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38화 (138/245)

# 138

독식왕 : 클리어러 138화

미르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자유로운 분위기의 길드였다.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게이머 네 명이 모여 시작한 길드고, 그 뒤로 멤버가 열여섯 명까지 늘어나는 동안 모두 알음알음으로 숫자가 더해졌다.

여자 네 명이 모여 시작한 길드이니만큼 친분을 통해 모인 멤버들도 대부분 여자였다.

모이면 길드 운영이나 던전 공략에 대해 얘기하기보다 즐겁게 수다를 떠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길드장을 포함한 주 멤버들이 큰 욕심이 없는 타입들이라 공략 계획도 즉흥적으로 짜일 때가 많았고, 그조차도 멤버들의 개인 사정을 충분히 감안해 융통성을 두는 경우가 잦았다.

합동 공략에 적극적이지가 않으니 다른 길드에 비해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 불만 없이 길드 생활을 할 만큼 유대감이 높았다.

그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약 한 달 전부터였다. 부길드장이 결혼을 하면서 길드를 나갔는데, 옮겨간 길드가 남편이 운영하는 꽤 명망 있는 곳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길드장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부길드장은 그녀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는데, 남편 자랑을 하면서 동시에 자기가 옮겨간 길드와 미르를 비교하며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길드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발단이 친구 사이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시간이 지나면 곧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 기대와 달리 길드장은 급기야 미르의 체질을 개선한다며 다른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큰 길드가 작은 길드와 합쳐지거나, 계약이나 동맹 관계를 맺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미르는 여타의 길드와 달랐다. 다른 곳보다 수입이 높지 않아도 멤버들이 길드에서 이탈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소속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그러지자 많은 부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 3주 사이에 세 명이 길드를 떠났고, 그들을 대신해 길드장이 도움을 요청한 피스&호프에서 파견 인원을 보내왔다.

말이 파견이지 새로 들어온 네 명의 멤버는 당장 길드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 모두가 길드장보다 등급이 높았고, 한 명은 비어 있는 임시 부길드장 자리까지 꿰찼다.

피스&호프에서 자금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길드원들 개개인에 대한 대우는 전보다 나아졌다.

던전 공략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대형 길드가 그런 것처럼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한 시도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기존 멤버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표면적인 부분은 나아졌어도 이미 가장 중요한 것이 깨져 버렸으니까.

일주일 정도 길드를 나오지 않은 사이에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가 상당 부분 바뀌고 새로 입사한 사무직원들이 보였다.

유진과 현아, 혜리는 못 보던 여자직원에게 회의실로 가라고 안내받았다.

현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낯설다, 낯설어.”

“이럴 바엔 차라리 오늘 나오지 말고 관둔다고 문자나 한 통 보낼걸 그랬어.”

혜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진은 그녀들에게 물었다.

“여기 나가서 어디 입사할지는 정했어요?”

“응, 두 군데 중에 고민 중이야. 한 곳은 당장 들어와도 괜찮다고 하고, 다른 한 곳은 면접 보러 오라는데, 그것도 어차피 형식적인 거래.”

현아가 대답했다.

혜리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녀들의 친분 관계로 미루어 같은 길드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잘됐네요.”

“너는? 네 친구한테 말해본다고 했었지? 혹시 얘기 잘됐으면 우리도 같이 들어가게 해주면 안 될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OG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길드잖아.”

“얘기 잘 안 됐어요. 사업이 목적인 길드라 전투 멤버는 안 뽑는데요.”

“아……. 그거 아깝네. OG 들어가면 노아 얼굴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노아가 부길드장인 길드에 들어갈 수 있다면 돈은 적게 받아도 상관없는데.”

“어쩌겠어요. 저도 다른 데 알아보려고요. 당분간은 비정규 파티에 들어가서 사냥만 다녀도 괜찮을 것 같고요.”

“정말 너처럼 사냥 좋아하는 여자 게이머도 없을 거야.”

회의실로 들어가자 무거운 분위기가 그녀들을 맞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전부 일곱 명. 모두 기존 미르 멤버였다.

숫자가 더 줄어든 것을 보니 적지 않은 숫자가 그사이 또 이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짜 이걸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진은 못마땅한 마음에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지금 미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 큰 길드가 작은 길드를 집어삼키는 전형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파견 게이머들도 어디까지나 피스&호프 소속 게이머들이다.

