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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62화 (162/245)

# 162

독식왕 : 클리어러 162화

파라얀은 흰색 로브를 입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황갈색의 스태프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조용히 진동을 했다.

그녀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오늘밤 있을지도 모를 습격에 대비해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의식이었기 때문에 바깥 경계 지역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동생인 파로나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파로나는 언니의 의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방에 들어왔다. 다른 일도 아닌 ‘로치온’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으니까.

그녀가 말을 걸려고 했을 때 파라얀이 먼저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파로나.”

파로나는 겸연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언니가 직접 봐야 할 것 같은데…….”

파라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안에 충만했던 마나가 호흡과 함께 밖으로 흘러나왔다. 간접 영향권 안에 있는데도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마나였다.

파로얀은 파로나와 자매이기는 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 번 묶은 은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키가 크고 굴곡진 몸매에서는 여성적인 느낌이 물씬 픙겼다.

로치온은 파로얀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혔다.

처음 본 순간 자석처럼 이끌렸고, 떠나 있는 동안에는 그녀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파라얀을 다시 본 순간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말없이 이곳을 떠났던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였다.

파라얀은 동생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몸이 굳었다. 몇 시간 동안의 집중으로 끌어올렸던 전투 의지가 그를 보는 순간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파라얀…….”

파리얀의 표정에는 짧은 시간 수십 가지 상념이 지나갔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순한 마나가 감정의 동요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방 안의 집기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가벼운 것들은 허공에 떠오르기도 했다.

“후우…….”

이내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집기들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불안하게 방 안을 떠돌던 마나도 주인을 찾아 수렴되었다.

“왜 지금인가요, 로치안…….”

“파라얀, 나는…….”

로치안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파라얀이 먼저 왼손 검지를 치켜들었다. 동시에 로치안의 입술은 굳게 닫혀 다시 열리지 않게 되었다.

영창이나 시간 간격 없이 발동된 마법. 역시 최고 수준의 마법사다웠다.

로치온은 어떻게든 자기 의지를 피력하려고 했지만 표정과 몸짓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파라얀이 싸늘하게 말했다.

“늦었어요, 로치온. 당신이 떠나 있는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는 평화와 안정이 존재하지 않아요. 이 땅에 혼란이 깃든 한 저 역시 편안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존재예요. 그리고 지금 내게는 그런 사치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파라얀이 오른손의 스태프를 내밀었다. 대뜸 바닥의 흙이 울긋불긋 요동치더니 기다란 상아 모양의 창살이 튀어나왔다.

십여 가닥의 창살이 로치온을 세 평 남짓한 공간 안에 가두어버렸다.

‘어스 바인딩’.

이번에도 파라얀은 간단한 동작으로 마법을 발동시켰다.

로치온은 창살을 잡고 흔들었다. 감정의 동요가 커지는 것과 비례해 마법은 더욱 강력해졌다.

파라얀은 그런 로치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방을 나가 버렸다.

파로나가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돌려보내는 게 나았어. 괜히 언니를 흥분시키고 말았네.”

파로나는 신기하는 듯 즉석에서 만들어진 감옥을 손끝으로 만졌다.

“역시 대단해. 당신같이 강한 자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다니.”

로치온은 창살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울러 파로나에게 부탁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파로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내게는 언니의 마법을 깨뜨릴 능력이 없어. 만약 있다고 해도 도와줄 생각이 없고 말이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 하필 지금 타이밍에 온 거야. 다른 때였더라면 천천히 언니 마음을 돌릴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물론 아주 적은 가능성이지만.”

그녀는 쯧 하고 혀를 찬 뒤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사일런스 마법이 풀리며 로치온이 소리쳤다.

“왜 지금이냐니? 그게 무슨 소리야?”

파로나가 돌아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당신도 언니 못지않은 괴물이군.”

그녀는 로치온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래.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렇게 갇혀 있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기도 하니 말해줄게. 인투스라고 알고 있지?”

“인투스?”

로치온은 익숙한 이름을 되새기며 기억을 떠올렸다.

인투스는 네크로맨서 계열 스킬을 사용하는 흑마법사이다.

그의 능력은 웬만한 군주를 능가하지만, 많은 이가 그렇듯 군주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후광이 없어 실제 군주가 되지는 못했다.

군주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군주가 되지 못한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야인이 되거나 다른 군주의 밑에 들어가거나.

야인이 되는 것은 결국 자기의 귀한 능력을 버리는 일이나 다름없으니, 결국 택하는 대부분의 선택지는 세력 강한 군주의 밑으로 들어가 부하가 되는 것이었다.

로치온은 인투스가 어떤 군주의 수하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크레도…….’

16위 군주인 크레도였다. 서열이 높은 군주들 중 다수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왕인 헤레디투스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일신의 힘으로 자신의 서열을 유지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힘의 가중치는 서열이 높아질수록 크게 불어난다.

