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독식왕 : 클리어러 161화
마법사들은 저마다 적갈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스태프의 모양도 같아서 멀리서 보면 전혀 구분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로치온은 그들의 생김생김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새로운 얼굴이었다. 보통 외곽 경계를 젊고 직급이 낮은 마법사들이 맡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어느 정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과거에 경계 임무를 맡았던 마법사들은 직급이 올라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난감한데…….’
경계병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이렇게 먼 곳까지, 그것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다짜고짜 공격을 해올 줄은 몰랐다.
그가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마법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열 명의 마법사는 거리를 띄운 채 원형으로 늘어섰다.
아이스 스피어와 파이어 볼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다행이라면 이들의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
로치온은 말 위에 앉은 채로 긴 창을 여러 번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얼음송곳이 쪼개지고 화염이 흩어졌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차츰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멈추시오!”
로치온은 비교적 여유 있게 대처를 하며 마법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젊은 마법사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상대의 실력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안 이상 그들에게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로치온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했다.
자신이 과거 이곳에 머물렀을 때만 해도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의 경계를 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공격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도 크게 어긋났다.
그는 마법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든 것을 보았다.
그것은 미지의 침입자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피곤함과 좌절감이 깃든 공포였다.
무턱대고 쏟아지는 마법을 방어하면서 로치온은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간밖에 없다고 느꼈다.
젊은 마법사들은 1서클이나 2서클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마법을 쏟아내다가는 금방 마나가 바닥나고 말 것이다.
본인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대책 없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나름대로 믿을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의 임무는 마을 외곽을 경계하는 것이고 시간을 끌면 곧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었다.
로치온은 그 지원병들이 빨리 왔으면 하고 바랐다.
열 명을 상대로 방어만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혹시라도 손을 잘못 놀린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마법사들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었다.
파라얀의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자신이 반갑지 않은 손님일 텐데 문제를 일으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때 서툰 마법사가 날린 불덩어리가 로치온이 아닌 그가 타고 있는 말머리를 후려치고 말았다.
로치온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날아오는 마법을 쳐 내느라 미처 그것까지 방어하지 못했다.
“히이잉!”
파이어 볼의 위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 즉사를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불덩어리를 얻어맞고 혼란을 느낀 말이 로치온을 태운 채로 정면으로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전면에는 마나가 떨어져 숨을 헐떡이는, 개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마법사가 서 있었다.
로치온은 이곳에 올 때 강하고 튼튼한 말을 골라 타고 왔다. 흥분한 말과 부딪치는 것만으로 어린 마법사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로치온은 말 위에서 뛰어올랐다.
달리는 말에서 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자연스러웠다. 창이 허공에서 호를 그리며 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쿠당탕-!
파이어 볼을 얻어맞고도 버틴 말이었지만 로치온의 창격에는 견디지 못하고 즉사했다.
말과 충돌할 뻔했던 어린 마법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대로 오줌을 지렸다.
로치온과 마법사들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제야 마법사들은 로치온이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로치온은 마법사들의 오해를 풀 타이밍은 지금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파라얀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 되나?
약속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그녀 핑계를 대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였다.
로치온이 난감함에 이맛살을 찌푸릴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치온?”
빨리 와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지원병들. 그들은 짙은 파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마법사의 영지답게 그들 역시 전원이 마법사였다.
로치온에게 말을 건넨 것은 가장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고 온 여자였다. 그녀는 입고 있는 로브가 헐렁할 정도로 체구가 작았다.
후드를 벗자 얌전하게 땋은 금발머리와 반짝반짝 총기가 도는 눈망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로치온은 저도 모르게 가슴 안에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파로나…….”
그녀는 바로 파라얀의 동생이었다. 지원병들 중에는 자신을 아는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맞았던 셈이다.
처음에 놀라는 듯했던 파로나의 얼굴이 몇 초 사이에 차갑게 식었다.
“여긴 왜 오셨나요?”
로치온은 그녀의 말이 송곳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과거에 자신은 아무 말 없이 이곳을 떠났었다. 연인이었던 파라얀을 남기고.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동생인 파로나가 좋게 기억할 리가 없다.
그녀 역시 자신을 친오빠처럼 믿고 따랐었다. 파라얀만큼은 아니더라도 배신감이 컸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간 돌아오려고 했어. 그땐 그렇게 떠나서 미안하다…….”
