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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58화 (15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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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58화

    2

    호텔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제니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셰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범죄자를 모두 상대해 보았지만 셰릴의 거북함은 남달랐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꺼리지 않는 악인.

    물론 자신도 그런 범죄자들 중 하나이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차원이 달랐다. 셰릴을 상대할 때면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이 저절로 떠오른다.

    수년간 자신에게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시킨 사람.

    그의 얼굴을 마주할 필요가 없어진 현재는 자체로 행복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비록 지금도 의뢰비의 절반을 뜯기고 있지만 그에게 멀어질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니는 머리를 내저어 불쾌한 기억을 떨쳐 냈다.

    “셰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지?

    “호텔인데요. 왜 그러죠?”

    -그 여자는 어떻게 했어? 아직 살아 있는 거 맞지?

    “던전에 버려두고 왔어요. 살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고요. 처음부터 말씀드렸지 않나요? 던전에 감금하는 것은 가능해도 목숨까지는 담보할 수 없다고.”

    -무능하기는! 빨리 던전에 들어가서 여자를 꺼내 와! 아직 죽여선 안 돼!

    제니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숨을 길게 내쉬어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제가 할 일은 끝났습니다. 당신은 지금 계약 외의 내용을 요구하고 있어요.”

    -의뢰비의 두 배를 주겠다. 그러니까 당장 여자를 꺼내서 내게 데리고 와!

    “저는 내일 한국을 떠납니다. 다음 의뢰가 있어서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네 보스에게 직접 얘기해야 하나?

    보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니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방금 떨쳐 냈던 불쾌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스멀스멀 파고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 말대로 하죠. 여자를 꺼내서 당신에게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나요? 그러면 의뢰비의 두 배를 받는 거고?”

    -그래! 그만 지껄이고 얼른 움직여!

    제니는 일방적으로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의뢰인은 몇 되지 않는다. 보스의 존재를 알고 그에게 직접 의뢰를 넣을 수 있는 사람도.

    셰릴이 유달리 불쾌한 의뢰인이라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제니는 물기가 전부 닦이지 않은 알몸 위에 그대로 옷을 입었다. 셰릴에게 말했듯 유진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던전의 등급과 유진의 능력을 감안하면 죽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역할은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게 시체이든 뭐든.

    그 이상은 불평을 해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이래서 한국에 오기 싫었는데.”

    작게 투덜거린 제니는 호텔방을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엄습했다.

    만약 이곳이 호텔방이 아니었더라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을 것이다.

    쾅-!

    호텔방문이 안으로 부서지며 검은 그림자가 확 밀어닥쳤다.

    제니는 자기 어깨를 물어 바닥에 넘어뜨린 존재를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타, 타이거…….?”

    호텔에 호랑이가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나가려던 참이냐옹? 다행이다옹.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다옹.”

    이상한 말투로 얘기하는 여자를 보고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였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지?”

    “알 것 없다옹. 너는 건드려선 안 될 분을 건드렸다옹. 물론 김유진 그 여자 말고 다른 분을 말하는 거다옹.”

    “……?”

    더 이상은 물을 수 없었다. 커다란 그림자 몇 개가 더 나타나 자신을 덮쳤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의식이 먼저 멀어졌다.

    3

    나는 정신을 잃은 제니를 데리고 쌍둥이 던전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처리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간형인 암젤은 얼굴이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CCTV 교란 장치를 들려 혼자 호텔로 들여보냈다.

    유진이를 혼수상태에 빠뜨린 용병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 수 없고, 암젤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이라 걱정했는데 큰 소란 없이 제니를 빼오는 게 가능했다.

    소환수가 나타난 것도 호텔방 안이라 흔적이 남지 않았다.

    던전으로 돌아갔을 때, 아린은 여전히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고 타로는 난처한 얼굴로 공중을 빙글빙글 날고 있었다.

    “유진이는 어때?”

    “아직 죽지는 않았어.”

    타로의 말대로 호전되기는커녕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던전에서 나갈 때보다 유진이의 피부는 더욱 검어져있었다.

    얼굴은 땀투성이고 고통 때문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제니의 복부를 걷어찼다.

    “윽!”

    제니는 눈을 떴다. 영문을 몰라 하던 그녀의 얼굴이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암젤이 호랑이를 소환시켰다. 제니가 움직이기 전에 호랑이가 그녀의 등을 밟고 짓눌렀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패닉에 휩싸인 제니가 그렇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곧 자기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조성오.

    일반인들에게 인지도는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같은 게이머로서, 그것도 정보가 중요한 용병으로서 그의 존재를 모르긴 어려웠다.

    갖가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피스&호프와 조성오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군.”

