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독식왕 : 클리어러 124화
일곱 명이 상점에 들어가니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 티코이와 수보타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상점이 작으니 교대로 이용하는 게 좋겠다.”
“네, 주인님.”
“천천히 용무 보고 오십시오.”
내가 여자와 남자 팀으로 나눈 것은 상점의 공간이 좁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면 갈아입어야 할 텐데 아무리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는 파티원 사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구분은 지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견지에서 보면 나도 남자이기는 하지만 내가 없으면 상점 자체가 활성화되지 않으니까.
여자 NPC들이 옷 갈아입는 모습은 이미 여러 번 보아서 별다른 감흥이…… 없지는 않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보다 현실에서 겪는 여자 NPC들은 더 특별한 느낌이 있었으니까.
풍부한 리액션이라든가, 채취라든가, 내게 드러내는 여러 가지 감정들은 그녀들이 NPC라는 사실을 깜빡 잊게 만들 때가 많았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그런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지만 만약 내가 파티원 한 명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때는 그 후폭풍이 상당히 거셀 것이다.
암젤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아린과 칼리타도 가끔 나를 부끄러운 시선으로 훔쳐볼 때가 있었다.
‘이 게임에 연애 시스템이 포함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연애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면 더더욱 상황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 판매대 앞으로 갔다.
여느 때처럼 칸칸이 상품이 진열된 창이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레벨 100을 달성한 뒤 첫 방문입니다.]
[상점의 정보가 갱신됩니다.]
[유저와 파티원의 현재 상태에 맞추어 상품의 종류와 수준이 재설정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시야가 밝은 빛으로 뒤덮였다.
화악!
하얀빛이 지나간 뒤에 상점 안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체적인 디자인이 천막에서 번듯한 가게 수준으로 탈바꿈하고 공간이 전의 두세 배는 될 정도로 넓어졌다.
좁다는 이유로 NPC 두 명을 밖에 두고 온 사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 ‘상점 업그레이드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50,000, GP +300,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105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오, 300,000GP!’
나는 상점 업그레이드 시스템이 매우 적절해 보였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여행지에 따라 상점의 규모가 달라지고 파는 물품의 종류도 바뀌곤 했으니까.
레벨 100이 될 때까지 상점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것은 되레 아주 늦었다고 볼 수 있었다.
곧이어 상품이 나열되는 공간에 이전과는 다른 모양의 창이 나타났다.
정사각형 모양의 세 개의 창에는 각각 [기본 도구]. [USER], [NPC]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방 깨달았다.
‘기본 도구’창을 터치하면 포션과 강화석을 비롯한 기본 아이템이 나타날 것이고, USER를 터치하면 내 전용 장비가, 그리고 NPC를 터치하면 NPC 전용 장비가 나타나겠지.
이 정도면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구성이다.
나는 일단 ‘기본 도구’와 ‘USER’창을 제쳐 두고, ‘NPC’창을 터치했다.
오늘 상점에 들른 가장 큰 이유가 파티원들의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내 무기와 방어구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NPC들의 장비는 솔직히 현재 레벨에 맞는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포션과 마나 포션을 사는 것 말고 GP를 최대한 아껴둔 이유가 여기 있었다.
GP가 충분히 모이면 한꺼번에 파티원들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나는 일단 NPC 전용 장비를 쓱 둘러보았다.
이 정도 가격이면 괜찮겠다 싶어 여자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장비를 골라봐.”
“와! 새옷을 사주는 거냐옹?”
“감사합니다! 주인님.”
“오빠! 아무 거나 골라도 돼?”
격하게 반응하는 NPC들과 달리 칼리타는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장비를 사주시는 겁니까? 주인님?”
“응, 내가 가진 GP로 사는 거긴 해도 어차피 함께 사냥해서 번 돈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마음에 드는 걸로 편하게 골라.”
“고맙습니다…….”
나는 말은 그렇게 하긴 했지만 상점에 과연 칼리타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칼리타는 NPC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가 파티원이 되면서 나타난 메시지에 ‘NPC에 준하는 존재가 된다’는 내용에 있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서 NPC들이 장비를 편하게 고를 수 있게 해주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명의 파티원들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장비 선택을 마쳤다.
암젤이 고른 것은 가죽옷에 망토, 그리고 챙이 넓은 모자와 장화가 한 세트인 의상이었다.
왠지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던 모 애니매이션이 떠올랐지만 본인은 매우 만족해했다.
“역시 100레벨을 넘겼더니 의상도 품격 있는 것이 나온다옹.”
구입을 마치자, 그녀는 인간형으로 변신해 재빨리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죽 옷은 민소매에 짧은 스커트로 이루어져 있어서 거기 장화까지 신자 묘하게 자극적인 모습이 되었다.
