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30화 (130/245)
  • # 130

    독식왕 : 클리어러 130화

    과거 공예술을 사용할 때 나는 주로 작은 물건들을 만들었다. 때문에 다른 이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공예술은 단순히 높은 손재주를 활용해 기능이 좋고, 세련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공예술사 클래스를 얻으면서 그 개념이 바뀌었다.

    내 손으로 만든 공예품에 직접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 전체를 혼자 해야 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특별히 그런 제약은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단순히 내 손을 거치는 것만으로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공예품이 되는 거라면. 이 기술의 외연은 훨씬 확장될 것이다.

    ‘가능하려나……?’

    일단 의심하는 마음부터 생겼다. 하지만 시도를 해본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나는 개량된 투석기를 앞에 두고 검은 공예술을 발동시켰다.

    잠시 뒤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가 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게 했다.

    [검은 공예술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공예품 ‘토누크 투석기+’에 숨결을 불어넣으시겠습니까?]

    “아니.”

    나는 당장은 투석기를 검은 공예품으로 만들지 않았다.

    검은 공예품으로 만들면 ‘사용 시간’이라는 일종의 수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전투가 시작되지 않은 지금 굳이 공예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토누크는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라서 방어벽을 구축하고 전투준비를 하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일처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즐긴다는 느낌이 든다.

    마을의 방어를 단단히 한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에는 일종의 기대심리마저 엿보였다.

    투석기를 개량하는 작업도 마쳤겠다, 휴식을 취하며 한숨 돌리려는 내게 토비가 달려왔다.

    “조성오 이계인님!”

    마음이 다급해서인지 이계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 것도 잊은 모양이다.

    “왜? 무슨 일 있어?”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실랑이?”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렸다.

    “베루니 님과 영지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토누크족들이 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면서 양측에 폭언이 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래?”

    나는 베루니에게도 그렇고, 시아이에게도 알아듣게 상황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 진영의 리더를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이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양측 사이에 새겨진 골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손을 잡으라고 해도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나는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폭언이 오가고 있다는 부락의 입구로 향했다.

    내가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토누크들은 경례를 하거나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은 자기네들의 리더인 토누크킹에게 보이는 것보다도 더 깍듯했다.

    나는 내가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던전 마스터가 던전 안의 몬스터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과연 부락의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고성이 오가는 것이 더 확실히 들렸다. 토누크 몇십 마리가 몰려 살기등등하게 킥킥거리는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내 뒤에 따라오고 있는 토비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토누크족이 사용하는 욕입니다. 워낙 거친 몬스터들이라서 통역하기가 좀 그런데요……. 그래도 알고 싶으십니까?”

    “아니, 됐어.”

    내가 입구 쪽으로 가자 그곳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시아이가 나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된 일이야?”

    토비를 통하지 않아도 무엇을 물은 지 짐작한 듯 시아이가 알아서 사정을 설명했다.

    말인즉슨 자기가 부족들에게 명령해 영지인들을 안으로 들이려고 했지만, 영지인 중 몇몇이 모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양측의 감정이 거칠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토비는 그 말을 통역하면서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들어 자주 토누크족과 저희 마을의 경계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재산을 약탈당하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해서 토누크 족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베루니 님의 명령으로 이곳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억지로 따라온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꺾고 여기까지 왔다고는 하지만 막상 코앞에서 토누크들을 보자 감정이 격해지고 만 것일 터.

    베루니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와 영지인들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다.

    토누크족과 손을 잡느니 차라리 만다툼과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는 내가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가자 방금 전까지 고성을 내지르고 있던 토누크들이 말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부락 입구 바깥쪽으로는 수백 명이나 되는 병사와 영지인이 까맣게 몰려 있었다.

    선봉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베루니.

    그의 얼굴에도 곤혹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가 나타난 뒤 토누크들이 얌전해진 것을 보고 베루니 측 이계인들은 크게 놀랐다.

    자기네와 모습이 크게 다를 게 없는 인간에게 토누크가 온순하게 구는 장면은 이제껏 상상도 못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때 영지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저자는 토누크와 한 통속일 것이 틀림없다! 우리를 속여 토누크 놈들의 소굴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것이 마치 기정사실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맞아! 나는 이제껏 몬스터가 인간에게 협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토누크에게 죽느니 차라리 만다툼과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겠다!”

