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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55화 (15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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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55화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내는 구체들.

    주먹만 한 구슬 모양의 마나덩어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는 다시 한번 셰릴의 정보창을 유심히 보았다.

    이름 : 셰릴 무어

    레벨 : 105

    성향 : 오더(Order) D / 카오스(Chaos) A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95,384

    스탯 : 근력 36 / 체력 55 / 민첩 64 / 행운 112

    스킬 : 트레이싱 비드(S, Lv100), 크레이지 핸드(A, Lv50)

    이력 : 엘리트 대학생이자 모델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셰릴은 각성을 통해 그녀의 운 좋은 인생에 또 한 차례 행운을 맞게 된다. 노아와 같은 학교를 다니며 그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그녀는 니콜라스, 노아 형제가 길드를 만든다는 얘길 듣고 거기 동참하게 된다.

    피스&호프의 창립 멤버 중 니콜라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길드에 남아 있는 멤버이다. 뛰어난 외모만큼이나 머리와 수완이 좋아 니콜라스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노아가 떠난 현재 피스&호프의 실질적인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어렸을 때부터 완벽하다는 칭찬을 귀에 달고 자랐던 셰릴의 유일한 단점은 바로 악랄한 본성이다. 억제해 왔던 본능이 같은 본성을 지닌 니콜라스를 만나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피스&호프가 자행한 수많은 악행의 상당 부분은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니콜라스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있으며 그와 맺어지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고 있다.(퓨전형)

    약점 : 전투 능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기본적으로 전투형 능력자가 아니다.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 두려워할 상대는 전혀 아님.

    보상 : 트레이싱 비드(40~35%), 크레이지 핸드(60~55%), 민첩 6(70~60%), 행운 8(65~60%)

    셰릴의 이력을 보니 니콜라스, 노아 형제와 얼마만큼 인연이 깊은 사이인지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와 맺어지는 것이 소원이라니.

    전형적인 악인과 악녀의 결합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피스&호프 2인자의 레벨이 고작 105라는 것은 의외이지만 그녀가 전투형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납득할 수 있는 문제다.

    노아도 레벨 120으로 세계 최고의 브레인형 게이머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전투에서는 물론 레벨이 깡패이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다른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 스탯은 단 네 가지로밖에 표기가 안 되니까.

    이는 다른 게이머들의 능력을 표기하는 시스템도 내가 경험한 가상현실게임 시스템에 맞춰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융통성이 발휘된 반면 어떤 면에서는 고지식하게 시스템에 끼워 맞춘다.

    하지만 스탯의 종류가 복잡하게 표기된다고 해도 어차피 일반 게이머와 나는 성장 시스템 자체가 다르니 특별히 아쉽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피스&호프의 실질적인 2인자…….

    그런 여자를 한국 지부장으로 보냈다.

    나와 노아가 손을 잡은 문제가 그만큼 니콜라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뜻일 터.

    하지만 한편으로는 니콜라스라는 인물 자체가 다른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만약 니콜라스도 셰릴만큼 그녀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일로 한국까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 2인자지, 자신을 피스&호프의 유아독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쁠 건 없지.’

    거대한 길드를 이끌고 있으면서도 부하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인물은 조직의 메리트를 백퍼센트 끌어낼 수 없다. 나는 니콜라스, 그리고 피스&호프의 약점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본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정보창을 보니 셰릴이 사용한 스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크레이지 핸드’는 아닌 것 같으니 아마도 ‘트레이싱 비드’겠지.

    외래어로 표기되어 있어 영어가 짧은 나는 뜻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이런 이름의 스킬은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본 적이 없다.

    자그마치 S 등급에 레벨도 만렙인 스킬이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호기심도 무리가 아닌 상황.

    셰릴의 양 손바닥 사이에 나타난 마나 덩어리는 총 세 개였다.

    완벽한 구체를 이룬 구슬들이 신비로운 빛을 뿜으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셰릴이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정보창을 보았기 때문에 그 미소가 굉장히 사악해 보였다.

    “제가 왜 한국에 왔는지 성오 씨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인터뷰에서는 착한 말을 했지만 저희 길드는 한국 지부를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과 노아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한 얘기니 놀랍지 않았다.

    나는 대꾸 없이 셰릴이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저는 데이비드 정처럼 어리석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스펙대로라면 성오 씨가 한 일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죠. 그래서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성오 씨의 비밀이 무엇인지, 노아와 둘이서 작당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작당이라니 듣기 좋진 않군요. 그런 말은 당신들한테 더 어울립니다.”

    “호호.”

    셰릴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죠. 더불어 짙은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상식에 벗어난 일이라 직접 설명을 듣지 않고는 이게 뭔지 알 수 없었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피스&호프라면 OG 멤버 구성이나 우리가 아지트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아리라고 생각했지만, 셰릴의 반응을 보니 그 이상을 알아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정돈되지 않은 마나에 셰릴이 또 한 차례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양 손바닥에 마나를 흘려 넣자 구슬이 회전을 멈추었다. 검은색이던 구체가 은색으로 바뀌고, 이어서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구슬은 각각 다른 화면을 내비쳤다. 하지만 각도만 다를 뿐, 내용은 같았다.

