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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35화 (13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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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35화

    대충 둘러댔지만 누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가 나에 대해 특별히 걱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혼수상태로 십 년 동안이나 병원에 누워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이번과 같은 일을 더 자주 겪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생각해서라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곁에서 늘 보는 것보다 떨어져 살면 며칠 보이지 않아도 걱정을 덜 할 테니까.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게임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에 노트북을 켰다.

    하지만 게임을 실행시키기도 전에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마주해야 했다.

    [비어 있던 72위 군주 자리를 미리스가 차지했습니다.]

    [72위 군주와 대결을 하는 시점은 유저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차원문의 열쇠’ ×1을 얻었습니다.]

    ‘정말 쉴 틈을 안 주네.’

    나는 미리스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라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이계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수보타에게 물어보기 위해 여태 꺼져 있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켜자마자 바쁘게 알림음이 울리는 게 열흘 동안 얼마나 많은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왔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인터뷰 섭외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필요 없는 수신 목록을 제하고 보니, 노아와 유진이에게 온 연락이 남았다.

    노아가 연락한 것은 공사 진행 상황과 사업 진행 정도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내가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만 간추려서 메시지를 보냈다.

    반면 유진이에게는 꽤 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초반 이틀 정도에 집중된 걸 보니, 그 뒤로는 누나나 어머니에게 연락해 사정을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다음번에 이계로 가게 될 때는 그녀에게도 나름의 핑계를 대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락을 한번 해주기는 해야겠는데?’

    유진이와 친구 사이이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연락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잦은 부재중 전화를 건 것을 보면 뭔가 긴히 할 얘기가 있지 않나 여겨졌다.

    나는 수보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한 것은 아니고 티코이를 통해 연락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티코이를 제외한 다른 파티원들은 아직 핸드폰이 없다. 딱히 필요하다고 하는 멤버가 없으니 지금껏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나는 혹시 모르는 상황이 있을지도 모르니 파티원들에게도 핸드폰을 하나씩은 지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티코이는 전화를 받아 수보타를 바꿔주었다.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를 찾으셨다고요?”

    수보타가 반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 혹시 미리스가 누군지 알아? 비어 있던 72위 군주 자리를 차지했다는데?”

    “미리스요?”

    수보타는 생각을 더듬는 듯 잠시 조용하더니 오래지 않아 대답했다.

    “아! 미리스라면 주인님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라돈의 딸 이름이 바로 미리스입니다.”

    “그래?”

    나는 아라돈의 양옆에 있었던 두 명의 이계인을 떠올렸다. 한 명은 남자고 다른 한 명은 여자였다.

    생김새가 아버지와 닮아서 금방 아라돈의 자녀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

    둘에게 받은 인상을 되새겨 보았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남자아이보다 여자 쪽에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아라돈의 딸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군주 자리를 차지했을 리는 없다.

    자발적으로 군주가 되었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시켜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아버지인 아라돈이나 로치온이 그녀를 군주로 즉위시킨 것이겠지.

    누구의 작품이건 나는 미리스를 72위 군주 자리에 앉힌 것이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누군가가 차지해야 할 자리라면 같은 편이 앉는 것이 좋으니까.

    72위 군주 자리를 노릴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미연에 막은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동맹 군주가 늘었다는 점도 중요하지.’

    어차피 같은 편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아라돈의 딸인 것과 군주로서의 동맹은 의미가 다르다.

    나는 빨리 미리스를 만나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68위 군주인 베루니가 같은 편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하니까.

    베루니에게 들은 바로 그의 영지는 로치온, 아리돈이 차지하고 있는 영지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카오스 군주의 땅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베루니가 직접 연락을 하는 것보다 내가 미리스에게 알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터였다.

    나는 차원문을 열기 전에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로치온에게 큰코다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미리스를 만나면서까지 대비를 단단히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졌다.

    로치온이 내게 싸움을 건 것은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미리스가 내게 무기를 들이댈 이유는 전혀 없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나는 실력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다.

    나는 동그랗게 말린 양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암젤에게 말했다.

    “같이 갈래?”

    “어딜 말이냐옹? 설마 MT?”

    나는 MT가 뭐지 생각하다가 그것이 곧 숙박업소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놀고 있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

    내 말에 암젤이 양말을 툭 차버리고 옆으로 왔다.

    “농담이다옹.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옹?”

    나는 내 방에서 차원의 문을 열었다.

    단단히 잠긴 커다란 문을 열쇠로 열고,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길을 통과해 결투의 탑에 도착했다.

    72위 군주를 만나기 위한 장소는 당연히 1층이었다. 시스템도 오늘 만남의 목적이 대결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인지, 복잡한 메시지는 내보내지 않았다.

