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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52화 (15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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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52화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제니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중간 수준의 방어구였는데, 그녀의 등급을 감안하면 떨어지는 감이 있는 옷이었다. 게다가 유형을 가리지 않는 범용 방어구라서 효율은 더 떨어진다.

    방어복을 벗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깨끗한 나신이 드러났다.

    게이머용 속옷이 있지만 게이머에 따라 그것을 입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여성 게이머는 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속옷을 꼭 입었다.

    제니의 몸매는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흠잡을 데 없는 균형미에 동양인으로서는 드문 볼륨감도 가졌다.

    다만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제법 깊은 것도 있어서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상처만 없다면 훨씬 아름다울 수 있는 몸이니까.

    유진은 그녀의 과거가 더 궁금해졌다. 게이머는 자체 회복력이 있어서 웬만한 상처는 치유할 수 있다. 적절한 치료만 받는다면 각성하기 전에 생겼던 상처도 말끔히 없앨 수 있었다.

    제니의 몸에 난 상처는 그만큼 가혹한 환경에서 생긴 것이라는 뜻이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 상처를 없애지 않는 이유가 있거나.

    제니는 이번에도 속옷 따윈 입지 않고 바로 방어구를 착용했다. 전에 입고 있던 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방어구였다.

    가슴과 목옆에 부착된 마나 증폭기로 보아 그녀의 유형이 매지션이거나 그와 비슷한 타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진은 자기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맞다면 단순한 매지션이 아니라 신체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녀가 가끔씩 보이던 움직임이나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몸매가 그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자신처럼 멀티 능력자일지도.

    방어구 착용을 마친 제니가 말했다.

    “올라가죠.”

    이제까지와는 확실히 달라진 표정이었다. 기대감이 엿보이고 약간은 들떠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을 보고 유진은 그녀와 자신이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 던전은 던전 자체의 모양답게 공중에서 등장하는 몬스터가 많은 던전이다. 개중에서도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 드로스트라는 날개 달린 몬스터였다.

    던전 마스터도 이 몬스터의 진화형일 만큼 하늘 던전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종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드로스트는 날개를 퍼덕이며 나타나 손에 들고 있는 무기로 공격해 온다.

    대개는 검이나 창을 들고 있고 가끔씩 마법을 쓰는 놈도 있었다.

    마법을 쓰는 드로스트는 손에 구슬을 들고 벼락을 떨어뜨렸다.

    드로스트킹과 일반종이 쓰는 구슬의 다른 점은 던전 마스터를 죽인 후엔 그가 사용하는 구슬을 회수할 수 있지만 일반종의 구슬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몬스터가 구사하는 벼락 공격의 능력 차가 크다는 것을 감안하면 구슬의 가치 또한 차이가 클 것이며, 애초에 게이머들은 결정석보다 가치가 낮은 속성 구슬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유진은 제니가 구사하는 기술을 보고 무척 놀랐다.

    게이머의 유형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편의상, 그리고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하고 있는 능력 위주로 구분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보다 훨씬 많은 타입으로 나누는 게 가능하다.

    유니크한 능력을 가진 게이머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반 게이머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대단찮은 수준이거나, 아니면 일반 게이머를 압도할 만큼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거나.

    후자의 경우 종종 등급을 뛰어넘는 존재감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들 능력자는 대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큰 길드에 스카우트되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유진은 제니가 몬스터들에게서 마나를 뽑아내는 장면을 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드로스트의 가슴에서 독무처럼 검은 마나가 뽑혀 나왔다.

    그것은 제니의 손 안에 남김없이 흡수되곤 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지고 등 뒤로 강력한 아우라가 어렸다.

    마나를 빼앗긴 드로스트들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병든 새처럼 깃털이 떨어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쩍쩍 갈라졌다.

    그럼에도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서 무기를 들고 공격해 왔다.

    마나를 잃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은 유진의 몫이었다. 그녀는 제니에게 마나를 뽑힌 몬스터들이 전보다 훨씬 힘이 약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등급이 하나나 두 개는 더 떨어진 듯하고, 덩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부딪칠 때마다 몸이 휘청댔다.

    “적이 약해졌다고 해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래야 유진 씨의 능력도 조금씩 한계를 늘릴 수 있습니다.”

    유진은 제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언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등 뒤에서 강력한 몬스터가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제니의 위압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 갔다.

    그것이 몬스터에게 흡수한 마나의 양과 비례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뭐지?’