헤레디투스를 포함해 1위부터 10위까지가 50퍼센트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11위에서 20위까지는 그들을 추격하는 입장이다.

현재는 세력 경쟁에서 밀리고 있지만, 언제든 10위권 안에 속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자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어떤 군주보다 세력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 크레도는 성향을 따지지 않고 실력자를 영입하기로 유명한 군주였다.

일단 같은 편이 되면 그만한 대우를 해준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제 발로 그를 찾아가는 이도 많았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많은 부하 중에서도 인투스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능력자였다.

크레도 휘하에 있는 인투스가 자기 의지만으로 움직일 리는 없다. 인투스를 거론한다는 것은 결국 이 일이 크레도와 연결되어있다는 뜻이다.

로치온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크레도가 파라얀을 노리고 있는 건가?”

“와아…….”

파로나는 로치온의 빠르고 정확한 추론에 입을 딱 벌렸다.

“맞아요. 크레도가 얼마 전부터 언니에게 친서와 선물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구애를 해왔어요. 그의 사고는 색달라서 다른 군주들이 이계에 눈을 돌린 지금이 세력을 강화하는 적기라고 본 거죠.

언니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의 선물을 그냥 돌려보냈어요. 결국 온건한 방법으로 언니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크레도가 인투스를 보내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한 거죠. 인투스는 인근에 자리를 잡고 우리 마을 주민과 마법사들을 죽인 뒤 다시 부활시켰어요.

한때는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이들이 악마가 되어 마을로 돌아온 거죠.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틈에 인투스는 점점 더 많은 주민을 죽여 악마로 부활시켰고, 결국 그의 세력이 우리를 압도하게 되었어요. 바로 오늘이 그가 총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날이에요.”

로치온은 비로소 자기가 느꼈던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경계병들이 필요 이상으로 멀리 나와 있고, 묻거나 따지는 일 없이 다짜고짜 자신을 공격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에서 의문점을 발견했다.

“인투스의 세력이 이곳을 압도했다고? 그는 군주가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크레도가 인투스를 보냈다고 해도 떼어 준 병력에는 제한이 있을 것이다. 파로얀이 욕심난다고 해서 자기 영지의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그의 영지는 이곳과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절대 친하다고 볼 수 없는 군주의 영지도 많았다.

그것이 인투스에게 붙은 병력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였다.

파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머리 하나는 비상하군요. 크레도가 인투스만 보낸 게 아니에요. 가까운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 발리아까지 움직인 거죠. 인투스가 이곳을 공격할 수 있게 병력을 대준 것이 바로 발리아예요.”

“음…….”

로치온은 그제야 모든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파라얀의 마법사로서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웬만한 군주라면 함부로 그녀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영지가 닿아 있는 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은 그는 오히려 파라얀의 눈치를 보며 친교의 뜻으로 공물을 보내오기도 하던 자였다.

발리아가 인투스의 뒤를 받쳐준다는 것은 결국 크레도가 발리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뜻이다. 굳이 그와 동맹을 맺은 이유는 물론 파라얀을 얻기 위한 포석이었을 터.

여기까지 들은 로치온은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로나! 나를 꺼내줘! 내가 싸움을 돕겠다!”

파로나는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듯이 내겐 언니의 마법을 해제할 능력이 없어요. 게다가……. 언니는 당신이 돕는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이 상황에 옛일을 따지는 게 뭐가 중요해! 일단 싸움에서 이겨야 그다음 일도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로치온은 자신의 말이 다소 뻔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자기가 아는 파라얀은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다. 그녀가 가문의 긍지를 버리고 카오스 군주인 크레도 밑으로 들어갈 리 없다.

파로나는 흔들리는 표정을 내보였다. 그녀 역시 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참한 결과가 빤히 눈에 보였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자기 스태프를 꽉 움켜쥐었다.

“좋아요. 마법을 완전히 해제할 수는 없지만 약화시킬 수는 있을 거예요. 나는 거기까지만 할 테니 나머지는 당신이 해결해요.”

“고마워, 파로나.”

로치온은 창살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고개를 끄덕이자 파로나가 스태프를 쥔 손을 내밀었다.

“캔슬레이션!”

3클래스 마법이지만 같은 수준의 마법들보다 훨씬 정교한 집중력을 요하는 마법이다. 더구나 4클래스의 마법인 ‘어스 바인딩’을 해제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했다.

파로나 역시 일류 마법사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언니의 절대적인 자질에는 부족했다.

쿠구구구!

진동음을 울리며 창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흙으로 굳어진 창살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부분적으로 금이 가기는 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십여 초간 마법을 지속하던 파로나는 결국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헉헉.”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시 마법을 이어가려 할 때 바깥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군중이 이동을 하며 지축을 울리는 소리, 그리고 동료를 끌어모으려는 마법사들의 외침이었다.

파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언니한테 전언이 왔어요. 놈들이 쳐들어왔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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