    번쩍-!

    대기 시간이 끝나자 한 줄기 굵은 빛이 떨어졌다.

    로치온 때와 마찬가지로 나타난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융통성이 있어서 좋네.’

    미리스는 여성치고 큰 키에 근육질의 몸, 그리고 그 몸 여기저기에 개성적인 검은 문신이 새겨진 외양을 갖고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나를 발견한 뒤, 금방 사정을 깨달았다.

    “오랜만입니다.”

    “응, 오랜만이야.”

    아버지인 아라돈과 같은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이기에 그녀에게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반면 그녀는 나를 존중이 담긴 태도로 대했다.

    대화가 길 필요는 없었다. 둘 다 이곳에서 마주한 이유를 잘 알고 있으니까.

    “군주 자리에는 어떻게 오르게 된 거지?”

    “로치온 님이 권유하셨습니다. 아직 여러모로 실력이 부족한데, 이 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걱정이 됩니다.”

    “로치온이 호락호락한 타입은 아니잖아. 자기 나름대로 판단이 섰으니 네게 그 자리를 맡긴 거겠지. 부담 같은 건 갖지 마.”

    “네…….”

    짧은 대화를 마친 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동맹이 될 거지?”

    “당연합니다. 조성오 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72위 군주 미리스와 동맹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오늘 대면 목적은 달성했다. 나는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했다.

    “68위 군주 베루니도 우리와 한 편이 됐어.”

    “베루니요……?”

    미리스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만다툼이 패한 모양이군요.”

    “응.”

    “정말 잘됐네요! 아버지와 로치온 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리스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 역시 공간 한복판에 열린 차원의 문을 통해 방으로 돌아왔다.

    4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잠을 잔 덕에 밤을 새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내 일상 자체가 게임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내가 잠들어 있던 십 년 사이에 게임도 눈부신 발전을 해서 그래픽이 놀랍도록 실감났다.

    물론 현재 대세는 가상현실 게임이지만 아직 거부감이 남아서 플레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떠야 했다.

    “대체 누구야?”

    원래는 그냥 핸드폰을 꺼버릴 생각이었지만 발신자 이름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김유진.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한 번은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 유진아.”

    “어디 갔었니? 왜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됐어?”

    “미안해. 일 때문에…….”

    “실험 핑계라면 댈 생각도 하지 마. 던전 안에서 열흘간이나 실험한다는 처음 들어보니까.”

    나는 나중에 이계로 갈 때 유진이에게 댈 핑계를 생각하려면 꽤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일 있니? 전화를 많이 했던데.”

    “응, 너한테 상의하고 싶은 일이 좀 있어서…….”

    “상의할 일?”

    “오늘 시간 되니? 만나서 이야기할까?”

    “그래. 근데 내가 지금 잠을 자던 중이라서, 저녁 때 만나자.”

    “좋아. 몇 시에 데리러 갈까?”

    “응?”

    나는 유진이가 아직 내가 차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리러 올 필요 없어. 나도 면허 땄거든.”

    “그래? 자동차도 있어? 뭔데?”

    “부가티.”

    “우와, 큰맘 먹고 샀나 보구나. 그 차 비싸지?”

    “선물 받았어.”

    “뭐? ……하긴 노아 같은 사람이랑 친구니까, 선물을 받아도 스케일이 다르네.”

    5

    부웅-

    부가티의 거칠고도 안정적인 엔진음을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 숱하게 소환수의 등에 올라타 대륙을 누빈 경험이 있지만,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를 직접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운전면허 학원에서 도로주행을 할 때는 썩 기분이 나지 않았지만, 노아가 선물한 부가티를 모는 것은 학원 고물차를 운전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첫 차가 부가티라니, 조금은 평범하지 않으려나.’

    대단한 부자가 아니고는 면허를 따고 곧바로 슈퍼카를 구입하진 않을 것이다. 아직은 초보 운전 딱지가 붙어 있으니까, 감당이 안 된다고 보는 편이 맞다.

    나 역시 적당한 국산 자동차를 생각했으니까.

    가만히 따져 보면 나도 통장에 수백억이 있는 부자인데, 아직 그것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현실 경험이 열 살에서 멈추고, 곧바로 게임 안에 갇혔기 때문에 돈에 대한 개념이 일반인들과 다른 거겠지.

    돈이라는 생각보다도 차라리 포인트를 버는 느낌에 가깝다.

    도로 위를 달리자 옆의 자동차들이 자연스럽게 거리를 띄웠다.

    유리창을 내리고 내 자동차를 흘긋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들은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시선을 보내고, 여자들의 시선에는 선망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비싼 차를 모는 것만으로 보는 눈이 달라지다니,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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