    유진은 정신없이 몬스터와 싸우면서도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제니는 몬스터들의 마나를 뽑아내기만 할 뿐 실질적인 싸움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혼자서 C급 던전을 공략하는 거라서 당연히 몸이 바빴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몬스터들이 이제까지보다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몬스터들이 쉽게 쓰러져서 더 신바람이 났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때문에 능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제니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중하세요. 잡념을 버리셔야 합니다.”

    문득 제니가 몬스터들에게 그런 것처럼 자신의 마나도 강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약 상대 게이머의 마나를 흡수하여 자기 힘을 키울 수 있다면, 그 능력은 말 그대로 사기나 다름없다.

    그런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게이머가 피스&호프에 속해 고작 파견 업무 따위를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 기술에는 특유의 시스템과 한계가 있을 것이다.

    흡수하는 것이 마나가 아니라 다른 에너지일지도.

    흡수하는 양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에너지를 몸 안에 영구히 담아둘 수 있는 것도 아닐 터.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중에도 불안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왜 분출하지 않지?’

    제니는 마나를 흡수하기만 할 뿐 그것으로 다른 기술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감이 점점 불어나는 것을 보면 흡수하는 것 자체가 끝이 아닐 것이다.

    몬스터를 탈력시키는 것만으로 대단한 기술일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곳에 흘리지 않고 자기 안에 담는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상황이 처음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미 제니에게 뭔가 배우려는 기대는 사라지고 난 후다.

    다만 그녀와 단둘만 남겨진 지금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눈앞에 있던 드로스트의 목을 갈라 버린 뒤, 참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제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던 그녀는 제니의 모습을 보고 몸이 굳었다.

    제니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가 되어 있었다.

    두 발은 땅에서 둥실 떠올라 있고 등에는 검은 날개가 펄럭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날개는 아니고, 드로스트에게 흡수한 것과 같은 검은 에너지로 이루어진 연기였다.

    검은 마나는 등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휘감았다.

    눈동자도 본래의 색을 잃고 검게 물들었다.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러죠?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요?”

    벌쭉 웃으며 묻는 표정에는 이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진은 몬스터를 마주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형태의 공포가 스멀스멀 마음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제니는 그런 유진이 귀엽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대하는 것과 같은 눈빛이다.

    “겁먹지 말아요. 죽이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 힘은 나도 컨트롤하기 어려워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지요. 당신 친구가 정당한 몸값을, 제때 지불하기만 하면 아마 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제니가 손을 뻗었다. 마치 그녀의 팔 자체가 길어진 것처럼 손 밖으로 검은 마나가 확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 모양을 한 연기가 곧장 유진의 목을 노리고 다가왔다.

    유진은 그것을 무기로 튕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숙여 바닥을 굴렀다. 대신 곡도를 집어 던졌다.

    파악!

    형체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제니가 미끄러지듯 곡도를 피해냈다. 다만 그녀의 팔을 스치면서 방어구가 약간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제법이군요. 역시 제가 눈여겨본 게이머답습니다. 당신을 칭찬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에겐 대단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가다듬느냐에 따라 미르같이 조그만 길드의 부길드장이 되기에는 아까울 만큼 성장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사를 수십 번은 오가고, 죽는 게 낫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게 되는, 그런 노력이 아니라면 잠재력이 빛을 보는 일이 없겠지요.

    다시 말해 당신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미 이곳에 태어난 것만으로 행운을 거머쥔 거니까. 그리고 그 행운이 오늘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유진은 제니가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왜 그녀가 자신을 공격하는 건지, 몸값을 지불한다는 친구가 누구인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필사적으로 그녀에게서 달아나는 데 집중했다.

    왔던 길로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다시 한번 몸을 돌려 곡도를 던졌다.

    제니의 몸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이차원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녀 또한 소유하고 있는 귀환석이 있었다.

    던전 안에서는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비상용으로 일 년 전에 구입했고, 지난 일 년간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야!’

    주머니를 필사적으로 뒤지다 보니 딱딱한 아이템 하나가 손에 잡혔다.

    일반적인 결정석과는 크기나 감촉이 다른 물건.

    귀환석을 꺼내는 찰나에 제니가 마나를 날렸다.

    팍!

    손을 떠나 바닥을 구르는 귀환석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 신경 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제니가 사신처럼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제니가 뻗은 마나가 뒷목을 거머쥐었다. 잡힌 자리에 은근한 압력이 밀려든다.

    악성 바이러스처럼 검은 마나가 몸속을 침투했다. 빠르게 퍼져 나가 온몸을 굳게 만드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유진은 팔다리가 늘어지고 의식이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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