파로나는 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말할 필요 없어요. 떠날 때는 제멋대로 떠났어도 받아주는 건 우리 선택입니다. 돌아가세요. 저는 오늘 당신을 못 본 셈 치겠습니다.”
“안 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파로얀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다. 내 잘못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야.”
파로나는 로치온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내 한쪽에 죽어 나자빠진 말과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경계병들에게 향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멀리서도 똑똑히 보았다.
사실 로치온이 마음만 먹었다면 혼자서도 능히 경계병들 전원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정도 듣지 않고 무턱대고 먼저 공격한 것은 경계병들 쪽이기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무력을 썼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파라얀의 입장을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말이 제멋대로 움직여 사고가 일어나려 하자 그 말을 자기 손으로 죽여 버렸다.
사실 그녀로서는 내심 오랜만에 보는 로치온이 반가웠다. 형제라고는 언니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그를 가족처럼 생각했었다.
그가 떠나고 한동안은 어안이 벙벙했었다. 그 뒤로 또 한동안은 몹시 미워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도 희미해져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즈음에야 거짓말처럼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로치온의 얼굴을 보자 뜻밖에도 바로 어제까지 함께 지냈던 사람을 보는 것처럼 편한 기분을 느꼈다.
무뚝뚝해 보일 정도로 강직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감출 수 없는 선함이 드러났다.
이십 년 전 이곳을 떠난 것은 결코 악의가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가 종종 말했던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을 터.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는 일이었지만 로치온은 그 일을 자신의 목숨처럼 중히 여겼다.
“후…….”
파로나는 두통이 오는 것 같아 이마에 손을 댔다. 사실 지금은 이런 일로 헤매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를 상황. 그래서 경계병들도 무작정 로치온을 공격한 것이다.
“어차피 말로 해선 듣지 않겠죠.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덤빈다고 해도 당신을 이길 수는 없을 거고요. 좋아요. 같이 들어가죠. 하지만 다음 일은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로치온은 파로나의 냉정한 말에 새삼 심장이 뜨끔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오면서 수십 가지 가능성을 그려봤지만 역시 파라얀은 자기 때문에 큰 실망을 겪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용서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알았어.”
이런 전개를 웬만큼 예상했으면서도 굳이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파라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과 그녀가 누구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마법사라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서야, 그리고 파로나의 모습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2
파라얀의 영지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마치 유목민의 그것처럼 여러 개의 천막이 모여 하나의 부락을 이루고 있다.
사실 파라얀은 오래전 지위를 잃은 군주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가문을 위시한 최고 마법사들은 저마다 군주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각자 조금씩은 타락했다.
개중에 끝까지 오더 성향을 지킨 것은 파라얀의 가문밖에 없었다.
마법사 군주들은 협력하기보다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탕이 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일가를 이룰 정도로 대성한 마법사라면 각자 장기로 삼는 비전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었다.
군주들은 서로의 마법을 질투하고 욕심냈다.
각각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이유는 서로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누구 하나가 두 개의 최상급 마법을 갖게 된다면 금방 깨어질 균형이기도 했다.
한 명이 두 개를 갖는다면 곧 나머지 전부를 갖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마침내 왕위쟁탈전과는 무관하게 마법사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일대일의 싸움이었지만, 곧 그중 하나가 승리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마법사들이 가세를 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싸움은 결국 카오스 대 오더의 진영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일대다의 집중포화를 맞은 파라얀 가문은 싸움에 지게 되었고, 그 결과 가문의 비전이 소실되었다.
마법사 군주들은 파라얀 가문이 최상급 마법을 잃어버린 일에 안도감을 느꼈다. 더불어 마법사들 간의 싸움이 얼마나 무익하고 위험한 것인지도 깨달았다.
어차피 한 명만 남게 될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될 확률은 높지 않았다.
파라얀 가문은 군주 지위를 잃고 끝까지 자신들을 따르는 영지민들을 데리고 다른 대륙을 횡단했다.
결국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과거의 전쟁이 교훈이 되어 언제 다른 마법사들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쉽게 거두어서 이동할 수 있는 천막을 집으로 삼았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파로나가 마을 중앙의 가장 큰 천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