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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63화 (163/245)

# 163

독식왕 : 클리어러 163화

파로나는 캔슬레이션을 시전하려던 동작을 되돌리고 로치온에게 말했다.

“나는 가 봐야겠어요. 나머지는 당신이 직접 해결해요.”

떠나려던 그녀는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덧붙였다.

“언니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리고 아마……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언니가 당신의 입을 닫게 하고 어스 바인딩으로 묶은 것은 스스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직접 말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니 제가 대신 얘기한 거라 생각하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후다닥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치온는 파로나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인투스가 선봉에 서고 발리아까지 가세했다면 이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인투스 하나만 해도 파라얀과 맞먹을 정도로 수준 높은 마법사인데 병력마저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차이가 난다.

파라얀처럼 정순한 타입의 마법사에게 네크로맨서는 상성이 좋지 않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로치온은 파로나의 마법으로 약화된 창살을 노려보았다.

3

마을로 밀고 들어오는 언데드 무리를 바라보는 파라얀의 얼굴에는 절망이 새어들었다.

인투스가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 뒤로 매번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네크로맨서 스킬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인투스는 특별한 경지에 있는 자였다.

속설에 의하면 자기 신체를 더욱 많은 양의 마나를 담을 수 있고, 더 높은 수준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개조했다고 한다.

이제껏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만 집중하며 살아온 자이다. 그가 자기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희생시킨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로는 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크레도의 수하가 된 뒤로 인투스는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받으며 연구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예전만큼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 연구 재료로 쓰는 일은 줄어들었다고 해도 환경이 바뀐 것일 뿐 근본적인 인성이 바뀌지는 않았다.

자기의 최고 가치를 마법 기술의 완성에 두고 일반적인 도덕적 잣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릇 카오스 성향의 군주라 해도 최소한의 기준은 있는 법인데, 그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유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파라얀은 자기가 어렵게 지켜온 것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그녀는 역대 가주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재능을 이어받았지만 군주 자리를 되찾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일찍이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려다 죽임을 당한 부모님을 보았기 때문에, 개인의 욕심이 많은 이를 불행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지키는 목적 이외에는 마법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본보기를 보일 때만 능력을 사용했다. 악한 자들이 감히 헛된 욕망을 품고 마을을 침탈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전략은 수십 년 동안 잘 기능해 왔지만, 이제 와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군주가 아닌 데다 높은 마법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부하로 만들기 위해 접근하는 군주가 나타난 것이다.

보통 군주들은 인재 영입에 있어서도 성향을 고려한다. 그래야 무리 없이 부하로 만들어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드물게 오더 성향을 가진 그녀를 지금까지는 크게 욕심내는 군주가 없었다.

하지만 크레도는 특이하게도 그런 것을 고려치 않았다.

그의 요구는 집요했지만 파라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군주가 될 욕심을 버렸다고 해서 기본적인 성향이나 양심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기가 크레도 밑으로 들어간다면 부하들이나 마을 주민들은 버림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가 될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군주가 아닌 자에게는 영지와 영지민이 허락되지 않는다. 크레도에게 흡수된다면 부하와 영지민들은 노예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었다.

크레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장난감이라면 차라리 부숴 버리겠다는 듯 인투스를 보내 마을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연히 메시지가 포함된 행위였다.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을을 파괴할 거라는.

게다가 인투스는 이번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강함에 집착하는 이였기 때문에 명성이 높은 파라얀과 진검승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파라얀은 지금에 와서야 자기의 선택이 틀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장의 희생을 무릅쓰고 군주가 되었더라면 이런 수모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언데드가 되어버린 부하들과 주민들을 보고 격분했다. 감정에 반응한 스태프가 부르르 진동을 했다.

“크크크…….”

귓가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인투스가 전언을 보낸 것이다.

비쩍 마른 데가 시체처럼 시퍼런 피부를 가진 그가 멀리서 자신을 조롱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크레도 님이 너에게 마지막으로 물으셨다. 정말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너희 같은 쓰레기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일이다.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니 애써 여러 번 물을 필요 없다.”

“크크……. 고맙군. 네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군주 아닌 마법사 중에 네년과 나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이는 또 없지. 둘은 걸리적거리는 숫자야. 네년이 죽으면 내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크크크…….”

파라얀은 인투스의 전언을 차단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 대화한다는 것은 몹시 피곤한 일이니까.

