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독식왕 : 클리어러 160화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침묵이 찾아왔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침묵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질문 하나 없었던 유진이는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 군주의 대리인이 되었고,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까지 들었다. 나는 그녀가 느끼는 혼란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유진이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미안해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네 덕분에 내가 살아난 건데. 나는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다른 생각?”
유진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는 지난 십 년간 가상현실 게임 안에 갇혀 있었다는 거잖아. 거기서 많은 NPC들을 만나고, 또 그 여자들은 죄다 미인이었고…….”
유진이의 시선이 눈을 지그시 감고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아린에게 향했다. 그녀를 향해 있던 시선은 곧 웅크리고 졸고 있는 암젤에게 옮겨갔다.
내가 한 이야기 속에 암젤도 등장했다. 그녀가 묘족이고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유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벌이 인간이라면 모르겠는데 NPC들이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질투를 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져.”
나는 그녀의 솔직한 말에 조금 당황했다. 물론 유진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마인드 리더로 본 그녀의 마음도 이제는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게 직접 질투라는 말을 들으니 멋쩍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이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응.”
“이젠 진짜 그 마음을 접어야 할까 봐. 네 주위에 이렇게 많은 여자가 있는데 나도 그중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해하지 마. NPC들이랑 나는 주종 관계일 뿐이야. 그…… 가상현실 게임이 19금은 아니었고, 현실로 와서도…… 관계를 맺었다거나 한 건 아니니까.”
“어휴…….”
유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왠지 모르지만 네가 나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 것 같아. 더 이상 희망고문하지 않을래. 친구 조성오까지 잃고 싶진 않으니까.”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뒷목만 쓰다듬었다.
유진이의 말은 사실이다. 주위에 여자 NPC가 많다는 사실을 떠나 그녀를 이성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친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마음 이상의 애틋함은 없었다.
둘 다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 갑자기 자고 있던 암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부끄러운 이야기는 이제 다 끝났냐옹? 그래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이다옹. 사람은 자고로 주제 파악이 빨라야 한다옹.”
유진이는 말하는 고양이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5
“엄마가 걱정하실 테니까 빨리 집에 가야겠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는데, 아마 부재중 전화가 열통은 왔을 거야.”
“게이머 딸을 두고 별 걱정을 다 하시네.”
“부모님 마음은 다 같은 거 아니겠니? 게다가 오늘 정말로 죽을 뻔했잖아.”
“하긴.”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은 기분이지만 그걸 어떻게 꺼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유진이도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그렇지만 얼굴에는 웃는 표정을 띄운 채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타로는 던전 안에 남았고, 나머지 멤버는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티코이와 아린이 같은 차를 타고, 암젤은 내 차에 탑승했다.
돌아오는 길에 암젤이 기분 좋은 투로 갸르릉댔다.
“오늘 참 보람 있었다옹.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다옹.”
“유진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어?”
“주인님은 모른다옹. 내 경계 대상 1호는 아린도 칼리타도 아닌 저 여자였다옹. 그래도 다 끝난 게 아니니 앞으로도 지켜볼 생각이다옹.”
“……네 마음대로 해라.”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했다는 자각이 생겼다.
원래 퀘스트가 두 개뿐이라 크게 어려울 건 없는 페이즈였다. 단지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예상보다 길어진 감은 있었다.
레벨이 130에 마법사 클래스도 드디어 6서클에 달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동레벨이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이 훨씬 강한 느낌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어떻게 성장해야 빨리 강해질 수 있는지를 알고 있고 메인 퀘스트를 통해 이런저런 보상도 얻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아직 확인하지 않은 두 가지 보상이 떠올랐다. 더불어 마음을 채우고 있던 여러 가지 상념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어디 보자…….’
나는 침대에 앉아 퀘스트 달성과 동시에 인벤토리에 들어온 보상 두 개를 꺼냈다.
스킬 에그 하나와 랜덤 보상 상자 하나.
확인을 하기 전에 먼저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다.
스킬 ‘로또’를 사용하자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축하합니다! 로또 3등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첨자의 모든 스탯이 일 분간 40퍼센트 상향됩니다.]
“오!”
5등과 4등은 밥 먹듯이 나오는 등수지만 3등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기본 확률이 1/500.
물론 높은 행운 수치로 실제 확률은 많이 상향되어 있을 것이다.
1분이라면 비교적 넉넉한 시간이기 때문에 나는 서두르지 않고 스킬 에그부터 열어보았다.
퍼엉!
[축하합니다! 스킬 ‘공간 생성’을 얻었습니다.]
‘공간 생성’은 공교롭게도 내가 막 도달한 경지인 6서클 마법이었다. 하긴, 로또 3등에 당첨되었으니 이 정도는 나와줘야겠지만.
[공간 생성]
타입 : 액티브
등급 : S
레벨 : 100/100(Max)
효과 : 발동자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의 아공간을 생성한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공간의 범위가 커지고 유지 시간이 길어진다.
