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독식왕 : 클리어러 129화
나는 베루니가 매우 단순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의심을 해보아도 될 만한 상황인데도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니.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기는 할 것이다.
“맞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보니 준비가 매우 부족한 것 같더군요. 만다툼과의 병력 차이는 얼마나 됩니까?”
“흠…….”
베루니는 겸연쩍은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생사를 함께해야 할 사이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생사를 함께해야 할 사이라는 말에 베루니의 표정이 바뀌었다. 역시 이런 표현에 약한 마초적인 성격일 거라는 예상이 맞았다.
“만다툼이 가진 병력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소. 아직 제대로 조직이 정비되지 않아 실제 전력은 그보다 더 떨어지겠지.”
나는 이미 예상한 답변이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면 일단 병력부터 늘려야겠군요.”
“병력을 늘린다고요? 방법이 있소?”
나는 기대심이 어린 베루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방법이 있기는 하지.’
퀘스트 2단계가 만다툼을 물리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베루니와 연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점에 이미 방법을 구상했다.
그것을 눈앞에 있는 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토누크족과 연합을 하는 겁니다.”
“네?”
베루니의 표정은 놀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순히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말해주었다.
“토누크족과 힘을 합치는 것이 병력을 늘리는 가장 쉽고 빠른 길입니다.”
“뭐요?”
이제야 베루니의 얼굴에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몬스터와 힘을 합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카오스 군주 중 상당수는 마수를 길들여 병력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수들은 길들일 수 있는 종류의 몬스터들이다. 가축처럼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시간을 들이면 명령을 따르게 만들 수 있는 특정한 타입의 몬스터들.
그런 몬스터들 중에 토누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되레 일정 수준의 지능을 갖추고 저네들끼리 무리 생활을 하며, 교묘하게 영지인들을 약탈하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골치가 두 배로 아픈 이유는 앞에는 만다툼의 영지가 맞닿아 있고, 뒤로는 토누크의 군락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추호도 토누크가 아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상식을 파괴하는 발상이니까.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베루니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입니까?”
베루니의 얼굴에 또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의혹과 호기심.
토누크와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일이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이자도 마찬가지로 상식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이다.
무엇보다 처음 겪는 이계인이니까.
베루니는 턱을 매만지며 한참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가능한 일이오?”
“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지금 토누크족의 우두머리는 시아이라는 자입니다. 그는 이미 저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죠. 못 믿겠다면 토비를 불러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흠…….”
베루니는 어조를 바꾸었다.
“토누크 부락의 규모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병력을 합친다고 해도 만다툼 부대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병사들과 토누크족이 잘 규합할 수 있을지 보장이 없습니다. 가뜩이나 규율이 잡혀 있지 않은 상황에 더 큰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죠.”
“일리가 있는 말씀이지만 다른 측면도 고려를 해야 합니다. 제가 상대한 토누크는 생각보다 훨씬 영리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락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요? 그곳은 이미 완벽한 요새가 되어 있습니다.
토비가 길안내를 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심층부를 타격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방어하는 쪽의 병력은 공격하는 쪽보다 적어도 괜찮다고 하지요. 거기다 적절한 전술만 따라준다면 충분히 승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참…….”
베루니는 원래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평소라면 토누크족과 어떻게 연합이 가능할지 꼼꼼히 따져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인 상황.
나는 베루니가 마지막 결정을 앞두고 고민한다는 것을 알고 쐐기를 박았다.
“당신을 따르는 영지인들을 생각하십시오. 싸움에서 지면 당신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3
베루니와 대화를 마친 나는 방을 나왔다. 파티원들은 같은 건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식사를 하고, 또다시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피곤한 하루다옹.”
“미안한데 피곤한 건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암젤이 한마디 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이런 식의 스케줄은 우리에게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베루니에게 병사들과 영지인들을 데리고 토누크 부락으로 오라고 이야기를 해두었다.
어차피 이 마을에서 만다툼의 병력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방어벽이 허술한 데다가 입지도 너무 열려 있으니까.
그보다는 토누크 부락 쪽으로 유인해서 싸우는 편이 훨씬 나았다.
