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독식왕 : 클리어러 148화
얼마간 휴식을 취한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단상으로 걸어가 귀환서를 펼치자 과연 한 장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다.
곧바로 하늘 던전으로 갈 수 있는 페이지.
지하 던전의 마스터를 쓰러뜨린 최초 한 번만 활성화되는 페이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멤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휴식으로 모두 회복이 된 모습이었다. 심지어 수보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욕이 넘치는 얼굴이다.
귀환서에 손을 얹자 시야 가득 밝은 빛이 들어찼다.
평소에 귀환서를 사용했을 때와는 약간 다른 기분이었다. 하늘 던전으로 간다고 의식을 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몸 자체가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의 시간 사이에 우리는 방금 전에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깨끗한 하늘, 그 위에 구름.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아래로도 뭉게뭉게 하얀 연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구름 위에 올라온 것 같은 감각이다. 물론 두 발은 연한 주황색을 띤 바닥에 확실히 닿아 있었다.
레굴라를 공략하고 바로 하늘 던전으로 왔을 때의 장점이란 단순히 최상층으로 올라온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마스터를 만나기 전에 치러야 할 졸개들과의 싸움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내게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반 게이머들은 나와는 입장이 다르니까 무리해서 던전 마스터 2연전을 치르는 것보다 차근차근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다.
“신기하군요.”
수보타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우리가 방금 전에 있던 곳은 소로반 지역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던전이고, 이곳은 음……. 인쿠 지역 같은데요?”
“그래?”
“제가 모셨던 주인 중에는 여행을 좋아하는 슬라둠도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영지의 내치는 아주 엉망이 되었었죠. 하지만 덕분에 존경하는 지금의 주인님을 만나게 되었지만요.”
수보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살짝 소름이 돋아 그에게서 몇 발짝 물러났다.
수보타가 말하는 슬라둠이란 수만 년 전에 자기가 주인으로 삼았던 최초의 슬라둠을 일컫는 것일 터다. 그를 따라다니다가 아마도 불사의 약을 마시게 된 거겠지.
굳이 ‘놈’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수보타가 주인으로 삼은 최초의 슬라둠 역시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는 축구공만 한 크기의 둥그런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이 마치 태양과 같았지만 분명히 태양은 아니었다.
원근을 확실히 가늠할 수는 없어도 우리 앞에 있는 빛은 태양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화악-
갑자기 원으로부터 더욱 강력한 빛이 분사되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본 곳에서 인간형의 조그만 생명체가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레굴라의 몸속에 있다가 도망친 정령.
표정을 알아볼 수 없어도 매우 화가 나 있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빛이 거두어지자 우리 앞에 또 하나의 던전 마스터가 나타났다.
드로스트킹.
등에 한 쌍의 날개를 달려 있어도 놈은 분명 천사족이 아닌 몬스터에 속한다.
머리 위에 황금빛의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 독특하지만, 이는 덴몬킹이 그랬듯 무리 중 우두머리급에 속한다는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
신장이 3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인간형의 신체를 가지고 있고 팔이 네 개였다. 그리고 각각의 손에 무기를 쥐고 있었다. 기다란 창, 검, 방패와 구슬.
드로스트킹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 가장 성가신 것은 새까만 구슬이다. 이 구슬을 사용하면 번개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위력은 4클래스 마법사 스킬 정도.
과거 드로스트킹과 싸웠을 때를 돌이켜보면 녀석이 번개를 떨어뜨리는 타이밍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열심히 근접전을 펼치다가 순식간에 날아올라서 꽝!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내 레벨이 낮았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소달루스 세트를 입고 히루도의 창을 꺼냈다.
신장이 크고 여러 개의 무기를 사용하는 드로스트킹을 상대로 코리우스의 검으로 싸우는 것은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다.
파괴신의 룬이 장착된 창이 손 안에서 웅웅거리며 반응했다.
파괴신의 룬에는 전설상의 인물인 프리메돈의 의지가 담겨 있다. 누군지 만나 본 적은 없어도 파괴신이라고 불릴 정도면 싸움을 매우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
손 안에 전해지는 떨림도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기쁨의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꾸웨에에에~~”
드로스트킹이 상체를 쑥 내밀고 기함을 토해냈다. 이렇게 보니 더욱 천사랑은 거리가 먼 녀석이다.
경직 속성이 담겨 있는 음성이 피부를 찌릿찌릿하게 했다.
하늘 던전의 마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은 레굴라와 싸웠을 때보다는 훨씬 심플하다.
놈 자체가 근접 무기를 들고 있기 때문에 맞붙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 더구나 등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큰 덩치에 맞지 않게 이동 속도가 매우 빨라 거리를 띄우고 싸우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나는 창을 들고 던전 마스터에게 돌진했다.
훌쩍 뛰어오르자 발밑으로 몬스터의 검이 지나갔다.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스킬을 터뜨렸다.
‘토네이도 스피어!’
파바바박!
가장 먼저 얻었던 창술 스킬이지만 위력은 레벨이 오르면서, 그리고 웨펀 마스터가 되면서 훨씬 강해졌다. 황급히 방패를 쳐들어 막아낸 드로스트킹의 몸이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빼꼼 쳐든 놈의 머리통을 향해 또 하나의 스킬을 날렸다.
‘백 개의 창!’
쿠구구궁!
방패만으로 전부 막아낼 수 없는 강력하고 광범위한 스킬이다.
“꾸웨에에~”
답답한 비명을 내지르며 드로스트킹의 한쪽 무릎이 풀썩 꺾였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머지 멤버들이 던전 마스터를 공격했다.
