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독식왕 : 클리어러 154화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피스&호프 한국지부장 셰릴이라고 합니다.”
“아…….”
소개를 듣는 순간 TV 인터뷰에서 보았던 셰릴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피스&호프는 여전히 자기 홍보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지부장이 왜 바뀌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전 지부장이 살해당했고, 그를 죽인 이가 다름 아닌 OG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증거를 남기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피스&호프 자체가 켕기는 구석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이를 공론화할 수 없었다.
내가 이미 노아와 연결된 것이 부담이기도 할 테고, 무엇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셰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쿡 쑤시는 것 같았다.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기에 내 주적 중 하나가 이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노아가 떠났어도 카오스게이머 닷컴은 여전히 운영 중이었다. 관계를 끊은 뒤로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티코이에게 전보다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피스&호프의 성장은 진행형이었다. 노아가 빠진 뒤로 니콜라스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오히려 전보다 안정적인 길드가 된 모양새다.
니콜라스가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피스&호프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이머는 자체로 대단한 권력을 확보한 직업군이다. 관련법도 확실히 자리를 잡지 않았고 은밀하고 의도적으로 그들을 위한 차별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일반인들은 거기 관심이 없고, 혹 알고는 있더라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일차적인 위협은 던전과 그 안에 출몰하는 몬스터였으며, 그들을 죽이는 게 본업인 게이머는 자체로 정당성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는 이미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굳이 일개 국회의원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한발 물러서서 필요한 만큼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나는 왜 셰릴이 연락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 들 수 있겠지만 어떤 것도 갑작스러운 연락에 대한 적절한 답은 되지 못했다.
내가 침묵하고 있자 셰릴이 말을 이었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저는 피스&호프와 귀하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모른 척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성오 씨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오늘 연락을 드린 이유는 그 일과는 무관합니다.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면 지금 만나지 않으시겠어요?”
정중하게 포장한 물음이지만 말투에서 압박이 느껴졌다.
나는 살짝 코웃음을 치면서 되물었다.
“왜 내가 당신을 만나야 되죠?”
“혹시 오늘 친구에게 연락을 한 적 있습니까?”
“친구?”
셰릴이 말한 친구가 누구인지 한 번에 떠올릴 수 없었다. 파티원들과 노아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적절한 대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셰릴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 변고가 생겼다면 셰릴을 통하지 않고도 먼저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미르 길드에 있는 친구 말입니다. 그 길드를 현재 저희가 지원하고 있죠. 오늘 던전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김유진. 그녀를 잊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에 갇히기 전부터 지금까지 연락하는 유일한 친구.
피스&호프가 설마 그녀를 건드리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던전을 들먹이는 것을 보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유진이를 어떻게 했지?”
“더 이상은 전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문자를 보내드리지요. 30분 뒤에 그곳에서 봅시다. 물론 혼자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비즈니스를 할 거니까 편한 차림으로 오세요.”
내가 더 말하기 전에 전화가 끊겨 버렸다. 곧이어 문자가 도착했다.
간단히 주소만 적혀 있었는데 그것만 보아서는 어떤 곳인지 알기 어려웠다.
나는 앞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왜 유진이를 신경 쓰지 않았을까.
가족이나 파티원들의 안전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녀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고려치 않았다.
실수가 뼈아픈 만큼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었다.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애써보았다. 셰릴에게 유진이는 인질이다. 그녀를 빌미로 비즈니스를 하자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다.
그것이 내 목숨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셰릴이 내 죽음을 바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테니까.
‘비즈니스라…….’
피스&호프가 사업적으로 바랄 수 있는 것은 많이 있다. 이미 그들도 노아의 인터뷰를 보았을 것이고, 다른 루트로도 내 특별함을 전보다 확실히 인지했을 것이다.
대립보다는 나를 통해 뭔가 얻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그런 이유라면 유진이에게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했을 터.
나는 내 생각이 맞기를 바라며 몸을 일으켰다.
암젤은 티코이네 집에 가 있었다. 그녀에게 핑계를 댈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 어설프게 둘러대면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테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노아와 티코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피스&호프 지부장인 셰릴을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하고 한 시간 뒤에 또 연락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티코이에게는 다른 파티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이야기해 두었다.
곧장 답장이 왔다.
노아 – 몸조심하십시오. 핸드폰은 끄지 마시고, 한 시간 뒤에 꼭 연락주세요.
