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독식왕 : 클리어러 133화
‘백 개의 창!’
꽈앙!
백여 개로 갈라진 창끝이 만다툼을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으악!”
싸움을 더 길게 끌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 공격은 이전보다 한층 강력하고 인정사정없어졌다.
만다툼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게 소리쳤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베루니에게 붙는 것보다 내게 협력하는 것이 훨씬 이득일 텐데!”
“너한테 붙어봤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68위 군주 주제에. 그것도 얍삽하게 뺏어서 차지했으면서.”
“뭐?”
만다툼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계에서 왔다는 자가 이곳의 사정을 그렇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뭐야? 이놈은?’
한순간 의구심에 빠진 게 잘못이었다.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사이에 하얀 파동이 시야를 덮었다.
‘엑스 자 파동!’
콰지직-!
만다툼은 서둘러 창으로 몸을 막았지만 그것은 허무하게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스킬은 무기를 부수는 데 끝나지 않고, 갑옷을 뚫고 들어가 가슴팍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끄악!”
나는 레벨 100이 넘고 웨펀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라 한층 강력해진 스킬의 위력을 몸소 체감했다.
점점 가상현실 게임에서 가지고 있던 강력함과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그때와 백 퍼센트 같지는 않다.
레벨이 오르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그때는 없었던 히든 클래스도 얻었다.
‘재밌다!’
나는 진성 게이머이기 때문에 십 년 동안 가상현실 게임을 하면서도 재미를 느낀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원치 않은 장소에 끌려 들어왔다는 불안감과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나 하는 간절함 때문에 백 퍼센트 그 재미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십 년의 고생은 내게 메리트가 되어 돌아왔다.
덕분에 이 게임의 구조를 쉽게 이해하고, 다른 게이머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진작 알려줬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날 각성시킨 이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만다툼은 벌어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였다. 그의 얼굴에는 근 수년간 느낄 필요가 없었던 공포의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목줄기를 향해 내리꽂히는 번뜩이는 창날이었다.
“안 돼! 그만둬! 으아악-!”
[특수 퀘스트 ‘2. 차원의 통로가 속한 영지의 카오스 군주를 물리쳐라’를 달성했습니다.]
[레벨 110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기존 클래스를 진화하거나 새로운 클래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마법사 클래스를 4서클로 진화시켰다.
주위를 둘러보자 싸움이 격렬하게 얽히고 있었다. 병력은 양측이 비슷했지만 사기 면에서는 달랐다.
만다툼 쪽 병사의 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나는 베루니에게 ‘전음’을 보냈다.
-만다툼이 죽었습니다.
베루니는 흠칫 놀라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나를 끌어올려 크게 소리쳤다.
“폭군 만다툼은 죽었다! 너희들은 이제 그를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 지난 날의 과오를 씻고 잘못을 뉘우치는 자는 무릎을 꿇어라! 이 순간만큼은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베루니의 외침은 전장의 모든 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만다툼의 병력은 과거 베루니 가문에 속해 있던 병력이 그대로 옮겨간 것이다.
힘이 없는 그들은 군주가 바뀌자 내키지 않아도 새로운 군주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과거 수만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일이기 때문에 고민하거나 한탄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베루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탓하기보다 포용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신이 새로운 군주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병력은 필요하다.
더구나 이곳의 대세인 카오스 군주가 아닌 오더 성향의 군주였으므로, 병력마저 보잘것없다면 입지가 더욱 불안해질 것이 뻔하다.
베루니의 외침을 들은 만다툼 측 병사는 모두 자기 무기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늘 전투욕이 끓어 넘치는 토누크들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그밖의 모든 이계인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어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함성이 언덕 전체를 뒤덮었다.
“와아~~~~!”
6
특수 퀘스트를 2단계까지 클리어한 나는 다음 단계의 퀘스트를 확인했다.
[특수 퀘스트 : C-001 던전에 생성된 ‘이계의 통로’를 완성하라.]
1. 차원의 통로 주변을 확보하라.(Clear)
2. 차원의 통로가 속한 영지의 카오스 군주를 물리쳐라.(Clear)
3. 차원의 통로가 속한 영지를 오더 성향의 군주가 차지하게 하고, 그와 동맹을 맺어라.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결과다. 퀘스트의 흐름 자체가 이대로 흘러왔으니까.
차원의 통로를 완성해 그것을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통로가 있는 영지 자체가 동맹의 소유여야 한다.
코어를 획득하여 그것의 영향을 받는 토누크족을 장악하게 한 것도 같은 취지일 터.