드로스트킹은 팔이 네 개나 되지만 파티원들의 공격을 모두 상대하는 데는 애를 먹었다.
나는 거리를 띄운 뒤 ‘이글 아이’를 발동시켰다. 정령이 있는 곳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드로스트킹의 이마 안에서 조그만 빛이 꿈틀거렸다.
창을 내려놓고 바키움을 꺼냈다.
정확하게 정령을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연사.’
한 대처럼 날아간 세 대의 화살이 파티원들에게 둘러싸여 혼이 빠진 드로스트킹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했다.
“꾸오오오~”
나는 화살을 얻어맞기 전에 정령이 재빨리 몬스터의 가슴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당황하고 허둥대는 움직임이다.
나는 놈의 초조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놈이 방금 전까지 빙의되어 있던 곳은 레굴라이다. 그때 내 스킬에 몸이 꿰뚫렸었다. 고만고만한 스킬이 아니라 S등급의 하트 브레이커에 당한 것.
정령도 공격을 당하면 대미지를 입는다는 사실은 일반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놈에게는 상당한 공포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평범한 게이머와 다르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을 궁극적으로 파괴할 능력이 있다는 것도 몸소 체험했다.
내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던전 마스터가 아니라 정령을 상대한다는 것. 세상의 게이머들 중에 나 말고 또 누가 이런 희귀한 경험을 하겠는가?
“꾸웨에에에~”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른 드로스트킹이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놈이 무거운 몸을 공중에 띄우는 것은 불과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구슬이 쥔 손을 번쩍 들자 구름 사이에서 빛줄기가 모였다.
꽈릉-!
강력한 전격이 트레앙의 머리로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느린 그녀를 노린 것을 보면 역시 판단 능력이 뛰어난 놈이다.
트레앙은 도끼를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그 전에 칼리타가 몸을 날려 그녀를 안고 번개를 피했다.
최초의 공격이 빗나간 드로스트킹의 눈길이 다음 상대를 물색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수보타였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놈이 수보타를 노려준다면 이쪽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
하지만 불쌍한 수보타가 번개를 얻어맞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바키움을 등에 되돌리고 히루도의 창을 집어 들었다.
“점퍼”
시동어를 읊조리자 의상이 바뀌었다. 점프를 하는 동시에 저절로 등 뒤의 날개가 펄럭였다. 물론 내 쪽의 날개는 하늘을 날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불과하다.
드로스트킹의 시선이 수보타에서 내게로 옮아왔다. 번개 공격을 할 상대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꽈릉!
번개가 몸을 강타하기 전에 허공을 밟고 방향을 바꾸었다. 번개는 나를 스치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스러졌다.
나는 히루도의 창의 한가운데를 분리시켰다.
‘섀도 커터.’
드로스트킹의 창과 검이 원래 내가 있던 곳을 헛되이 가로질렀다. 몬스터의 가슴팍으로 이동한 나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이글 아이의 효력이 사라져 정령이 있는 곳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놈이 있던 곳을 정확히 노린 공격이었다.
드로스트킹이 마치 격추당한 비행기마냥 빙글빙글 돌며 추락했다.
꽈앙-!
거구가 추락하면서 바닥에 직경 5미터 가량의 크레이터가 생겼다. 파티원들이 달려들어 놈을 집중 난타했다.
“꾸웨에에~”
드로스트킹의 출구 없는 비명이 높은 하늘 위로 쩌렁쩌렁 울렸다.
12
순서상으로 지하 던전을 먼저 공략해야 하늘 던전으로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레굴라보다 드로스트킹이 더 강한 것은 아니었다.
둘 모두 레벨은 100~110 사이.
나는 레굴라보다 드로스트킹을 상대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꼈다.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몬스터에 빙의된 본체가 연속된 싸움으로 지쳤을 것이고, 하트 브레이커까지 얻어맞았으니까.
싸움은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드로스트킹은 바닥에 벌렁 누운 채로 마지막 남은 숨을 헐떡였다.
나는 코리우스의 검을 들고 놈에게 걸어갔다.
‘이글 아이.’
거대한 몬스터의 몸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코어.
놈은 드로스트킹의 오른쪽 허벅다리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무심하게 그곳을 검으로 찔렀다.
푹!
정령은 잽싸게 드로스트킹의 배꼽 쪽으로 이동했다.
푹!
왼쪽 가슴.
푹!
이번엔 검이 녀석의 몸을 가볍게 스쳤다. 마지막으로 정령이 이동한 곳은 드로스트킹의 주둥이였다.
그곳에서 인간형의 빛 무리가 쑥 빠져나왔다.
더 이상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똑똑히 보였다.
상처 입은 임퓨어 정령.
놈이 양팔을 휘저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싫은데?”
나는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젤이 내 의도를 눈치채고 소환수를 불러냈다.
“어흥!”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정령을 향해 앞발을 휘저었다.
“으악!”
조종할 몬스터를 잃은, 거기다 심한 상처까지 입은 정령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표정에는 악다구니가 남아 있어도 그걸 분출할 방법이 전혀 없다.
“안 돼! 그만!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예상 못 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멈칫 했다. 하지만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유가 뭐 있겠는가? 우리야 던전을 공략하러 온 것에 불과하고, 마침 그곳에 정령이 있었을 뿐이다.
호랑이는 첫발이 빗나가자 더욱 적극적으로 공중을 할퀴어댔다.
“으악! 그만하라고! 이 못된 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