티코이 – 알겠습니다, 주인님. 핸드폰은 끄지 마세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둘 다 판에 박은 듯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을 끄지 말라는 걸 보니 이것으로 위치 추적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 적 소굴에 들어갈 때 핸드폰부터 빼앗던데.
하지만 일단 셰릴을 만날 장소까지는 핸드폰이 켜진 상태일 테니까, 더구나 셰릴은 직책상 숨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 몰라 유진이에게 전화를 해보았더니 받지 않았다. 미르 길드를 언급한 사실을 떠올리고 그곳에 연락해 볼까 생각했지만 의미가 없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피스&호프가 유진이를 노릴 가능성을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녀와의 관계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이다.
피스&호프 입장에서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길드가 길드에 접촉하는 것, 더구나 대형 길드가 작은 길드에 손을 내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에.
미르 길드 입장에서는 피스&호프의 접촉이 반가웠을 것이다.
그 이유가 유진이에게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겠지.
나는 내 실수에 대해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반성은 유진이를 구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젠장…….”
부가티가 엔진음을 울리며 저녁 도로를 질주했다.
4
도착한 장소는 평범한 빌딩이었다. 연식이 최소 십오 년은 넘은 것 같은, 허름한 건물이다.
빌딩 앞에 차를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날카로운 인상에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제법 아우라가 있었지만 실제 레벨은 높지 않았다.
그는 내게 창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자동차는 지하에 주차하시면 됩니다. 핸드폰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역시 핸드폰부터 빼앗는군.’
나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자동차를 운전해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도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하나 있었다. 레벨은 바깥에 있는 자보다 10이 더 높은 48이었다.
게이머로선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썩 출중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피스&호프에서 똘마니 따위를 하고 있겠지.
나는 운전석에서 내리며 살짝 마나를 분출했다. 양복을 입은 남자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 신경을 쓰진 않는 눈치였다.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지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빌딩 최상층인 7층으로 갔다.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내부는 매우 깔끔했다.
오히려 외부의 허름함이 빈티지한 멋으로 느껴질 정도로 잘 꾸며졌다.
와인색의 카펫이 깔린 7층은 레스토랑과 바를 겸하는 곳이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비밀이 많은 이들이 만나 비즈니스를 논하는 곳.
피스&호프가 운영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직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내를 받아 창가 쪽 테이블로 갔다. 그곳에는 금발 여성이 앉아있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실제로 보니 미모가 더 대단했다. 더불어 전임 지부장이었던 데이비드 정에게 느낄 수 없었던 높은 격이 느껴졌다.
나와 노아가 아니었다면 그녀 정도 되는 인물이 한국 지부장으로 올 일은 없었을 테지.
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과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세릴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품평을 하는 것 같은 태도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남을 하대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녀의 외모나 지위에 관심이 없는 나는 그런 태도가 우스웠다. 게이머와 게이머가 마주했을 때 중요한 것은 레벨이다.
그녀의 레벨은 105.
나보다 한참 아래다.
더구나 오만하게도 부하를 몇 명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다. 물론 아래층에 더 많은 인원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만남의 목적이 싸움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진이를 어떻게 했지?”
내 물음에 셰릴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서두르지 말아요. 당신 정도면 예상할 수 있지 않나요?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
그녀의 말 중에 ‘아직’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비즈니스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호호.”
셰릴이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코리우스의 검으로 그녀의 목을 꿰뚫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안 될 것도 없는 일이다. 셰릴을 죽이고도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감당해야 될 일을 생각하면 당장은 참는 게 맞겠지.
“역시 보기와 달리 성오 씨 안에는 구렁이가 몇 마리는 들어 있는 것 같군요. 한국식 표현으로 구렁이 맞죠? 뱀이 교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서양이든 동양이든 똑같네요. 종교의 영향이려나?”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지. 나는 당신이랑 사교를 할 생각이 없어. 젊은 남자랑 놀고 싶으면 다른 데나 가 봐.”
셰릴은 여유 있는 표정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내가 사교를 하려면 해결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피차 바쁜 사람끼리 관심 가질 선택지는 아니군요.”
그녀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희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보랏빛 마나가 요동쳤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물론 셰릴이 마나를 운용하는 이유는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마주 본 손바닥 안에 떠오르는 검은색 구체를 보며, 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