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독식왕 : 클리어러 131화
부락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름의 갈등이 있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자 불만을 토로하는 영지인은 사라졌다.
몬스터 부락 안에 들어오게 된 자체가 심리적인 위축을 자아냈고, 이곳이 요새로서 모양을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겉으로 대놓고 탄복하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들 마음속으로 느꼈다.
자신들이 머물러 있던 마을보다 이곳이 훨씬 더 잘 짜여 있다는 사실을.
만약 만다툼이 없었다고 해도 등 뒤에 이토록 정연한 몬스터 부락이 있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지인은 토누크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왔더니, 마을을 정비해 둔 수준이 결코 하등하다고 무시하기 어려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만다툼이라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이들과 손을 잡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할 만했다.
최우선으로 병사를 제외한 민간인들을 부락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켰다.
병사들은 병종에 따라 나누어 일단 한곳에 배치시켜 장시간 행군에 따른 피로를 회복하도록 했다.
영지인의 분류, 이동 작업이 마무리되자 베루니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토누크 부락이 이렇게 잘 갖추어져 있는지는 미처 몰랐소. 그저 언젠가는 토벌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잘 모르고 싸웠다가 큰코다칠 뻔했소.”
“과거의 원한은 가능한 한 잊어버리십시오. 영지인들이 토누크에게 약탈당한 것은 지울 수 없는 일이겠지만, 원한이 있는 것은 토누크족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생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 만약 당신과 만나기 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살다 보니 이런 일을 다 겪는군요.”
그때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보고를 했다.
“만다툼이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희가 있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뭐라고?”
베루니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반면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토누크 부락을 정비하는 일이 더 늦어졌다면, 그리고 베루니와 그의 신민들이 이곳에 합류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솔직히 연이은 강행군으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였지만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잘됐군요.”
나는 굳은 얼굴의 베루니에게 말했다. 당장은 갈등을 무마하고 영지인들을 토누크 부락에 밀어 넣는 데 성공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불만은 또 언제든 불거질 수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빨리 공동의 적이 나타나 준 것이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싸움은 늦든 빠르든 어쨌거나 벌어질 일이니까.
베루니는 잠시 생각한 뒤에 내 말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우리가 만다툼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시오?”
“물론입니다. 오늘 또 한 번 역사가 바뀌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베루니는 내 말에 크게 용기를 얻은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계인.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 신비감이 무형의 기운을 북돋았다.
나는 마인드 리더로 본 베루니의 감정 상태에 부끄러운 표현이 떠올라 있음을 확인했다.
[신뢰]
[용기]
‘하아…….’
남자가 날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대상이 누가 되었든 간에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나는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했다.
“가시죠. 병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방어 준비를 합시다.”
나는 시아이에게 싸움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파티원들을 불러들여 성문 앞에 모았다.
베루니는 시아이와 타협하여 병사들의 최종 배치를 수정했다. 베루니 역시 이곳에서 살아온 기간이 길기 때문인지 토누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어쩌면 군주의 아들로 태어난 몸이라서 영재교육을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토누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계인 병사들의 사기도 나쁘지 않았다.
만약 마을에 있는 채로 만다툼의 공격을 맞닥뜨렸다면 훨씬 더 불안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토누크 부족과 연합한 뒤 병력이 세 배 이상 불어나고, 단단한 요새까지 얻게 되었다.
이계인 병사 모두의 마음속에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는 자신이 움텄다.
4
만다툼은 말에 올라 거만하게 토누크 부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의 진군 목적은 애초에 베루니를 비롯한 반란민을 소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발견되었다는 코어를 얻는 것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은 그 와중에 얻을 일종의 여흥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베루니가 자리를 잡았다는 마을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남아 있었다.
급하게 이곳을 떠난 것 같은 흔적.
그들의 경로를 추적하던 부하에게 이해가 안 가는 말을 들었다.
“이동 흔적이 토누크 부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몇 시간 전 그곳으로 집단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만다툼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와중에 베루니가 몬스터 사냥에 나섰을 리는 없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지인들까지 전부 이끌고 몬스터 부락으로 갔을 리는 만무하다.
‘어떻게 된 거야?’
만다툼은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내 고민을 접었다. 생각해서 답이 나올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놈들이 토누크 부락으로 갔을 리는 없다. 다른 길로 샜을 것이 틀림없으니 더 확실하게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해라!”
만다툼에게 보고한 부하 역시 당연히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혈질인 군주에게 보고하기 전에 여러 번 다시 확인을 했다.
베루니와 그의 신민들이 향한 곳은 백퍼센트 토누크 부락이 확실했지만 그 사실을 군주 앞에서 우길 수는 없었다.
