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독식왕 : 클리어러 143화
6
나는 핸드폰을 든 채 티코이에게 물었다.
“다 지워졌어?”
“네, 주인님. 전부 삭제하고 이병우 아이디로 조작이었다는 사과 메시지도 올렸습니다. 다행히 다운로드가 불가능한 형태로 업로드를 해놓아서 안심입니다. 외부 유출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있더라도 본인이 조작이라고 말한 자료니까 가치가 없다고 봐야겠죠.”
“그래. 잘했어, 티코이.”
나는 전화를 끊고 계속 이병우의 컴퓨터를 검색했다.
티코이의 도움을 받아 금방 사진이 저장된 폴더를 검색해 삭제할 수 있었다.
티코이의 해킹 실력은 날이 갈수록 진보해서,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거의 불가능한 게 없을 지경이다.
그런 빠른 성장은 아마도 노아와 만난 일이 촉매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와 사업 진행을 하며 기술 공유도 하는 모양이니까.
아무리 현실 생활에 적응이 빨라도 오랜 기간 암거래 사이트를 운영해 온 노하우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모르긴 해도 노아 역시 티코이에게 큰 자극을 받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야 티코이가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레벨이 나와 연동되어 있는 덕분에 벌써 110레벨이 넘는다.
어쩌면 노아 입장에서는 위협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런 걸 느낄 성격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작업은 금방 끝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살펴보다가 찌르레기라고 적힌 폴더를 발견했다.
‘으음…….’
이름만으로 이 안에 어떤 파일들이 들어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동질감과 더불어 강한 호기심이 생긴다.
우리 파티원들을 두고 미인이라고 하는 걸 보면 평범함과 거리가 먼 취향을 가지고 있진 않은데.
찌르레기 폴더로 마우스 커서를 이동시킨 순간 따가운 느낌이 등을 찔렀다. 아래를 보자 암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집에 있는 걸로도 부족하냐옹?”
“크, 크흠. 무슨 소리야? 나는 확실하게 사진을 찾아보려고 그러는 거야.”
암젤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찌르레기 폴더를 여는 것을 포기했다.
병우 쪽을 돌아보았더니 여전히 베개를 껴안고 뒹굴고 있었다. 뽀뽀를 하고 몸을 비벼대는 꼴이 어떤 환상에 빠져 있는 건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올해 본 장면 중에서 단연 못 볼 꼴 베스트 5에 들 만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았다.
“에, 에리나! 우웅~~ 거, 거기는! 좋아!”
‘에휴……. 환각에 빠져도 그런 쪽으로……. 많이 외로웠구나…….’
좁고 지저분한 자취방은 같은 각성자라도 능력에 따라 생활에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차피 각성이라는 것이 로또처럼 운에 달려 있어서 누구를 원망할 문제는 아니다.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네.”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야 뭐,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7
“일어나라옹.”
철썩!
병우는 자기와 사랑을 나누던 에리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뺨을 후려치자 깜짝 놀랐다.
“……어? 왜, 왜 그래? 에리나…….”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어떻게 된 일인지 나름대로 이해를 했다.
“아아~ 이번엔 다른 걸 해보자는 거야? 나 이런 건 처음인데……. 하지만 그 고양이 말투가 귀엽기도 하고……. 상대가 에리나니까, 용기 내볼게.”
“이 시키가!”
철썩!
흠칫!
병우는 뺨에서 불이 날 같은 통증을 느끼며 환각에서 깨어났다. 거짓말처럼 자신이 보고 느끼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뒤로 물러났다.
꽉 끌어안고 있던 에리나는 베개로 변해 있었으며, 꿈과 에로티즘이 넘실거리던 공간은 칙칙하고 홀아비 냄새가 가득한 자취방으로 바뀌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누군가가 뺨을 후려쳤다.
철썩!
“끄악!”
“정신 차리라옹. 얼마나 능력이 약하면 장장 30분이 넘게 환각에서 허우적대는 거냐옹. 한심하다옹.”
암젤의 환각 능력도 레벨 100이 넘어가며 크게 진일보했다.
상대를 더욱 깊은 환상에, 더욱 오랫동안 빠뜨리는 게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환각이라는 것은 걸린 당사자가 현실이 아님을 인지하더라도 스스로 빠져나가려는 의지가 없으면 더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깨지 않고 억지로라도 계속 꾸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병우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시발! 깜짝이야!”
“어디서 초면에 욕이냐옹!”
암젤이 앞발을 치켜들자 병우는 깜짝 놀라 베개를 끌어안았다.
“침 묻은 베개 좀 그만 안으라옹. 더러워 죽겠다옹.”
고양이의 말에 병우는 자기가 끌어안고 있는 베개를 보았다. 얼마나 물고 빨아댔는지 흠뻑 젖어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뒤로 한 번도 빨지 않은 베개이다. 새삼 곰팡내와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
“오늘 겪은 일이 무엇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라옹. 그리고 이따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 확인하는 거 잊지 말고.”
