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독식왕 : 클리어러 132화
만다툼의 병력은 대규모이다. 도저히 언덕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 공격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만다툼이 말의 고삐를 잡아채는 것을 보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으아아악!”
“끄아아악!”
병사들이 바위에 휩쓸려 함께 굴러가는 상황임에도 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지금 등을 돌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만다툼은 등에서 긴 창을 뽑아 들고 자기 앞에 굴러오는 바위를 후려쳤다.
꽝-!
레벨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힘 하나만큼은 수준급임을 알 수 있는 일격이었다.
만다툼이 정신을 수습하고 소리쳤다.
“머뭇거리지 말고 진격하라!”
그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현명한 지휘관이라면 병력을 일자로 늘어서게 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세세한 지시는 없었다.
그저 병력을 이끌고 무식하게 꾸역꾸역 올라왔다.
“키긱! 킥!”
시아이가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언덕 양쪽 계곡 위에 포진하고 있던 토누크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궁병이었다.
언덕 아래로 비처럼 화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같은 전술에 당했던 전력이 있는지라 이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고 있었다.
설마 하니 나처럼 ‘점프’ 스킬을 사용해서 계곡 위로 올라오는 놈은 없겠지.
만다툼의 병력이 언덕을 올라오는 속도가 더뎌졌다.
바위에 밀려 내려가는 병사의 수가 더 늘어나고 화살을 맞아 숨지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대규모의 병력인지라 조금씩 숫자가 줄어드는 데도 위용의 변화는 미미했다.
이 전술만으로 이 많은 병력을 전부 상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준비된 바위의 수에도 한계가 있고, 계곡 위의 궁병들이 쏘는 화살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만다툼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병력을 한데 모았다.
방패병들이나 방어 스킬을 구사할 줄 아는 마법사들에게 지시해 머리 위를 방어하게 했다. 그리고 전방에는 힘이 센 병사들을 내세웠다.
이 포진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을 소진시키고, 굴러오는 바위는 전방의 병사들에게 처리하게 할 속셈인 것.
“아주 바보는 아니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미리 대기시켜 둔 열 대의 투석기가 있었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투석기로 가서 검은 공예술을 발동시켰다.
[검은 공예품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입니다.]
[숨결을 불어넣으시겠습니까?]
“그래.”
내게서 빠져나간 검은 숨결이 투석기에 스며들었다. 곧 그것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가동되었다.
덜컹.
티코이가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게 개조를 한 덕분에 투석기는 보다 세밀하게 이동이 가능해졌고, 조준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첫 번째로 숨결을 불어넣은 투석기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연이어서 두 대, 세 대 째의 투석기에까지 숨결을 불어넣자, 몸 안에 있는 마나가 바닥나 현기증이 일어났다.
‘세 대가 한계구나…….’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시고 작업을 계속했다. 마나 포션 세 병을 마시고 나서야 열 대 전부를 검은 공예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투석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본 토누크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놀랍고 경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은 이계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시스템상으로 ‘검은 공예술사’는 히든 클래스에 속하는 직업이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이계의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곳에도 검은 공예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걸 떠나 이런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열 대의 투석기를 모두 내보내고 나서 나도 밖으로 나갔다. 내 뒤를 이어 파티원들도 따라 나왔다.
투석기는 모두 언덕을 향해 선 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에 명령을 내렸다.
“저놈들을 공격해라!”
내가 가리킨 방향은 물론 만다툼의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궁병들이 쏟아내는 화살의 수가 점차 줄어들자 천천히 다시 언덕 위로 올라오려는 참이었다.
탄환이 장착된 투석기가 적을 향해 돌덩이를 쏘아 올렸다.
펑! 퍼엉-!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덩이는 정확하게 만다툼 병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앙! 쾅!
화살이라면 얼마든지 방패와 마법으로 막아낼 수 있다. 하디만 투석기로 쏘아 올린 돌덩이는 아니었다.
“끄악!”
“으아악!”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만다툼 병사가 줄어드는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만다툼은 당황하여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흩어져라!”
한데 모여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그 와중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병사와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바위에 희생되는 병사도 있었다.
만다툼이 병력을 흩어지게 만든 것은 당연히 한곳에 몰려 있다가는 투석기로 입은 피해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검은 공예술로 생명을 얻은 투석기들은 알아서 타깃을 쫓아 탄환을 날려댔다. 이동이 정밀해지고 발사 속도가 향상된 터라 흩어지는 병사들을 매우 정확하게 타격했다.