‘묘족 전용 의상이 다 그런 건지, 아니면 얘가 이런 것만 고르는 건지…….’
“흠흠.”
나는 암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아린이 선택한 장비를 보았다.
황금색 바디의 조그만 하프, 그리고 상하의가 분리된 핑크색 갑옷이었다.
구성은 이제까지와 다를 것이 없지만 갑옷의 견고함이라든지 화려함이 확실히 이제까지보다 업그레이드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하프를 가볍게 튕겨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주인님. 잘 쓰겠습니다.”
트레앙이 고른 것은 거대한 쌍날도끼와 체크무늬 가죽 옷이었다. 그녀의 의상은 언제나 꼬마였을 때는 귀엽고, 거인이 되었을 때는 터프한 느낌을 준다.
그녀가 도끼를 들고 방방 뛰었다.
“신난당! 이걸로 몬스터 머리통을 확 쪼개 버려야징!”
“…….”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칼리타가 고른 아이템이었다. 상점에는 역시 그녀 전용의 장비도 입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무기나 방어구가 아니라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빗 두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거면 돼?”
“네, 저는 몸집이 커질수록 털의 강도가 강해지기 때문에 다른 방어구가 필요치 않아요. 다만 이 목걸이와 빗은 매우 좋은 물건인 것 같습니다. 펜던트는 빙결 속성을 강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고, 이 빗으로 털을 정리하면 방어력이 상승한다고 하네요. 써본 적이 없는 물건이지만 아주 기대가 됩니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여자 파티원들 다음으로는 남자 파티원들이 쇼핑을 할 차례였다. 여자 파티원들이 상점을 나가고 교대로 티코이와 수보타가 들어왔다.
나는 지금까지 티코이에게 상점에서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다. 그것은 수보타도 마찬가지.
하지만 칼리타의 전용 장비가 입고된 것을 보면 이들에게 필요한 장비도 있지 않을까 여겨졌다.
“갖고 싶은 장비를 골라봐.”
수보타는 상점에 들어온 뒤 계속 두리번거렸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이곳이 작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요? 마법입니까?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 수보타 다시 한 번 감복했습니다요!”
“됐으니까 장비나 골라봐.”
“넵!”
진열장을 둘러보던 티코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이런 물건이 있었군요!”
“왜? 쓸 만한 게 있어?”
“네, 이 안경은 업그레이드할 대상이나 아이템의 재료를 빨리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티코이가 두 번째로 고른 것은 공구 상자였다.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안경을 바꿔 낀 티코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맞춘 것처럼 딱 맞네요.”
그는 다음으로 공구 상자를 열어보더니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는 보물 상자나 다름없는 물건입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잘 쓰겠습니다!”
“그래.”
나는 상점이 업그레이드되면서 별의별 아이템이 다 생겼다고 느꼈다. 이계로 나가기 전에 상점에 먼저 들른 것이 매우 잘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한 명은 시간이 지나도 진전이 없었다.
“음…… 흐음…….”
수보타는 턱을 매만지며 아이템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기만 할 뿐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다.
“왜 그래? 수보타.”
“제가 사용할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그는 곧 풀죽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뭐, 괜찮습니다. 제가 하는 역할은 몬스터들 시선을 끌고 샌드백처럼 두드려 맞는 것뿐이니까요. 그런 게 무슨 재주 측에나 든다고 장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체념 섞인 말이었지만 표정과 태도에는 역력한 실망감이 묻어났다.
나는 수보타가 정말 괜찮은 파티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집사 일에 만능이지, 어그로도 잘 끌지, 심지어 장비를 사주느라 GP를 쓸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다른 파티원들 장비를 모두 사주었는데 그에게만 아무것도 사주지 않는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어깨를 늘어뜨린 수보타에게 말했다.
“기다려 봐. 네가 쓸 말한 게 있는지 내가 직접 살펴볼 테니까.”
“괜찮습니다. 저 같은 것 때문에 주인님의 귀한 시간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내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는 ‘기본 도구’창으로 가서 그 안의 아이템들을 살폈다.
역시나 그곳에도 못 보던 아이템이 많이 늘었다.
페이지 몇 개를 넘긴 뒤에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아이템은 아니지만 보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딱이네.’
용기의 물약.
포션의 절반만 한 용기에 담긴 이 액체는 일정 시간 동안 용기를 끌어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딱히 쓸 일이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던 아이템이지만, 이 아이템의 용도는 두려운 싸움에 앞서 마음을 굳게 먹거나, 혹은 결사의 항전이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엄살쟁이 수보타에게는 딱 맞는 아이템인 셈.
‘용기의 물약’ 열 개를 사서 수보타에게 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주인님?”
“앞으로 몬스터 앞에 나설 때 이걸 마시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그렇습니까……?”
수보타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하지만 자기도 무언가를 얻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까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