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독식왕 : 클리어러 153화
2
오늘도 던전에 들어온 게이머들과 격전을 치러낸 타로는 게이머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던전을 나가자 혀를 차며 투덜댔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기고만장해하고 말이야.”
주인을 만나기 전에는 솔직히 봐줬다기보다는 게이머들에게 실제 밀릴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순히 능력이 강해진 수준을 넘어 몸 안에 알 수 없는 힘이 넘실댔다.
더구나 이곳은 자신의 능력이 120퍼센트 발휘되는 최상의 장소 아닌가?
수보타라는 쥐를 닮은 녀석이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해진 것이 계약이라는 행위 자체에 실린 효과라고 오해할 뻔했다.
수보타는 강해진 이유가 바로 ‘조성오’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후후후.”
타로는 이틀 전 계약을 했던 일이 생각나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내가 계약을 맺다니!’
정령보다 하급한 존재인 인간과 계약했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해도 어차피 계약 상대는 정형화된 것이 아니다.
모든 정령은 고고한 일면이 있지만 계약이라는 고귀한 행위 앞에서 그런 감정은 무색해진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일대일의 관계이다. 계약을 맺는 순간 다른 어떤 가치보다 계약자와의 관계가 우선시된다.
두 사람이 만족한다면 상대가 인간이 됐든 몬스터가 됐든 중요치 않았다.
타로는 문득 자신이 정령의 땅에 있을 때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 불쾌함이 솟구쳤다.
임퓨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경시하며 바라보던 눈빛들.
쫓겨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그곳을 나와야 했을 만큼 냉대를 받았다.
하긴 다른 임퓨어들은 잡아먹히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하니까,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다.
“흥! 언젠가 그 잘난 척하는 낯짝을 다시 보러 가주마!”
짐작건대 자신보다 잘난 계약자를 만난 정령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조성오를 자랑하고 싶었다.
게이머들과 놀아준 피로감이 주인을 떠올린 순간 흐뭇해진다.
‘불러주지 않으려나?’
얼른 주인을 만나 그 예쁜 볼을 실컷 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애정표현을 주인은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구름 위에 누우려는 순간, 문득 날카로운 감각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응?”
그는 휙 날아올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감각으로 판단건대 최상층에서 일어난 변고는 아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지? 19, 18, 17…….’
코어를 들여다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문제지만 그는 자신의 신체 일부분처럼 익숙해진 던전 안의 공기를 직접 가늠해 보았다.
계약을 맺고 주인에게 던전 마스터 지위를 위임받은 뒤로는 던전의 장악력이 한층 강해졌다.
“12층?”
그곳에서 드로스트 몇 마리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게이머 한 명…….
게이머에게 몬스터가 죽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뭔가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타로는 자신의 느낌을 좇아 귀환서를 이용해 12층으로 갔다.
12층에는 던전을 공략 중인 한 무리의 게이머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변고는 그들과는 관련이 없다.
타로는 지상에서 싸우는 게이머들을 내버려 둔 채 구름 위로 날아갔다.
십 분쯤 날아갔을 때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드로스트 세 마리가 게이머 한 명을 포획하고 있었던 것.
구름 위에서 각자 양팔과 허리를 붙든 상태였다.
게이머를 붙잡고 있는 드로스트들은 얼핏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비쩍 마른 몰골을 하고 손을 대면 부러질 것 같은 날개를 힘없이 펄럭였다.
타로가 다가가자 드로스트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퀭한 눈동자가 마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무슨 일이야?”
타로는 이제껏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능력을 보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이계에서 보았던 것들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하지만 게이머의 일차 목적은 어디까지나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고 사체가 사라진 자리에 나오는 결정석을 챙긴다.
게이머끼리 싸움을 하는 것도 본 적 있지만 그것은 가끔씩 일어나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타로는 게이머를 안고 있는 드로스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윽!”
드로스트 안을 가득 채운 불온한 마나가 옮겨오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나 자체는 본래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속성이었지만, 아주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정상이라면 드로스트가 속성 마나를 다루어야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드로스트가 마나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오염된 마나가 몬스터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타로는 드로스트가 자신을 바라보던 간절한 눈빛이 무엇 때문인지 이해했다.
표정을 굳히고 드로스트의 몸에 양손을 올렸다.
오염된 마나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힘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검게 물든 드로스트의 피부가 천천히 제 빛깔을 찾았다.
“우어어…….”
황홀한 눈빛으로 마스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타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로스트는 몸이 축 늘어져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한 마리 드로스트가 구원을 받자 게이머의 양팔을 잡은 몬스터들의 눈빛도 간절해졌다.
