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51화 (151/245)

# 151

독식왕 : 클리어러 151화

11층 공략이 모두 끝났을 때 유진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일종의 감격과도 비슷한 기분이라,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머릿속이 밝게 깨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돌아보았더니 아주 어려운 게임을 밤을 새워 공략하고 초췌한 눈으로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봤던 일이 생각났다.

‘결국 또 게임이라니…….’

유진은 우스운 생각이 들어 픽 웃었다. 하지만 이것이 특별한 것을 시사를 한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게임에 흠뻑 빠져 지냈던 시절에는 그것이 모든 일상의 중심에 있었다.

성적이 그런 대로 나오고 부모님도 개방적인 분들이라 크게 간섭받지 않고 게임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물론 게임에 빠진 이유의 절반 이상은 성오 때문이었지만, 나중엔 정말로 푹 빠져들어 재미와 감동을 느꼈다.

요즘은 게임을 해도 그때만큼 집중을 하지 못한다. 단순히 어렸을 때 느꼈던 찰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조금이나마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던전 공략이 이 정도로 재미있다니.’

제니는 툭툭 던지듯이 잘못을 지적할 뿐이었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자 집중력이 오르고 효율도 올라갔다.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는 현아와 혜리의 문제점까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동안은 서로 호흡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현아와 혜리는 녹초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들은 말없이 이차원의 주머니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둘 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게 매우 지쳐 보였다.

유진은 같은 경험을 해도 서로 느낀 게 달랐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만 제니에게 칭찬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니가 떠나면 부길드장이 되기 때문에 남모를 책임감이 컸기 때문일 수도.

하지만 제니가 자신을 독려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현아와 혜리는 확실히 자신에 비해 불필요한 움직임이 많았고, 집중력도 낮았으니까.

제니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자신의 단점은 물론 팀원들의 단점도 크게 보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부길드장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처럼 팀원들과 그저 즐겁게 어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일이다.

때로는 싫은 소리도 해야 하고, 원하든 그렇지 않든 새로 얻은 지위에 맞는 권한을 행사해야 할 일도 생긴다.

팀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생각해서 자신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지만, 제니의 지도를 받은 몇 시간 만에 자신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솔직히 앞으로 던전에 들어갈 때 제니 이상으로 잔소리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버하지 말자.’

아무리 욕심을 내더라도 각성할 때의 수준이 다른데, 자신이 A급 이상의 게이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성장을 위한 노력 자체가 즐거움이랄 수 있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을 팀원들에게까지 똑같이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부끄러워졌다.

‘벌써 부길드장이 된 것처럼 굴고 있네.’

이차원의 주머니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데 제니가 다가왔다.

차가운 얼굴의 미녀.

평소에는 표정이 없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면 저절로 마음이 뺏기고 만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때요? 유진 씨?”

유진은 조심스럽게 현아와 혜리 쪽을 보았다. 그녀들은 지쳐서 자기들 쪽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저는…… 좋았어요. 몬스터를 사냥하는 요령을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직접 지도받은 적이 없어서……. 더구나 제니 씨의 조언은 마치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가 쉬웠어요.”

“그건 유진 씨가 남다른 재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질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조언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죠. 자존심 이전에 몸이 인정을 하니까요. 저도 유진 씨와 지금 만났다는 것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몇 년 만 일찍 만났더라도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네? 아니에요. 제 한계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지도를 받아도 시작점이 다른데 제니 씨와 동등한 수준이 될 수는 없죠.”

“그렇지 않아요. 저 역시 처음엔 C등급으로 시작했습니다. 운 좋게 좋은 기회를 만나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성장을 했죠. 제가 A등급이 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 줄 아세요?”

유진은 깜짝 놀랐다. C등급에서 A등급까지 성장하다니,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가만히 고개를 젓자 제니가 대답했다.

“3년입니다. 3년 만에 C등급에서 지금 수준으로 올라섰죠.”

“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커졌다. 유진이 자기 입에 손을 가져가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제니가 웃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예요. 말 그대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욕심을 조금만 줄인다면 3년이 아니더라도 4년이나 5년이면 충분히 A등급 게이머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유진 씨처럼 재능이 특출한 사람이라면 가능하단 얘기죠.”

