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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49화 (149/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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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49화

    정령의 외침에 암젤의 귀가 쫑긋 섰다.

    “못됐다고 했냐옹? 진짜 못된 게 뭔지 모르는 거구나옹.”

    그녀가 명령을 내리자 호랑이가 한층 성난 표정으로 ‘어흥’ 울음소리를 내며 훌쩍 뛰어올랐다.

    이번에 정령은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한쪽 날개가 긁히고 말았다.

    “으악!”

    살충제를 맞은 나비처럼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신장은 15센티미터쯤 될까?

    하얀 머리카락이 비쭉비쭉 선 남성체 정령이었다.

    남성체라고 해서 생식기가 바깥에 돌출한 건 아니고, 정령은 대부분 마른 몸매이지만 여성체의 경우 가슴 부위가 불룩 나와 있었다.

    날개까지 뜯긴 정령은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젠장!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죽다니, 억울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호랑이가 그르렁 대며 터벅터벅 걸어왔다. 정령은 대자로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암젤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쳇 하고 짧은 입소리를 내더니 호랑이를 다시 불러들였다.

    나는 검지로 정령의 배를 꾹 눌렀다.

    “으앗! 와악!”

    자기 몸을 자극하는 게 호랑이라고 생각했는지 반응이 격렬했다. 나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몸을 살살 문지르며 간지럽혔다.

    “왁! 으악! 하하! 하하하하!”

    눈물을 매단 채 마구 웃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눈을 떴다.

    “……뭐하는 거야!”

    “너 이름이 뭐냐?”

    “더 이상 모욕은 참지 않겠다. 죽이려면 그냥 죽여라!”

    “오케이. 죽여주겠다옹.”

    암젤의 말에 정령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나는 그의 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죽고 싶은 거야? 살고 싶은 거야? 하나만 골라.”

    “와하하! 내 배는 장난감이 아니, 하하…… 다! 둘 중에…… 하하! 고르라면 당연히 살고 싶…… 하하하!”

    나는 정령을 간질이던 걸 멈추고 아린에게 말했다.

    “이 녀석을 치료해 줘.”

    그러자 암젤이 깜짝 놀라 항의했다.

    “왜 이딴 녀석을 살려주겠다는 거냐옹.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놈 아니냐옹.”

    “던전에서 몬스터가 침입자를 공격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러고 싶어서 한 거겠어?”

    내 호의적인 말에 정령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안하게 눈알을 굴려댔다.

    아린이 가볍게 하프를 튕겼다. 치유의 곡을 연주하자 정령의 몸이 금세 회복되었다. 상처가 아물고, 날개도 정상이 되었다.

    정령은 벌떡 일어나 자기 몸을 내려다보더니 의심을 떨치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짓이지? 왜 나를 치료한 거냐!”

    “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한 적 있어?”

    “…….”

    “다시 한 번 묻는다. 네 이름이 뭐지?”

    “이름은…… 말해줄 수 없다. 정령은 오직 친구에게만 이름을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말한 적 없다.”

    당당히 자신이 외톨이라고 밝힌 정령은 가슴을 쭉 폈다.

    나는 그가 한 말에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느꼈다.

    임퓨어 정령으로 태어난 그는 가족과 동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에 자기 힘을 빼앗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흔치 않은 경우에 속했다.

    거기다 레벨 100이 넘는 몬스터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면 잠재력이 매우 큰 정령이었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드로스트킹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하늘 던전의 마스터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중이었다. 사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가 사용했던 도구 중 하나인 구슬 쪽으로 걸어갔다.

    드로스트킹은 한손에 쥐고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커서 두 손으로 들어 올려야 했다.

    이 구슬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라이트닝 블랙 펄’이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그라차차의 등에서 구할 수 있었던 ‘윈드 사파이어’처럼 보조 에너지원으로 쓰이지만 결정석보다도 가치가 낮다.

    오히려 장식품으로서의 활용도가 더 높은 물건이었다.

    한마디로 거래 가격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

    하지만 내게는 윈드 사파이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쓰임새가 있었다.

    구슬에 마나를 흘려 넣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번개 속성을 품고 있는 아이템답게 전류가 파직 파직 튀며 내게 건너왔다.

    잠시 뒤 검은 구슬 안에 회오리처럼 꿈틀대고 있던 번개 에너지가 사라졌다.

    [패시브 ‘라이트닝’을 얻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라이트닝 볼트’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이는 ‘빛’ 속성을 이용해 구사한 것이었다.

    일부 스킬은 꼭 맞는 속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비슷한 에너지원을 전환해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물론 위력은 본래 속성을 사용하는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이제 A등급의 ‘라이트닝’ 속성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라이트닝 볼트’뿐만 아니라 ‘파이어 볼트’의 위력도 더욱 강해질 것이었다.

    내가 구슬에서 속성 에너지를 뽑아내는 동안에도 정령은 자기가 있던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차피 도망칠 데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표정을 보자니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나 역시 어렵게 만난 임퓨어 정령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녀석의 경계심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내 이름은 조성오야.”

