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독식왕 : 클리어러 145화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기 때문에 한숨은 완벽히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애초에 이 사람들과 대화를 길게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저 한 명도 빠짐없이 내게 집중을 시킬 만한 장면이 연출되길 기다렸을 뿐이다.
나는 이계에서 토누크들에게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크게 손뼉을 쳤다.
짝!
말 잘 듣는 유치원생들처럼 남자들의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기억 삭제.’
스킬 범위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멈추어지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말하십시오. 대체하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지정해 주세요.]
“이 사람들이 어제 얻은 OG 멤버들 정보를 지워줘. 그리고 나와 OG에 품은 호기심도 없애주고, 그 자리를…… 걸그룹 ‘레드 걸스’에 대한 호감으로 채워줘.”
나는 기억 삭제 스킬을 게임 안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주문이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 없이 스킬이 발동되었다.
여러 줄기의 빛이 솟구치고, 그것들은 남자들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남자들의 표정이 점점 더 멍하게 변해갔다.
[……각각 10시간 13분, 9시간 20분, 7시간 17분, 7시간 6분…… 만큼의 기억이 지워졌습니다.]
나는 스킬에서 깨어나기까지 잠깐 지속되는 딜레이를 이용해 훌쩍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점프 패시브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 번의 도약으로도 남자들 머리 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두 번 더 뛰자, 무리의 모습이 거의 시야에서 사라질 만큼 멀어졌다.
문득 머리 위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노아에게 부탁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던전 입구로 들어오면 싫든 좋든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까.
나 이외의 멤버들을 입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던전에 들어올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딱히 헬기를 떠올린 것은 아닌데, 노아라면 나름의 방법을 생각해 낼 거라 믿었다.
던전을 찾는 90퍼센트 이상이 게이머이고, 그들은 대부분 부자이다. 공중으로 던전에 들어오는 것이 딱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경우엔 상당수 던전에 활주로도 있다니까, 헬기 정도는 얌전한 편에 속한다.
바닥에 착륙한 헬리콥터에서 파티원들이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내렸다. 키는 가장 크지만 정신연령은 가장 어린 트레앙이 재빨리 달려와 내게 안겼다.
“오빠!”
기본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조심성도 없는 편이라 안기는 느낌이 마치 태클로 돌진하는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 일반인이라면 허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헬리콥터는 어땠어?”
“재밌어! 또 타고 싶어!”
“나중에 태워줄게.”
“진짜? 신난다!”
트레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기뻤다. 어쩐지 자가용 헬기나 비행기를 갖게 되는 것이 먼 후일의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베버리힐즈 풍의 하우스에 수영장, 테니스 코트, 극장이 딸린 주거지가 지금도 착착 세워지는 중이니까. 조감도상으로 분명히 활주로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곳에서 계속 떠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 멤버들을 이끌고 관리소로 걸어갔다.
입구 밖에 있는 남자들은 지금쯤 자기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기억을 지우긴 했지만 그것이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것을 아는 이유는 ‘망각’류의 마법에 걸리고도 기억을 되찾는 장면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잔혹한 짓이다. 완벽하지 않은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 때론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일반인이 스킬을 깬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기억에 걸그룹에 대한 호감을 끼워 넣은 것도 비슷한 이유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 기억이 사라졌다는 위화감을 덜 느끼게 될 테니까.
이로써 어제오늘 있었던 해프닝이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이것이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늦지 않게 대중에 OG 멤버들을 공개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숨겨서 될 문제가 아니고, 아마 피스&호프라면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쨍한 햇볕 아래로 나가면 어둠이 닿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악랄한 집단인 동시에 가장 세상의 이목을 신경 쓰는 집단인 피스&호프는 OG의 위상이 커지면 아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관리소로 가자 놀라운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병우가 그곳에 있었던 것.
어제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뒹굴던 모습이 생각나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충격을 받고 적어도 며칠은 출근을 안 할 줄 알았더니, 멀쩡히 관리소 안에 서 있었다.
‘보기보다 근성 있네?’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병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오, 오셨습니까? 조성오 게이머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나이도 더 어린 것 같은데.”
“그럴 수야 있나요. 게이머는 국가의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저 같이 허접한 각성자는 그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아무튼 조성오 님은 그중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유일무이한 보석으로서…….”
연습한 멘트인지 자연스럽게 줄줄 흘러나왔다.
“그만하세요.”