할 말을 마친 고양이는 도도한 몸짓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나 간다옹. 문 열라옹.”
“아! 네!”
병우는 자기가 왜 고양이에게 쩔쩔매는 건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얼른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암젤은 사라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엔 봐도 아는 척하지 마라옹.”
병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양이가 사라진 빈 계단을 보았다.
‘되게 예쁜 고양이네. 게다가 이상하게 낯이 익고 말이지…….’
아직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잠깐 동안 현관에 서 있던 그는 안타까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에리나…….”
정녕 그게 모두 꿈이었단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생생했는데.
아직도 손에는 그녀를 만지던 온기가 남아 있다.
그는 빈손을 쥐락펴락하다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누군가 다녀간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고양이 한 마리가 다녀갔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아무리 능력이 약하더라도 어쨌든 각성자니까, 그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거야…….’
그래도 불안하거나 억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에리나와의 짜릿한 순간이 아직 여운으로 남아 있으니까.
어차피 훔쳐갈 것도 없는 집에 도둑이 들었더라도, 그녀와 보낸 시간으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딱히 도둑맞은 물건도 없는 것 같고 말이지.’
집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고양이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을 확인하라고?’
별 의심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고양이가 보라고 한 동영상이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동영상 목록의 제일 상단에 못 보던 영상이 있었으니까.
베개를 껴안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낯익었다.
재생.
-헉, 헉. 에리나…….
꿀꺽.
병우는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잠식하고 있던 달콤한 여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영상 속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니 소름이 끼치고 불쾌감이 솟구쳤다.
그동안 못생긴 외모는 아니라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영상 속에 재생되고 있는 영상은 그런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톱클래스 남자연예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변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 영상을 보기라도 한다면 자신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결국 30초도 버티지 못하고 멈춤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꽉 쥐고 두려운 시선으로 현관을 노려보았다.
고양이가 남긴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오늘 겪은 일이 무엇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지.
그는 자기가 겪은 일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저지른 잘못이 없는지 되새겨 보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호의로 이런 영상을 남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반복되는 일상을 살기 때문에 일과를 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똑같은 행위들을 지우고 나자 하나의 이벤트만 남았다.
오늘 던전에서 조성오를 보고, 그의 동료들을 핸드폰으로 촬영한 일.
어찌 보면 큰 잘못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것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받아들이는 쪽에서 불쾌하게 느꼈다면 분명 잘못인 것이다.
크나큰 관심 속에서도 조성오는 자기 노출을 꺼리고 있다. 그라면 자기가 몰래 길드원을 촬영한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확률이 높다.
병우는 머릿속으로 조성오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가늠해 보았다.
C급 던전에서 일하는 동안 거물급 게이머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그 중 대부분은 심한 자의식을 가진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지만, 실제 영향력이 큰 게이머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소장이나 그 위의 인물들까지 안중에 없었다. 조직 문화 같은 사회 시스템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이들이라서 상식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조성오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에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인생 하나 끝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무려 피스&호프 부길드장이었던 노아마저 그의 밑에 있으니까.
큰일 났다는 생각에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아 팬카페 창을 띄웠다. 사진이랑 게시글부터 지우고 두 손의 손금이 지워지도록 싹싹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더 높은 등급으로 각성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지만, 지금 능력으로 누리는 특권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다급한 마음에 눈물까지 맺혔다. 이미 의식 속에는 에리나고 나발이고 깨끗이 지워졌다.
그런데.
“헉!”
서둘러 찾은 게시글이 지워져 있었다. 대신 쓰지도 않은 사과글이 올라가 있다. 아까 올렸던 사진이 관심을 받기 위한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해당 게시글의 댓글에는 욕이 수십 개나 달려있다.
섬뜩한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후다닥 사진을 저장한 폴더로 가 보았더니 그마저도 지워져 있었다.
심지어 원본인 핸드폰 사진까지 지워졌다.
“하아…….”
이것으로 집 안에 남은 흔적이 누구 것인지 확실해졌다. 그가 직접 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이런 일을 남을 시켰을 리 없으니까.
싸늘한 기분으로 아까 본 고양이를 떠올렸다. 도도한 눈빛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그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 아침 본 조성오의 일행.
그중에 검은 머리칼에 요염한 얼굴을 가진 여자가 생각났다. 자기를 질책하듯 바라보던 시선.
당시에는 단순히 미인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성오를 귀찮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던 것 같다.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 눈빛이 고양이의 것과 똑 닮았다.
‘아…….’
세상은 넓구나.
하늘은 사람이 극복할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는데, 행운도 마찬가지로 그만큼만 허락하는 것인지 모른다.
병우는 앞으로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