쿵! 콰앙!
“끄아아악!”
“으아악!”
이러다가는 언덕 위에서 전 병력이 몰살당할 형편이었다.
만다툼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곧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명령을 내렸다.
“진격해라!”
마나를 써서 터뜨린 일갈이었지만 워낙 어지러운 상황이라 그의 명령을 제대로 들은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오십여 명에 이르는 정예 병력만은 그의 옆에 몰려와 군주와 함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들 웬만큼 수준을 갖춘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화살이나 투석기에 압도되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망루에서 내려와 내 오른편에 서 있는 시아이와 왼쪽에 서 있는 베루니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곧바로 내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다. 물론 실제 결과는 가장 긍정적으로 예측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긍정적이었지만.
나는 투석기의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파티원들과 함께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와아아아!”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만다툼의 병력이 절반 이상 무너진 것을 보고 토누크는 물론 베루니의 병사들도 사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
나는 만다툼을 향해서만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퀘스트의 목적은 차원의 통로가 속한 영지의 카오스 군주를 물리치는 것.
베루니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게 하는 것도 좋은 시나리오지만, 내 손으로 직접 카오스 군주를 물리치지 않으면 퀘스트의 달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만다툼은 정신없이 창을 휘두르다가 자신을 향해 달려 내려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단순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고, 남자를 둘러싼 대단한 아우라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군주급의 실력을 지닌 자는 이계에도 많지 않다. 물론 군주가 되는 일이 백퍼센트 무력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군주가 되어 실력자들을 거느리려면 그들보다 강하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만다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검을 들고 달려 내려오는 이 앳된 얼굴의 남자가 자신이나 베루니에 비해 결코 실력이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삼단 베기!’
채채챙!
나는 내 스킬을 막아내는 감각으로 만다툼의 능력을 가늠했다. 역시나 힘이 대단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민첩성은 꽤 떨어져 보였다.
세 번의 검격을 겨우 막아내며 주춤거리는 것을 보면.
나는 이어서 다른 종류의 스킬을 떨어뜨렸다.
‘파이어 볼트!’
화르륵!
마법 사용 방어구를 입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위력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공격은 애초에 만다툼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히히힝!”
만다툼이 탄 말이 깜짝 놀라 앞다리를 들었다. 만다툼은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다가 내가 또 한 번 떨어뜨린 스킬에 결국 낙마를 하고 말았다.
‘라이트닝 볼트!’
꽈르릉-!
만다툼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비록 현재의 군주 자리는 기회를 노려 빼앗은 것에 불과하지만, 만다툼은 본래 눈치가 없거나 머리회전이 느린 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인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계에서 온 남자. 이 정도면 대답이 되려나?”
“뭐?”
만다툼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대부분 이계로 건너가는 일에 쏠려 있었다. 그 때문에 이계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군주들이 대리인을 찾아 이계로 건너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어도, 이계의 인간이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만다툼은 상대의 검격을 막는 일에 집중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 남자가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지금 자신이 처한 믿기 힘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렇게 믿는 쪽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놈이 베루니를 돕는 거지?’
만만치 않은 상대와 무기를 부딪치며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결국 자기 좋을 대로 상황을 해석했다.
어떤 경로로 이계인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베루니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가장 먼저 만난 실력자가 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계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알고 베루니가 꾀어낸 것에 불과할 터.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군주도 아닌 자의 편을 들어 굳이 힘든 싸움을 자초할 리가 없다.
만다툼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내 말을 들어봐라! 이계인.”
나는 만다툼이 하려는 말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비슷한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이 싸움도 어느 정도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고, 마무리의 여흥을 크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무슨 말을 하나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얘기해.”
“네가 베루니의 편을 든 것은 이곳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베루니는 여기서 보잘것없는 존재야. 당장 이곳의 영지도 모두 내가 다스리는 땅이지. 너는 베루니가 아닌 나를 도와야 해. 그래야 더 쉽게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만다툼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 어렵지 않은 결정이지. 당장 내 옆으로 와서 베루니와 멍청한 몬스터들을 몰살시켜 버리자.”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만다툼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생긴 것대로 창의력이 부족하군. 악당들의 발상은 게임이나 현실이나 어쩌면 다 그렇게 한결 같냐?”
나는 무기를 바꾸었다. 코리우스의 검에서 히루도의 창으로.
그리고 잠시 멈춰 있었던 공격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