그녀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전투 병력이 될 마법사 전원에게 전언을 보냈다.

“오늘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일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과 친구들, 그리고 우리를 믿고 있는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는 각오로 싸워주길 바란다!”

비장한 그녀의 말에 마법사들은 저마다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개 중에는 파라얀의 선대 때부터 함께해 온 마법사도 상당수였다. 나이와 직급에 관계없이 마법사는 모두 파라얀을 존경했다. 설령 목숨이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길 마다하지 않았다.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얼마 전까지 동료 혹은 친구였던 자들과 싸운다는 것은 무척 부담이 되는 일이다. 거기 반해 시체들은 감정적인 영향 따위는 전혀 받지 않았다.

언데드가 된 마법사들도 똑같이 마법을 사용했다. 전장 이곳저곳에서 마법 스킬들이 터지며 부딪쳤다.

시체가 된 마법사들과 살아 있는 마법사들.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여 기묘한 광경을 자아냈다.

파라얀이 스킬을 터뜨릴 때마다 언데드의 몸뚱이가 부서지고 검은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그녀는 옛 부하들의 시체가 터지는 광경에 가슴이 아팠지만 최대한 불필요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감정적으로 동요하기를 가장 바라는 것이 인투스일 것이기 때문에.

직접 전투를 주도하는 그녀와 달리 인투스는 언덕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새파랗고 창백한 몸뚱이가 그 역시 언데드 중 하나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파라얀이 걸어가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길이 열리고 빈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녀는 언덕에 서 있는 인투스를 향해 스태프를 뻗었다.

쿠구구구-

짙은 어둠이 깔려 있던 하늘이 열리면서 거대한 빛 덩어리가 출현했다. 처음에 한 덩어리였던 빛은 가닥가닥 찢어지더니 이내 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크아악!”

“캬아아악!”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언데드가 절명했다. 가장 굵은 빛줄기는 인투스를 향해 떨어졌는데, 그는 가만히 선채로 오른손만 휘저었다. 빛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비껴갔다.

크레이터를 만들며 터지는 빛 속에서 인투스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애초에 전력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싸움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7 대 3 정도로 어둠이 빛에 우세했다.

다만 파라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빛이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는 형국을 보였다.

마을의 마법사들은 당당히 선봉에서 싸움을 이끌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희망을 느꼈다. 시작하기 전에는 이길 확률이 전혀 없는 싸움 같았지만, 어쩌면 다른 결과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움텄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전투의 변곡점을 맞아 크게 꺾이고 말았다.

발리아가 반대편 언덕에서 추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야만인처럼 보일 만큼 규율이 잡혀있지 않은 군대이지만 막대한 숫자만큼은 절로 두려움을 자아냈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들처럼 마법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파로나가 언데드들과 싸우는 언니의 반대편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애초에 그녀는 언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이 터질 때마다 발리아의 군졸들이 쓰러져도 뒤를 이어 더 많은 병력이 밀고 내려왔다.

파로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언니의 모습을 찾았다.

마지막일지 모를 순간에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득 어스 바인딩에 갇힌 로치온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황당한 생각이 컸지만 어쩌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언니에게는 잘 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지냈던 날들이 머리를 스쳐 파로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통틀어 언니가 가장 많이 웃었던 때가 바로 그 시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언니를 위해서라도 로치온을 붙잡아 마을을 떠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잠깐 사이에 발리아의 군세가 언덕 아래에 다다랐다. 마법사들이 쓰러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개개인의 죽음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절망이 턱 끝까지 밀려왔다.

그때.

“파로나! 비켜!”

다급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한 줄기 섬광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서너 명의 발루아 병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배를 꿰뚫은 것은 바로 어스 바인딩을 이루고 있던 창살이었다.

창을 쥔 로치온이 등장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커다란 신형의 그가 전장에 출현하자 마치 무신이 강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법사들은 등 뒤에서 나타난 로치온에 당황했다.

파로나가 그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전언을 보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그를 도와 짐승 같은 발루아 놈들을 쓰러뜨리자!”

파라얀이 반대편에서 희망을 만들어낸 것처럼 로치온의 등장은 또 한 조각의 희망을 전파했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발루아 병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단 한 명이 가세한 것으로 전세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을 물리치고 있는 파라얀, 발루아의 병졸을 종이인형처럼 휩쓸어버리는 로치온.

언뜻 조금씩 싸움이 균형을 이루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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