유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니를 보았다. 제니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은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적이 어디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와 아프리카, 그리고 심지어 선진국 일부 국가에서도 비밀스럽게 게이머를 성장시키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방법으로 게이머를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라서 타국이 그런 행위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경계심을 갖는 나라는 없었다.

반쯤은 엉터리 소문이나 다름없지만 그런 연구를 하는 국가들의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라고 했다. 심지어 게이머를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며 강제로 던전에 처박거나, 신체 개조도 서슴지 않는 나라도 있다고 했다.

만약 제니도 그런 경험을 한 거라면…… 유진은 그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제까지와 전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피스&호프에 속한 일류 게이머이고, 자신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위치에 있는 그녀이다.

자신이 집중해야 할 사실은 그녀의 과거보다 C등급 게이머도 몇 년 안에 A등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비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어디 있겠는가?

가능하면 눈앞에 있는 게이머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11층 세이브존에 도착한 A팀에 이어 나머지 팀들도 속속 세이브존에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매우 지친 얼굴이었다.

유진은 그들이 왜 그런지 이해했다. 모두 A팀에 소속된 게이머들보다 수준이 조금씩은 떨어지는 게이머들이니까. 같은 숫자로 공략했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 당연하다.

다만 먼저 간 팀이 몬스터 숫자를 줄여놓았다면 몬스터가 리젠되기 전에 해당 지점을 통과한 팀은 더 수월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제니 일행이 팀을 수준별로 나누어 강한 멤버로 구성된 팀부터 던전 안에 들여보낸 것이다.

제니는 미르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희는 내일이면 피스&호프로 돌아갑니다.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거죠. 어떻습니까? 한 층 더 올라갈까요? 아니면 여기서 그만할까요?”

제니의 말에 미르 멤버들은 흠칫 놀랐다. 딱히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분위기로 보아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공략은 평소보다 배는 힘들었다. 조언을 들으며 천천히 이동한 탓에 시간도 훨씬 많이 걸렸다.

나쁜 습관은 하루 만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습관을 교정하기 위한 첫날은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다.

요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한 셈인데, 미르 멤버들 중에는 그만한 동기를 가진 자가 없었다.

처음에는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마음이 끌렸지만, 그것도 결국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등급을 올리느니 차라리 지금 수준에 만족하고 사는 게 낫다고 여기는 멤버가 대부분이었다.

제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철수하도록 하죠.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부터는 재수 없고 잘난 척하는 우리를 더 볼 필요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녀의 농담에 저마다 웃음을 흘렸다.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해서 피스&호프 파견 게이머들에게 작별인사를 전하는 멤버도 있었다.

개중에 가장 아쉬운 사람은 유진이었다.

그녀가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피스&호프 파견 게이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제니의 조언을 더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고 던전을 공략하는 진짜 즐거움에 눈을 뜬 기분인데, 더 이상 그녀의 조언을 들을 수 없다니.

망연해하고 있는 사이에 제니가 다가왔다. 그녀가 물었다.

“유진 씨는 어때요?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쉽지 않나요?”

그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에 유진은 마음속에 희망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현실적인 제약이 마음에 걸렸다.

제니는 웃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둘뿐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한테 귀환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저도 같이 사냥을 할 거니까요. 어때요? 둘이서만 사냥을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한 뒤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부담을 드릴 순 없어요. 귀환석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걱정 마세요. 귀환석은 어차피 우리 수당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용하든 안 하든 미르에서 비용을 부담해야 해요. 미르 멤버로서 그건 좀 아깝지 않나요? 투자를 했으면 최대한 뽑아내야죠.

그리고 저 역시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쉽습니다. 아까 몇 시간 동안 말만 한 탓에 몸이 근질거려요. 유진 씨와 호흡을 맞출 일도 아주 기대가 되고요.”

그제야 유진은 밝은 얼굴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결국 나머지 멤버들이 돌아가고 제니와 유진 둘이서만 12층에 올라가게 되었다.

현아와 혜리는 떠나기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피곤하지도 않니? 무슨 애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

“난 솔직히 이제 제니 저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 끼친다, 얘. 어렸을 때 젓가락질 똑바로 하라고 엄마한테 혼나던 게 생각나.”

“조심히 가요, 언니들. 저도 무리하지 않고 조금만 더 하다 갈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