    “헉! 자기 이름을 함부로 말하다니! 너는 정말 지조가 없는 녀석이구나!”

    “뭐라고? 이 건방진 꼬맹이가! 그 똥똥한 배를 톡 터뜨려 줄까옹?”

    나를 대신해 암젤이 화를 냈다.

    정령은 기겁을 하며 날아올랐지만 도망가거나 숨지는 않았다.

    “흥! 정말 버릇없는 고양이네! 일대일로 싸우면 질 주제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까불지 마라옹! 레굴라도 없고, 드로스트킹도 없는데 네가 어쩔 거냐옹!”

    나는 정령이 더 이상 암젤을 자극하지 않도록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싸움은 됐고, 대화를 해보자. 너는 어쩌다가 여기 있게 됐지?”

    “음…….”

    정령은 머뭇거리며 나를 보다가 이내 체념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뭐, 괜찮겠지. 나는 원래 정령의 땅 모니타 출신이다. 하지만 이런 몸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별로 환영받지 못했지. 사실 환영받지 못한 수준이 아니라 마을에서 곧장 쫓겨났어. 당시에는 꽤 서운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나 같은 임퓨어는 기가 쪽쪽 빨린 다음에 말라 죽는 게 보통이라고 하더군. 나름대로 운이 좋았던 셈이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임퓨어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정령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몬스터들 틈에도 낄 수 없지. 고민 끝에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를 감출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 그래서 몬스터를 이용하게 방법을 알아냈지.

    처음엔 하등한 몬스터를 이용하다가 내 힘이 세지면서 점점 더 수준이 높은 몬스터로 옮겨갔어.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어떤 몬스터에 들어가더라도 백 퍼센트 만족이란 있을 수 없었지. 나는 임퓨어니까, 한쪽의 속성을 소홀히 하면 생명이 꺼져 버리고 말아.

    때문에 끊임없이 여행을 해야 했어. 저주스럽게도 땅 속성과 하늘 속성은 그야말로 정반대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마다 엄청난 거리를 옮겨 다녀야 했지.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 자고 일어났더니 지금까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오게 된 거야. 정령인 나는 금방 이곳이 지닌 특징을 이해했어. 땅과 하늘, 두 가지 속성이 공존하는 곳!

    내게 이 이상의 축복은 없었지. 방해꾼이 끊임없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들과 싸워서 져 주는 게 터전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정령은 말을 멈추고 나를 불만스럽게 흘겨보았다.

    “그런데 며칠 전 네가 여기 들어오게 된 거야. 네가 다른 녀석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지. 너와 싸울 때는 다른 녀석들에게 했던 것처럼 대충 할 수 없었어.”

    정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빼앗긴 이상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 고생을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사는 것은…… 즐겁지 않거든.”

    무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사연을 듣고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뿐 아니라 파티원들도 침울한 얼굴이었다. 내가 데리고 있는 파티원 중에는 비슷한 사연을 가진 멤버가 많았다.

    암젤과 트레앙은 일족이 전멸을 당했고, 칼리타도 비슷한 처지이다. 아린과 수보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본래의 삶을 버리고 나와 계약을 맺었다.

    “쳇! 누가 너 따위를 동정할 것 같냐옹?”

    암젤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이 정도로 말했다는 것은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다.

    정령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에게 동정 받고 싶진 않아.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러운 삶이었다고 생각해. 정령이든 누구든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죽는 법이야. 그냥 그게 너무 갑작스럽게 와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정령을 보고 생각했다. 퀘스트는 왜 쌍둥이 던전을 공략하게 해서 이 녀석과 만나게 한 것일까? 적어도 녀석을 죽이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내버려 두면 자기 알아서 잘 살았을 녀석이니까. 특별히 나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녀석도 아니다.

    나는 아직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곧 쌍둥이 던전을 모두 공략하려면 이 정령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시 그렇군.”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뜻 모를 말에 정령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역시라는 거냐? 네 눈에도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거야?”

    “아니, 오늘 우리가 만난 이유 말이야. 너는 죽을 때가 됐다고 해석한 모양이지만 내 생각은 달라. 너는 오늘부터 제2의 인생을 살게 될 거다.”

    “에엥?”

    “정령은 친구에게만 이름을 말한다고 했지? 그럼 네 이름을 알려줘. 나와 내 동료들이 너와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에에엥?”

    정령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새하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 누가 너희랑 친구가 되고 싶대? 나, 나는 그냥 네가 물어봐서 내 얘길 한 것뿐이야! 근데 왜 이렇게 덥지? 몸에서 열이 나네?”

    정령은 훌쩍 날아오르더니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날아다녔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지겨워졌다.

    “친구 하기 싫으면 그냥 죽든가. 네 마음대로 해.”

    “헉!”

    정령은 날개를 멈추고 내려왔다.

    “친구가 되지 않으면 죽는다고?”

    “나는 여기 던전을 차지해야 할 이유가 있어. 네가 그렇게 싫다면 다른 방법이 없지. 사실 죽이는 게 가장 쉽지만 그렇고 싶진 않았거든.”

    정령의 얼굴에 가득했던 붉은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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