최대 범위 : 1㎦
최대 유지 시간 : ∞
심지어 등급도 S였다. 1세제곱 킬로미터라면 생성할 수 있는 아공간의 범위로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더구나 이는 최대 범위.
상황에 맞추어 적당한 크기의 아공간을 만들면 된다. 등급 S에 레벨이 만렙이니 유지 시간도 자유자재였다.
‘공간 생성’은 가상현실 게임 안에 있을 때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마법이다. 달아나는 적을 일정 범위 안에 가둘 때, 그리고 주위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할 때.
물론 나보다 마법 능력이 강한 적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지만, 그런 적을 상대로라면 뭘 해도 녹록치 않을 테니까 당연한 페널티라고 할 수 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음 보상을 확인했다.
아티팩트 전용의 랜덤 보상 상자.
꽃가루가 날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아티팩트 ‘매혹의 반지’를 얻었습니다.]
상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금색 반지가 남았다.
[매혹의 반지]
넘버 : 88
효과 : 역사상 최고의 바람둥이였던 미오소티스가 자신의 매력을 응축시켜 만든 반지. 그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죽어서 먼지가 되더라도 이 반지는 남아 수많은 남녀와 사랑을 할 것이다.”
일정 시간 동안 상대의 적대감, 저항감을 무시하고 매혹에 빠뜨린다. 관련 스킬이 있으면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사용법 : 손가락에 끼운다. 발동하지 않을 때는 투명한 상태로 유지되며, 몸에 지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효과가 증대된다.
나는 기대 이상의 보상에 실소를 흘렸다. 매혹의 반지는 어떤 의미에서 절대 반지라고도 할 만한 아티팩트였다.
전투력 상승은 기대할 수 없어도,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필요하다면 그것을 초월해서- 절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당장 그런 것은 아니고, 설명대로 충분한 시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내 레벨이 오를수록 반지의 효과가 증대되고, 관련 스킬을 함께 사용하면 그 적중률이 상승한다.
내게는 ‘유혹’ 스킬이 있으니 더욱 안성맞춤인 아티팩트라 할 수 있었다.
반지는 투박한 금색을 띠고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처럼 가는 분홍빛의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미오소티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자기가 죽은 뒤에도 반지가 남아 사랑을 할 거라고 하다니, 대단한 정력가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설명에는 한쪽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남녀’라고 되어 있다.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지.’
나는 매혹의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었다. 착용한 순간 투명하게 변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답답한 느낌도 전혀 없어 나 자신조차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고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남은 것은…….’
차원문을 열어 67위 군주와 싸우는 일이다. 그것은 일단 잠을 푹 자고 내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Chpater 43 - 새로운 동맹 6
1
로치온은 미리스를 72위 군주로 만든 뒤 옛 친구를 만나러 갔다. 솔직히 그녀를 아직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거리가 단축될수록 상념이 커져 갔다.
지금껏 한 시도 그녀를 마음에서 지워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리워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처음에는 애착이 너무 큰 나머지 그녀 옆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꿈꾸기엔 자신이 짊어진 숙명이 너무 컸다.
아버지의 행적이 과오로 남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강해져야 했고, 언젠가는 복수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200년간 성장에만 매달렸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쳤고 이상과 유리되어가는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일 뿐, 이미 왕위 쟁탈전 때 있었던 일은 대부분 이계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차라리 모든 이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편하겠지만 로치온은 이계의 왕 헤레디투스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행동에 나서는 순간 발각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먼저 마수가 뻗쳐올 것이다.
헤레디투스가 잠자코 있는 것은 아직 왕위 쟁탈전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자신에게 반발심을 품고 있는 군주가 적지 않으므로.
한번 왕위 쟁탈전이 치러지면 그 후폭풍이 몇백 년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아니, 다음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기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이곳의 세력 분포이다.
헤레디투스는 영리하게도 이계로 가는 통로를 열어 군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보면 이는 단순히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실제 이계와 이곳 세상이 이어지게 될 날은 멀지 않았으며, 그러면 수만 년의 역사에 일대 전기가 일어날 것이다.
로치온은 언덕 위에서 지친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지난 한 달간의 일이 떠올랐다.
‘평생 요원한 일일 줄 알았는데…….’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다. 비록 자기가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고 그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검은 망토 속에 숨은 애처로운 눈으로 넓게 깔린 천막들을 내려다보았다.
‘파라얀…….’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압도적으로 더 컸다.
화르륵-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강렬한 기운에 그는 망토를 거두고 몸을 돌렸다.
펑-!
파이어 볼이 창에 잘려 불꽃을 뿌리며 흩어졌다.
로치온은 어느 새 자신을 에워싼 십여 명의 마법사를 보고 자신이 어디에 들어온 것인지 새삼 실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