그들이 변화를 주도하는 자체가 어느 쪽의 힘이 센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유진은 자기가 좋아했던 길드가 이런 식으로 변모해 간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게이머계의 동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조류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길드에 속했다는 자체가 그녀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몸담아 왔던 곳이라 애착이 더욱 강하기도 했다.

‘뭐든 변하는 거겠지.’

스스로도 마음가짐을 달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까지 던전 공략을 반쯤은 즐거운 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더욱 강한 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성오 때문에 생긴 심경의 변화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곁에 있을 때면 늘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가까이 있지만 실질적인 거리는 그보다 훨씬 먼 것 같은 기분.

자신의 마음을 은근히 표현했던 적도 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도 비슷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꽤나 참담했다.

이제 조금씩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성오 쪽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점점 멀리 달아나 버린다.

어떤 식으로든 그와 간격을 좁히지 않는다면 축복처럼 얻은 두 번째 기회도 놓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나도 참…….’

유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가 혼수상태에 있을 때는 깨어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막상 깨어나고 나자 더 큰 바람을 품게 된다.

회의실의 무거운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진 것은 부길드장이 들어오면서였다.

멤버 중에서는 대놓고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멤버 중에 길드에 계속 남고자 하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설령 남고 싶다고 해도 분위기에 치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느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때 스스로 나가는 편이 낫다.

피스&호프에서 파견된 임시 부길드장 역시 여자였다.

스스로 국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발음이 어색한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곧고 긴 머리칼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냉정한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같이 던전 공략을 해본 적이 없으니 타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위기로 미루어 실력이 녹록치 않다는 것과, 육체를 사용하거나 무기를 사용하는 근접 계열 게이머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제니.

처음 보는 날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그렇게만 소개해서, 그녀의 성이나 출신 국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제니가 본명인지도 알 수 없다.

나이도 이십 대 후반쯤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제니는 특유의 도도한 몸짓으로 회의실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모두 오신 거라고 알고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슨 일로 모이라고 한 거죠?”

멤버 중 하나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당장 이곳에서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정도였다.

제니는 잠시 그녀를 냉정하게 쏘아보았다가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어차피 메시지로는 전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한자리에 모이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상당히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였기 때문에 이곳에 모인 멤버들 사이에서는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이제껏 제니의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무시하듯 차갑게 자기 할 말만 툭툭 내뱉었기 때문에 모두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방금 전도 어찌 보면 상식 수준의 예의를 차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선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제니는 한층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동안 불편함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에는 불편이 따라오게 마련이지만, 여러분이 느끼셨을 혼란과 상실감에 저는 마음깊이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쯤 되자 멤버들의 얼굴에는 얼핏 경악의 감정까지 드러났다.

아직까지 길드에 소속된 몸이라 반강제적으로 소집에 응하기는 했어도 부길드장의 사과를 듣게 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니의 충격적인 발언은 계속되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저를 포함한 파견 멤버들은 미르가 새로운 동력을 얻고 지속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1차적으로 저희가 할 일은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저희가 미르에 온 목적은 사업적, 기술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문에 여러분과 인간적인 교류를 할 기회가 없었죠. 저도 길드에 지원을 나온 것이 처음이 아닌 터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반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처음부터 미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할 일을 마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죠.

앞으로 저희 피스&호프는 외부에서 기술적, 경제적인 지원만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지원금은 대여금 형식으로 지급되고, 서비스에 대한 인센티브도 받을 예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사업적인 파트너십이 유지되는 것뿐이니, 항간의 소문대로 미르가 사라지고 피스&호프만 남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유진은 작게 숨을 삼켰다. 제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방금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을 포함해 기존 멤버들이 걱정했던 것은 모두 쓸데없는 기우였던 셈이다.

부길드장은 계속 말했다. 이번에는 시선을 유진에게 향했다.

“제가 임시적으로 맡았던 부길드장직은 기존 멤버이자, 오랜 시간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해 왔던 김유진 씨에게 양도하려고 합니다. 물론 당분간은 지금처럼 제가 임시로 직함을 갖고 있을 예정이지만요.”

옆에 앉아 있던 현아가 유진의 팔을 툭 쳤다.

“너 알고 있었어?”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갑자기 자신에게 부길드장을 양도하겠다니.

이미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매우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얼굴을 보니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미르는 기존 멤버들에게 나름의 애착이 있는 길드이다. 피치 못하게 떠나는 게 아니라면 가능한 한 남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눈엣가시 같던 파견 멤버들도 곧 떠난다고 하니 거슬릴 게 더 이상 없어진다는 뜻 아닌가?

유진은 위화감을 느꼈다.

제니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입에서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