    제니는 냉소를 흘렸다. 왜 피스&호프가 등급도 높지 않은 여자 게이머 하나 처리하는 데 자신을 고용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보다 배꼽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더구나 이번 의뢰는 보스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자신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을 뿐.

    ‘소문보다 더 거물인가 보네.’

    이 남자 때문에 셰릴이 안절부절못하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감상은 지금 상황에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다시 살폈다.

    ‘던전인가……?’

    나른하고 기분 좋은 음악은 금발 여자가 연주하는 것이었다. 공중에는 작은 요정이 날아다닌다. 아니, 생김새는 저래도 요정일 리가 없지. 아마도 몬스터일 것이다.

    그리고 호랑이를 소환해 자기를 공격한 여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제니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예쁘게 생긴 여자 대신 바닥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눈 깔라옹. 확 뽑아버리기 전에.”

    “……?”

    나는 제니에게 물었다.

    “유진이를 어떻게 한 거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녀가 가진 스킬 중에 ‘속성 흡수’, ‘속성 조작’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속성이란 원소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녀의 스킬은 그것을 빼앗아서 자기 것처럼 다룰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정령이 하는 일과 비슷했다.

    기본 스탯도 낮지 않지만 이 여자의 주된 능력은 바로 이 스킬에서 기인하는 것 같았다.

    레벨 100이 넘어도 이 스킬을 빼면 그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능력자라고 보는 게 맞았다. 암젤에게 쉽게 제압당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김유진……. 그 여자 아직 안 죽었나?”

    나는 인벤토리에서 히루도의 창을 꺼냈다. 시퍼런 날을 제니의 목에 갖다 댔다.

    “빨리 원상복구 시켜놔.”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해. 일단 내 몸에서 호랑이부터 치워.”

    나는 암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호랑이를 소환 해제했다.

    제니는 인상을 찌푸리고 피투성이인 몸을 일으켰다. 그녀 역시 레벨이 낮지 않은 게이머였으므로 신체에 입은 상처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도 평상복이었고 불식간에 공격을 당해서 짧은 시간에 말끔히 회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해.”

    제니는 유진이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갔다.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마나를 운용했다.

    곧 유진이의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부색이 천천히 제 빛깔로 돌아왔다.

    “그만두지 못해!”

    갑자기 타로가 날아오더니 제니의 가슴에 박치기를 했다. 작은 몸통으로 가한 충격이지만 제니가 비틀대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타로?”

    내가 묻자 그가 씩씩대며 말했다.

    “이 여자가 주인 친구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려고 했어. 피부색을 바꾼 건 눈속임에 불과해. 내 생각엔 이 여자에게 치유 능력은 없어.”

    그 말에 제니가 움찔 몸을 떨었다.

    “웃기지 마. 너…… 네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여자를 치료할 수 있어.”

    “나는 정령이다. 네 능력이 독특하기는 해도 내 눈에는 애들 장난하는 수작으로밖에 안 보여. 네가 할 줄 아는 것은 그냥 빼앗고 헝클어뜨리는 일이야.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나는 타로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제니를 붙잡아 온 것은 만에 하나를 위해서였다.

    나 역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제니가 유진이를 치유할 수 있을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로의 말은 그 의혹에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탈함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팔이 축 늘어지자 창을 잡은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제니가 재빨리 내 손에서 창을 빼앗았다. 그녀가 내 목에 창을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그녀가 암젤과 타로, 아린을 노려보았다. 그 말에 반응하는 파티원은 아무도 없었다. 약간 동정하는 눈빛을 보였을 뿐이다.

    “모르돈.”

    내 중얼거림에 제니가 휙 돌아보았다.

    “뭐라고?”

    입고 있던 옷이 마법사의 의상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심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파이어 볼트.”

    꽈릉!

    제니의 전면으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꺄악!”

    스킬을 얻어맞은 그녀가 창을 놓쳤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창을 집어 들고 또 하나의 스킬을 읊조렸다.

    “건샷 스피어”

    쾅-!

    탄환처럼 튀어나간 창끝이 제니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녀의 입가에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나, 나를 죽이면…… 보스가 너를…… 가만두지 않…….”

    나는 제니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 반대편 손바닥을 내밀었다.

    ‘파이어 인챈트.’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불꽃이 그녀의 몸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으악! 끄아악!”

    제니는 원소를 조작할 줄 알지만 그것은 남에게 빼앗았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불길이 몸을 태워도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생명이 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오스(Chaos) 성향을 가진 게이머가 죽었습니다.]

    [질서에 기여하여 오더(Order) 성향을 부여받았습니다.]

    [퀘스트 ‘레벨 100이 넘는 카오스 게이머를 한 명 이상 처치하라’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보상 상자(넘버링 아티팩트 전용)’를 얻었습니다.]

    퀘스트 달성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나는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내 눈은 고통스러워하는 유진이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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