돌개 보드를 타고 마을을 떠나면서 토비도 다시 무리에 합류시켰다. 토누크를 상대로 복잡한 대화를 나누려면 통역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부락에 도착하자 토누크 병사들이 알아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마치 내가 던전 마스터인 던전에 들어갔을 때 몬스터들이 보이는 태도와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시아이가 달려왔다. 새로운 일인자가 되어서인지 태도가 훨씬 늠름해 보였다.
토비의 통역을 통해 나는 현재 상황을 알렸다. 시아이 또한 영지인들과 연합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게 얽매여 있는 영향력이 커서인지 베루니보다는 훨씬 쉽게 받아들였다.
“킥! 키긱! 키기긱!”
그는 나름의 의견을 개진했다.
토비의 통해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비록 전에 우두머리를 맡았던 토누크킹보다 레벨은 떨어질지라도 나는 시아이가 머리가 매우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리더의 자질로서는 무력보다 지력이 더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시아이의 의견대로 입구로 이어지는 언덕 쪽 방어를 두껍게 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형상 이곳 말고는 부락에 들어올 수 있는 다른 루트가 없다.
다만 나와 파티원들이 몰래 들어온 숲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으로는 대규모 병력이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루트를 택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고려해서 이곳에도 일부 병력을 위치시키기로 했다.
내가 특별히 개입하지 않아도 작업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직 죽인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몬스터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토누크킹.
애꾸눈에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과거의 토누크족 우두머리를 검은 소환수로 만들기로 했다.
소환술을 발동시키자 놈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나를 발견했다.
원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인지, 한 번 졌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냅다 공격을 해오려고 했다.
하지만.
콰가가각-!
그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검은 소용돌이가 피어올랐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소용돌이가 피부를 찢고 근육을 갈라놓았다. 피바람에 가려 소용돌이 안의 몬스터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지나가고, 소용돌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커다란 골격을 그대로 내보이는 애꾸눈 소환수 한 마리만 남았다.
“크르르르…….”
훨씬 온순해진 표정으로 조용히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토누크킹을 소환수로 만들며 사용한 슬롯은 네 개였다.
슬롯 자체의 수가 늘어나지는 않지만 내 레벨이 오를수록 소환수로 만들 때 소모되는 슬롯의 개수가 적어진다.
당장 사용할 일은 없으니 소환수는 곧바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때 티코이가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응? 왜, 티코이.”
“이곳에서 방어를 하려면 장치를 개량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장치를 개량한다고?”
나는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곧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티코이가 관심을 보이는 토누크족의 장치라면 바로 투석기를 말하는 것일 터.
“그걸 개량할 수 있어?”
“네, 원리는 어차피 같으니까 조금만 손보면 훨씬 나은 성능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개량된 투석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당연히 방어를 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거기까지 말을 하고,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같이 할까? 그 작업.”
토누크 부락에는 총 열 대의 투석기가 있었다.
토누크들을 시켜 더 많은 투석기를 만들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차라리 티코이 말대로 있는 것을 개량하는 편이 더 효율적일 터.
티코이에게 물었다.
“이걸 어떻게 개량할 생각인데?”
“장전 속도를 향상시키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돌덩이를 날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높여 일발의 위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가능하죠. 좀 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면 위치를 바꿔가며 탄착점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 적용하기가 매우 까다로울 수 있다. 하지만 티코이는 이미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계산이 선 모습이었다.
투석기를 개량하는 일에 토누크들도 동원이 되었다. 토비의 통역을 거쳐 그들은 티코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나 역시 그들 틈에 껴서 같이 작업을 했다.
“주인님, 뭐 하러 직접 작업을 하시는 겁니까? 이 일은 저와 토누크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아니야.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그래.”
티코이의 의아함에도 나는 작업에 함께 참여해 투석기를 개량하는 일을 도왔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작업 자체에도 점점 능률이 올라 투석기를 개량하는 일은 한나절 가까이 지나 모두 완료되었다.
“후우…….”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훨씬 세련된 모양을 갖추게 된 투석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 작업에 직접 참여한 이유는 한 가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투석기 여기저기에 결정석을 박아 넣는 얼핏 쓸데없는 일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