“……네.”
병우는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병우는 내 말에 살짝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착각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 일행 중 한 여성에게로 시선이 갔다.
인형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차갑고 도도한 눈빛을 가진 여자.
그녀가 감정 없는 얼굴로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천천히 손이 위로 올라가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그럼 오늘도 즐거운 공략 되십시오!”
10
지하 던전 공략은 거칠 것이 없었다.
파티원 전원의 레벨이 100을 넘었고, 그것은 현실 게이머의 등급에 비추더라도 A급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A급 게이머는 현실에선 그야말로 귀한 대접을 받는 존재이다. 극소수의 S급을 제외하면 게이머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위치한 존재들이니까.
A급에 준하는 게이머로 이루어진 파티가 C급 던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우리는 수년 동안 함께 사냥을 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돌개 보드까지 갖춘 지금은 공략에 속도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OG 여자 멤버들에 관한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다.
우연히 TV에서 ‘레드 걸즈’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방청객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몇 명 보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피켓을 들고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팬저씨들.
느낌이지만 연예기사에 레드 걸즈의 이름이 더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 내게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던 남자 말고도 무리 속에 기자가 몇 명 더 섞여 있었을 것이다.
TV 안에서 풋풋한 매력을 발산하는 걸그룹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자기네들 인기에 내가 일익 했다는 사실을 알까?’
옆에서 졸고 있던 암젤이 벌떡 일어나더니 앞발로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바꾸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잠을 잤다.
“흠냐옹. 한눈팔지 마라옹.”
“…….”
평균적으로 하루에 3~4개 층을 공략해서 일주일째인 7일 차에 지하 던전 최하층에 도달했다.
C급 던전인 이곳은 총 16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C급치고는 층수가 많지 않지만, 이곳이 하늘 던전과 세트이고, 그곳 역시 16개 층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곳 던전 마스터가 누구인지 상세한 정보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간략한 정보는 물론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지만, 등급이 높아질수록 던전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심지어 A급 던전 정보는 국가에서 기밀로 분류하여 인터넷 게재가 금지되어 있다.
물론 웬만큼 식견이 있는 게이머라면 몇 안 되는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 개략적인 것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자국 던전을 타국 게이머가 공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그래도 어쨌거나 등급이 높은 던전의 정보를 굳이 드러내려는 이는 없었다. 정보가 돈과 권력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던전에 관한 정보라면 더욱 가치가 있으니까.
상위 길드들은 자기가 공략한 A급 던전 정보를 쥐고 있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겼다.
그런 사실과 무관하게 나는 인터넷으로 알 수 있는 소량의 정보만으로도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게이머일지라도 나보다 몬스터 사냥을 많이 한 사람은 없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십 년 내내 사냥을 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세월만큼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그야말로 자는 것과 먹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로지 공략에만 매진했다.
그것을 현실 경험으로 환산하면 20년, 30년짜리는 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름만 들어도 아아~, 심지어 던전에 들어가 등장하는 졸개만 보고도 아아~ 이 던전의 마스터는 누구겠구나 추측이 가능하다.
쌍둥이 던전 중 지하 던전의 마스터는 ‘레굴라’라는 놈이다. 거대한 지렁이형 몬스터로, 땅 속을 지나다니는 것이 가능하고, 몸뚱이 전체를 석화시키기도 한다.
레벨은 100~110.
전에 D급 던전에서 상대한 그라차차-거대 거북형 몬스터-처럼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약점도 뚜렷한 몬스터이다.
다만 이놈이 다른 몬스터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녀석의 실체가 땅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는 것.
굳이 분류하자면 정식 정령은 아니고, 뚜렷하지 않은 어떤 이유 때문에 변질된 종에 속한다.
나는 이것이 지하 던전과 하늘 던전이 연결되는 결정적 이유일 거라고 보았다.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다단한 존재가 정령들이니까. 정령이 등장하는 곳에는 늘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
지금까지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정령이 특별한 작용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레굴라의 실체가 정령이라는 사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현실 게이머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다. 게이머의 본분은 그저 공략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전부니까.
던전 마스터가 등장하는 모든 층이 그러하듯 앞으로 나아갈수록 독특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한층 독한 흙냄새가 풍겨오고, 공기의 밀도가 높아졌다.
나는 90퍼센트의 기대감, 그리고 10퍼센트의 경계심을 가지고 파티원들과 함께 최하층을 공략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