타로는 몬스터들에게 딱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을 이렇게 괴롭게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향한 도발로 여겨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나머지 두 마리 드로스트도 오염된 마나에서 해방되어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들이 팔을 놓고 추락하자 게이머의 몸도 축 늘어져 함께 떨어지려고 했다. 타로는 얼른 인간형으로 변신해 그녀를 낚아 올렸다.
남성형으로 변신한 타로의 등에 커다란 날개가 불쑥 솟아나왔다.
타로는 정신을 잃은 여자 게이머를 바라보았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살아 있는 상태라고 보기 어려웠다.
드로스트조차 집어삼켜 버린 악랄한 마나에 노출되었다. 같은 속성을 다룰 줄 아는 몬스터도 생명을 잃을 정도인데, 일개 게이머가 버티기는 어려웠을 터.
“응?”
타로는 뜻밖에 생명력이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아주 약하기는 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서둘러 드로스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여자의 입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새까만 독무가 빠져나왔다.
까맣게 핏발이 섰던 피부도 차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쩌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상대는 이미 던전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차라리 죽일 것이지, 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했담?’
아마도 그녀를 던전 안에 가두어 놓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드로스트들이 잡아두게 만든 다음 나중에 그녀를 다시 찾을 생각이었겠지.
그럴듯하긴 하지만 마냥 납득하기에는 방법이 너무 악랄했다.
아직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자는 이미 혼이 빠져나간 뒤이다. 아마 이 상태로 하루만 더 있었다면 백 퍼센트 생명력이 다했을 것이다.
다시 살려내더라도 이전과 같은 모습은 아니겠지.
‘역시 인간 놈들도 보통이 아니야.’
타로는 솔직히 이 일이 남 일처럼 여겨졌다. 정령과 몬스터들 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적자생존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감각을 좇아 이곳에 왔다. 왜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인지, 왜 지금도 그녀를 놓아버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왠지 그랬다간 크게 혼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누구한테?”
타로는 자신이 떠올린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자신을 혼낼 사람이 딱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헤헤헤.”
조성오를 떠올리자 또 바보 같은 웃음이 먼저 흘러나온다. 여자를 안은 상태에서 구름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충격 때문인지 여자에게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서……성오…….”
타로는 익숙한 이름을 듣고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분명 자신도 주인을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성오라는 이름을 말한 것은 분명 이 여자였다.
“야! 정신 차려! 너 주인을 알고 있는 거야?”
잠깐 의식을 되찾는가 싶었던 여자의 고개가 다시 축 늘어졌다.
“음…….”
생명이 꺼져 가는 상황에서 주인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 여자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타로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불온한 생각을 붕붕 고개를 내저어 떨쳐냈다.
“그래서 그랬군.”
이 여자의 위협이 자신의 위협처럼 느껴진 이유, 그녀를 구하지 않으면 자신이 주인에게 혼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주인에게 알리자!’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찼지만 그 전에 이 여자부터 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이 여자를 보러 왔는데 시체가 되어 있다면 실망할 테니까.
타로의 마음이 바빠졌다.
3
나는 쌍둥이 던전을 공략한 뒤 멤버들과 기분 좋게 뒤풀이를 즐겼지만, 곧 원론적인 고민에 빠졌다.
영토 퀘스트를 달성하긴 했어도 나머지 두 개의 퀘스트를-특수 퀘스트를 제외한다 해도 하나의 퀘스트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한호 형한테 얘기해 볼까?’
그는 잠재적인 범죄자를 많이 알고 있다.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그들을 티 안 나게 제거할 방법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막상 연락하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한호가 지금처럼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던전사고처리반 공무원이라는 직책을 이용한 것이다.
오성 길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눈에 띄게 행동했다가는 직위에 해가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너무나 많다. 혼자서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적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십년간 가상현실 게임에서 살아남은 경험이 없었다면 당장 손을 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내일 연락해 보자.’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게임이나 하면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트북을 켜려고 할 때 갑자기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실제 저장된 번호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자주 울리기는 하지만, 이름이 뜨지 않으면 곧장 차단 목록에 보내 버렸다.
그런데 지금 울리는 전화는 왠지 신경이 쓰였다.
받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을 감당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원체 가진 스킬이 많으니 이 생각을 기우라고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지금까지 본능을 따랐다가 위험을 회피한 경우는 숱하게 많다. 마찬가지로 무시했다가 큰코다친 적도 많았지.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수신 모드로 바꾼 뒤 전화기를 귀에 댔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조성오 씨?”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직접 얘기한 적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TV에서 들었나?
동시에 불쾌한 감각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던전에서 적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감각.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누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