만다툼을 이해시키기 전에 자기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 뻔하다.
“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만다툼은 가슴 안에 찜찜함이 남는 것을 느꼈다. 이계의 대리인을 찾는 것이 최우선인 상황에 일부러 직접 나섰더니, 시작부터 뭔가 꼬이는 느낌이 든다.
그는 세력이 보잘것없더라도 베루니라는 인물 자체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일대일로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까지 그를 살려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초장부터 죽였다면 영지인들의 마음이 한꺼번에 돌아섰을 테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지인들이 없으면 영지 자체가 존속이 되지 않는 법이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 터를 잡아온 영지라고 하더라도 계속 이곳에서 지낼 동기가 사라진다면 다른 영지로 이동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지의 번영은 얼마나 많은 영지인들이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척도이다. 때문에 다른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들도 신민을 늘리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고작 68위 군주인 자신이 영지인을 빼앗겼다고 해서 다른 군주들과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됐다.
일단 베루니의 처리를 미뤄둔 채 자신의 힘을 키웠다.
서열 높은 군주와 동맹을 맺고, 영지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들을 포섭해 입지를 공고히 했다.
지금 시점이라면 베루니를 죽이는 일 따위 크게 신경 쓸 일이 못 된다.
오히려 그의 아래로 몰려든 반란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자신에게 여전히 불만을 갖고 있는 영지인들에게 확실한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
‘지들이 가 봤자 어디로 갔겠어?’
이 영지는 사위가 모두 카오스 군주들이 다스리는 땅으로 둘러싸여 있다.
영지인들이 개별적으로 그곳에 흘러드는 것은 상관이 없어도, 오더 성향을 지닌 군주의 후손이 카오스 군주의 땅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결국 지금 베루니가 갈 곳은 이 영지 내의 어딘가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자신이 진격해 온다는 것을 알고 도망을 친 거겠지.
만다툼은 머릿속에서 불쾌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베루니가 안 되면 토누크 부락이라도 실컷 짓밟아야지!’
대리인을 찾지 못해 쌓였던 스트레스가 베루니의 도망으로 배가되었다.
이 답답한 기분을 어딘가에는 발산해야만 한다.
코어가 있는 곳에는 몬스터들이 집단서식하고 있다. 코어를 얻어본 군주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 몬스터들이 마치 코어를 지키려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코어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전투가 일어난다.
만다툼은 자기가 탄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가 속도를 높이자, 병사들이 새까맣게 따라붙었다.
5
나는 부락의 입구에 있는 망루에 올라 언덕 저편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는 시아이와 토비가 서 있었다.
곧 무섭게 속도를 높이며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만다툼과 그의 병력이 시야에 들어왔다.
확실히 병력의 규모 면에서 보면 이쪽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더구나 질서 있게 달려오는 모습이 평소 훈련도 잘 이루어진 병사들인 듯했다.
“키긱! 킥!”
시아이가 내게 뭐라고 말을 했다. 토비가 빠르게 그 말을 통역했다.
“공격을 개시할 거냐고 묻습니다.”
“아니, 아직.”
나는 만다툼이 달려오는 모양새를 조금 더 살펴보았다. 머지않아 선두에서 달려오는 만다툼의 표정이 똑똑히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한 나는 가볍게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자신만만한 군주의 표정. 이 거리에서는 아직 정보창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68위 군주라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 전에 베루니의 아버지 베툴루 밑에 있던 자라는 사실로 미루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신이 나셨군.’
나는 거만하게 고삐를 쥐고 있는 만다툼의 모습에서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베루니가 마을을 비우고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가 향한 곳이 토누크 마을일 거라는 사실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마 그런 가능성은 추호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겠지.
만다툼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방심 없이 공격해 왔다면 승패가 어떻게 됐을지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거만한 낯짝을 보자니 방심을 해도 아주 크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만다툼이 병력을 이끌고 언덕의 3분의 2 지점까지 올라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옆에 있는 시아이와 토비는 매우 초조한 표정이었다.
“킥! 킥!”
시아이가 다급하게 말을 하고 토비가 통역했다.
“어떻게 하실 거냐고 하는데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전술이 효과를 보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응, 시작해.”
내 말을 시아이는 통역 없이 곧장 알아들었다. 그는 아래쪽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키긱! 키기긱!”
입구 안쪽에 있던 토누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언덕 위에 준비해 둔 커다란 바위들을 힘껏 밀어 아래로 굴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나는 같은 전술을 C급 던전 안에서 마주했던 적이 있다. 언덕을 앞에 둔 일방 통로에서 마주 굴러오는 바위를 보는 기분은 참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