    베루니는 영지인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이지만, 그들에게 대놓고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가 처한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비록 과거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군주 자리를 차지해 왔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대까지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정식 군주가 되어본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다.

    자기 아래로 과거 아버지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이 모인 일차적인 이유는 만다툼의 폭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보다 더한 일을 치러야 할 상황이 된다면–가령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이 결속이 유지될 리 만무하다.

    만약 베루니가 군주라면 강제로라도 입을 다물게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토비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앞장서서 소리 지르고 있는 남자는 누구지?”

    “영지 4대 귀족 가문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가주입니다. 나머지 세 가문은 만다툼에게 빌붙어 살아남았지만 본인은 그것을 거부해 핍박을 받았었죠. 베루니 님 아래 들어온 뒤에도 여전히 귀족이라는 자긍심이 높아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편입니다.”

    “그래?”

    남자의 태도가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의 의도나 심성 자체가 불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설득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나가서 목청을 높여 영지인들에게 말했다.

    “토누크와 연합한다는 것이 불만인 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내 말에 가장 적극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몇 명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 안에는 4대 귀족 가문의 가주라는 자도 섞여 있었다.

    불만을 가진 자 중 다수는 여전히 인파 속에 숨어 있었다. 섣불리 나갔다가는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 나오면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나, 나중에 딴소리를 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영지인 대부분은 나를 보는 것이 처음이다. 베루니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겠지만 내가 토누크족들 틈에서 등장한 것만으로 거부감을 느낄 자가 많았다.

    그것은 반대로 일종의 아우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함부로 대들 수 없는 비범한 자라는 아우라.

    앞으로 나서는 영지인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그 수는 대략 마흔 명 정도였다.

    마인드 리더를 사용하면 더 많이 색출해 낼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자기 불만을 행동에 옮길 정도의 적극성을 띤 인물이라면 두 번의 기회가 있을 때 앞으로 나왔을 테니까.

    베루니가 내게 다가왔다.

    “조성오, 무슨 일이오? 진짜 저들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시간이 없는 만큼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뿐입니다.”

    베루니는 의혹에 찬 얼굴이었지만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온 마흔 명이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놈아! 네가 뭔데 우리더러 나오라 마라 명령이냐?”

    “애초에 네가 이계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솔직히 불어라! 네놈 만다툼의 하수인이지?”

    거친 시선이 베루니에게까지 향했지만 차마 그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NPC를 비롯한 파티원들이 아직 부락 안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마흔 명 앞으로 양손을 들고 걸어갔다.

    영지인들은 내 동작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내가 굳이 손을 들어 보인 것은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사십여 명의 시선이 내게 모인 것을 확인하고 스킬을 사용했다.

    ‘기억 삭제!’

    시간이 정지되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억을 삭제할 대상과 삭제할 기억의 종류를 지정하십시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이들이 나와 토누크에 품고 있는 반감을 지워줘.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호감을 채워 넣어줘.”

    앞으로 나와 있는 영지인들 사이로 수십 가닥의 빛이 솟구쳤다. 그것은 한동안 영지인들 사이를 휘감고 돌았다.

    [43명의 기억을 각 24시간 분량만큼 삭제했습니다.]

    나는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현기증 때문에 살짝 비틀거렸다.

    앞으로 나와 있던 43명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한계인 24시간만큼 기억이 삭제된 것을 보면 토누크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덕분에 그만큼 호감을 많이 채워 넣는 것도 가능했지만.

    베루니는 자세한 것은 몰라도 내가 영지인들을 상대로 스킬을 걸었다는 것만은 이해했다.

    나는 놀란 얼굴의 그에게 말했다.

    “감정을 조금 억눌렀을 뿐입니다. 부작용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그보다 지금 명령을 내려 부락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 알겠소.”

    베루니는 어쨌든 내 말을 잘 따랐다. 의심하려면 끝이 없겠지만 일단 믿기로 결정한 이상 끝까지 믿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겪으면 겪을수록 그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베루니는 병사들과 영지인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부락 안으로 들어가시오. 토누크와 손을 잡는 것이 불만인 자들은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말리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영지인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베루니는 이제껏 자신들에게 설득조로만 이야기를 했었다.

    강한 그의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도 있었지만, 곧 놀라운 장면을 목도해야 했다.

    가장 강하게 반대하던 이들이 앞장서서 부락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왈가왈부 딴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모든 영지인이 홀린 듯이 토누크의 부락 안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