    영상은 토누크족이 있는 C급 던전에 들어간 나와 멤버들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트레이싱 비드’가 어떤 스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추적’처럼 다른 이의 뒤를 쫓을 수 있는 기술이다.

    다만 ‘추적’이 나름대로 한계를 지니고 있는 반면 이 기술의 위력은 더욱 강력한 것 같았다. 던전 안까지 쫓아 들어왔고, 마치 고성능 카메라처럼 깨끗한 화면을 비춘다. 영상을 오랫동안 보존해서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더구나 나를 포함해 멤버 전원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암젤도 가끔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뿐, 구슬을 발견하지 못했다.

    구슬이 비추는 영상은 편집된 것이었다. 던전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곧바로 최상층으로 넘어갔다.

    토누크들이 내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하이라이트는 바위틈에서 차원의 통로를 열었을 때였다. 구슬은 통로로 들어가는 우리를 쫓아왔다. 나는 설마 이 스킬이 이계까지 통용되나 싶어 숨을 삼켰지만, 영상의 내용은 금방 끊어졌다.

    십여 분간 스킬을 사용한 셰릴의 이마에 살짝 땀이 돋아났다. 그녀는 구슬을 사라지게 만든 후 한쪽에 서 있는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가 온더락 위스키 두 잔을 가지고 왔다.

    나는 셰릴이 이 영상을 보여준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해도 잘 안 되었겠지.

    내게 묻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유진이를 인질로 잡은 것이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셰릴이 잔을 내려놨다.

    “여기 들어간 뒤로 당신들은 열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죠.”

    “정확히 알고 싶은 게 뭐지?”

    “정확히랄 게 있나요? 모두 말하세요. 바위틈에 있는 이 구멍이 뭔지, 당신들이 어디를 다녀온 건지.”

    “음…….”

    나는 팔짱을 끼었다. 본능적으로 셰릴의 요구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진이가 인질이 된 상황이지만 여기서는 여유를 보여야 한다. 마음은 걱정으로 들끓어도 거래를 할 때 약점을 드러내면 불리하니까.

    셰릴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당신 친구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그녀가 죽게 될 거예요.”

    “허풍 떨지 마.”

    “……?”

    “네가 알고자 하는 건 아주 중요한 정보야. 어쩌면 세상의 상식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지. 피스&호프는 업계 1위가 되려고 혈안이야. 니콜라스의 지상 과제는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고, 네 목표는 그의 옆에서 왕비 역할을 하는 거지. 나한테 그렇게 고자세로 나올 입장이 아닐 텐데?”

    지금까지 여유를 보이던 셰릴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추측하지 말아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니콜라스가 피스&호프를 키우려고 하는 건 기정사실이야. 아~ 네 인생 목표가 니콜라스의 신부가 되는 일이라는 거? 그건 더더욱 사실이지. 처음엔 노아한테 추파를 던졌다가 잘 안되니까 니콜라스를 꼬시려고 하는 거잖아. 하하!”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웃었다.

    화가 난 셰릴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자, 등에서 쫙 하고 마나가 뽑혀 나왔다.

    기다란 팔이 총알처럼 뻗어가더니, 얌전히 서 있던 부하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그는 금세 검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바닥에 닿은 고개가 꺾이며 셰릴을 향한 원망 어린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숨이 끊어졌다.

    사람 하나를 죽이고 나서야 셰릴이 호흡을 가라앉혔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짜 개년이네.’

    하지만 카오스 게이머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동요할 필요는 없다.

    “네가 이 정보를 얻는다면 피스&호프가 명실공히 업계 1위가 될 수 있어. 그러면 당연히 너도 니콜라스의 신부가 될 확률이 높아지겠지. 그런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데 고작 수준 낮은 인질극이나 벌이는 거야?”

    셰릴은 잔을 들어 위스키를 꿀꺽꿀꺽 마셨다. 당연히 목이 말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함이었다. 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탁 소리가 나게 빈 잔을 내려놓고 다시 손짓을 했다. 하지만 곧 시중을 들던 부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손을 내렸다.

    “오해는 그렇다 치고……. 정보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신 말대로 내가 수준 낮은 일을 벌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때로는 방법이 저질스러울수록 효과가 더 큰 법입니다.

    아무리 나를 도발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아요. 아까 제가 했던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당신 친구가 던전에서 고통스럽게 죽게 되요.

    바보가 아니니 장기적으로 피스&호프에 대항해서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시겠죠? 친구도 살리고 불미스러운 대립 관계도 지우고 싶다면 아까 보여준 영상이 뭘 말하는지 빨리 털어놓으세요.”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를 각성시킨 이가 맡긴 대의를 생각하면 차원의 통로가 무엇인지 말을 하지 않는 게 옳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진이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가 지난 십 년 동안 보여준 성의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일단은 유진이를 구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주인! 주인! 내 목소리 들려?

    ‘응?’

    세릴을 얼굴을 보니 그녀에게는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답답해! 들리면 대답 좀 해. 나야!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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