀 수보타가 말했다.

“뭘 몰라서 그러는 건데,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타로의 귀에 속닥속닥 트레앙의 능력을 설명했다.

타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진짜야? 하긴 그런 능력이 있는 변신족이 있다는 얘길 들어본 것 같아.”

쿵 때리면 찍 죽는다는 게 허풍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트레앙에게 가급적 멀리 떨어졌다.

“준비됐지?”

멤버들을 한 번 돌아본 나는 인벤토리에서 열쇠를 꺼냈다. 차원문을 열자 밝은 빛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건승을 기원합니다.”

티코이가 허리를 꺾어 우리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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