토누크 부락에서는 승리를 자축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당장 이동하기에는 병사들이나 영지인들의 피로도가 컸기 때문에 베루니는 다음 날 군주의 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토누크 부락에서 행해지는 파티는 괴상한 모양이었다. 몬스터와 이계인이 어우러진 파티였으니까.
그동안 서로에게 본능에 가까운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감정을 모두 떨쳐 버렸다.
나는 마지막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베루니를 찾아갔다.
병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던 베루니는 나를 발견하고 벌떡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성오!”
덩치가 커다란 그가 술 냄새를 확 풍기며 나를 끌어안았다.
“고맙소! 당신이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소!”
“하하, 네.”
한자리에 있던 병사들도 호기심과 존경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성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은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하지만 그들의 호감 어린 시선을 받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
이계로 나온 지 수일이 지나면서 나는 꽤 지쳐 있었다.
얼른 집에 가서 샤워하고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나머지 퀘스트를 해치워야 한다.
나는 내 등을 후려치다시피 토닥이고 있는 베루니를 밀어냈다.
“할 말이 있습니다. 함께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베루니는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으면서도 내 말에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우리는 함께 비어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뒤, 베루니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할 말이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
베루니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이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빨리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 가실 겁니까?”
“가능하면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은 제가 살던 곳이 아니라 지내기에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시겠죠.”
베루니의 표정과 말투에는 진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막연히 계속 이곳에 남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다시 생각하면 딱히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지금은 왕위쟁탈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군주와 갈등을 일으키거나 영지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나름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 전에 걱정되는 것 한 가지를 물었다.
“만다툼은 서열이 높은 카오스 군주와 동맹을 맺고 그에게 조공을 바쳐 왔다고 들었습니다. 만다툼이 죽었다는 얘길 들으면 동맹이었던 군주들이 이곳에 쳐들어오지 않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군주들은 대개 스스로의 가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만다툼이 혼자 세력을 다지는 데 불안해했던 이유도 자신의 가문에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군주들은 만다툼에게 큰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되레 무시를 안 당했으면 다행이죠. 만다툼을 위해 굳이 군사를 일으킬 군주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바쳐 왔던 조공은 문제가 될 수 있겠죠.
그 문제는 생각해 둔 방안이 있습니다. 만다툼이 차지했던 막대한 재산, 그리고 그에게 협력해 영지인들을 핍박했던 3대 가문의 재산을 몰수해 절반을 그 일을 무마하는 데 쓸 생각입니다.”
“나머지 절반은요?”
“영지인들에게 돌려주어야지요. 원래 그들의 것이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어설픈 점도 있지만 이곳의 일은 나보다는 베루니가 더 잘 알 테니까.
만다툼과 그에게 부역했던 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영지인들에게 돌려줄 거라는 말을 듣고, 나는 베루니가 선한 군주의 자질을 가졌다고 느꼈다. 의심할 바 없는 오더 성향의 군주인 것이다.
베루니가 내게 물었다.
“돌아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겁니까?”
선은 굵은 남자가 내뱉기에는 다소 부끄러운 멘트였지만 그의 눈에는 한없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그 문제를 말씀드리기 위해 얘기를 나누자고 한 것입니다.”
“네?”
“우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더욱 큰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더욱 큰일이라니……. 무엇을 말인가요?”
“이곳과 이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베루니는 혼자 생각을 더듬어 보더니 내게 말했다.
“아버지가 만다툼에게 군주 자리를 빼앗긴 뒤, 저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귀에도 믿지 못할 소문이 들려오기는 하더군요.
이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 군주들이 그곳으로 건너가길 갈망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 일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설마…….”
베루니는 의혹과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계인이 이곳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이곳의 사람들이 이계로 건너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 소문은 백 퍼센트 사실입니다. 카오스 군주들은 이곳에 만족하지 않고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장악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
베루니 역시 이계에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카오스 군주들의 끝없는 정복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복해야 할 미지의 땅이 있다면 침을 흘리고 탐내는 것이 당연할 터.
“조성오 씨는 그것을 막고 싶은 거군요.”
“네, 하지만 저 혼자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를 도와줄 동맹이 필요합니다.”
베루니는 내가 한 말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조성오 씨와 손을 잡고 만다툼과 싸우기로 한 시점에 우리는 이미 친구이자 동맹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둘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루니는 자기를 도운 이계인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직접 보았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카오스 군주 전체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우리 둘만이 아닙니다. 동맹은 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