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독식왕 : 클리어러 122화
[69위 군주 제락스를 물리쳤습니다.]
[결투의 탑 4층을 정복했습니다.]
메시지가 지나간 뒤 4층 공간 한복판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차원문이 열렸다.
이미 몇 번 통과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이곳에 오기 위해 열었던 차원문과 연결이 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결투의 탑에 오기 위해 열었던 문과 돌아가기 위해 열린 이 차원문이 한 쌍이라는 뜻이다.
제락스는 수보타의 말대로 매우 손쉬운 상대였다. 놈이 전력을 다해 싸움에 임했다면 모를 일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혼자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싸우길 포기하고 동맹을 제안해 왔다.
나는 이것이 제락스가 단순히 멍청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계에서는 아마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이쪽 세상을 집어삼키는 것이라면 그 시도가 아마 필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겠지.
자기들끼리 수십만 년 동안이나 서열을 정해 땅따먹기를 했던 놈들이니까, 새로 차지할 넓은 영지가 있는데 군침을 흘리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곳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확보한 군주는 또 하나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한데…….’
나는 이계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쪽 상황이 어느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면 대응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현재 동맹을 맺고 있는 아라돈과 로치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내가 군주를 하나하나 죽일 때마다 그쪽 세상에 미치는 반향도 커질 것이다.
지금이야 서열 맨 아래에서 이루어진 변화니까 반동이 크지 않다고 해도 계속 군주가 없어지는데 그 영향이 작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다음부터는 더 힘들어질 거라고 했지?’
나는 수보타는 흘긋 보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은 결투의 탑에서 가장 쉬운 싸움을 치렀지만 그와 별개로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묵직한 위기감을 느꼈다.
게이머의 본능이랄까?
나는 차원문을 응시했다.
뭐든 빨아들일 것 같은 불가사의한 구멍은 내가 사는 세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어도 이계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5
로치온은 아라돈의 두 자녀를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아루스, 싸움은 열정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은 들끓어도 머리는 항상 차갑게 유지해야 돼.”
“그게 가능한가요?”
아루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창을 휘두르면서도 의아한 눈으로 로치온을 올려다보았다.
“싸움이라는 것은 늘 불리함을 가정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상대보다 몇 수 앞서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대 역시 그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상대는 어떻게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이변이라는 것은 결국 그런 필사적인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지.
항상 차가움을 유지하고 기필코 이긴다는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반드시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열정만으로 머리가 가득차면 그 안에 생각이라는 걸 집어넣을 틈이 사라진다는 뜻이지.”
아루스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로치온은 결국 이런 말은 생사를 오가는 실전 속에서만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루스는 좋은 자질을 타고 났지만, 가문의 가치관 때문에 실전을 겪을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데리고 나가 몬스터 사냥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나하나 이끌어줄 시간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아루스의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미리스에게 향했다. 남매이지만 두 사람의 성정은 퍽 다르다.
누나인 미리스는 아버지에게 침착함과 냉정한 판단 능력을 함께 물려받았다. 그것은 단순히 동생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었다.
무력적인 면에서도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다만 방법이 완숙하지 않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던 잠재력이 자신의 지도를 받는 사이에 점점 자연스럽게 발현되고 있었다.
로치온은 성장에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루스는 차치하고, 미리스라면 이미 충분히 하나의 영지를 다스릴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현재는 72위 군주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다. 미리스가 그곳 영지를 관할하고 있지만 정식으로 군주의 인장을 승계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 평범한 상황이라면 시간을 두고 더욱 성숙하기를 기다리는 게 맞겠으나, 아군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키워야 하는 마당에 그녀의 군주 승계를 미룰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군주 자리가 72개인 것은 세계의 균형과도 연관된 일이다. 균형이 어그러지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붕괴가 일어나게 된다.
붕괴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도 왕의 역할이었다. 72위 군주 자리가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헤레디투스가 직접 이 일에 관여할 가능성이 커진다.
“미리스.”
“네?”
로치온의 부름에 미리스가 고개를 돌리는 찰나, 훈련장의 문이 열리더니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로치온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군주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라.”
“제락스의 영지를 감시하던 부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영지 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군주 제락스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다고…….”
로치온은 그 말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조성오, 제락스를 물리쳤구나.’
제락스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도감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가 자기 할 일을 했으니,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차례였다.
여전히 궁금한 얼굴로 자기를 보고 있는 미리스에게 말했다.
“제락스의 영지에 다녀오겠다. 나중에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자.”
6
제락스의 빈 영지를 차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웬만큼 규율과 실력이 갖추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로 침입하자 지휘계통이 상실된 제락스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길을 열어주기에 바빴다.
다소의 저항은 있었지만 그것을 잠재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치온이 누구보다 빨리 행동에 나선 이유는 비어 있는 영지를 다른 카오스 군주가 차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빠르게 성을 장악한 뒤 제락스의 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군주의 인장을 찾아냈다.
군주의 인장을 손에 들고 생각했다.
한 군주가 여러 개의 영지를 다스리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결국에는 누구든 내세워서 군주 자리에 앉혀야 한다.
‘찾아가야겠군.’
미리스는 몰라도 아루스를 군주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아라돈 가문이 세 개의 영지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도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쓸데없는 경계심을 자극할 수가 있다.
미리스를 군주로 만들 수 있는 이유도 그녀의 어머니 가문이 아라돈 가문 못지않은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라돈과 분리하여 어머니 쪽 혈통을 내세워 군주를 승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녀의 실력으로는 고작 72위 군주 자리에 오르는 것이 한계였다.
대륙은 넓고 군주급 능력을 가진 재인도 많이 있다.
로치온은 이백 년간 속세를 떠나 있으면서 많은 일을 겪고, 많은 인물을 만났다.
그중 적지 않은 이가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자신과 같은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최우선으로 생각한 인물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마법사 파얀스.’
지금까지 동맹 구성을 보면 체술과 무기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군주로만 채워져 있다.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동맹의 구성원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순순히 얘길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과거 그녀와의 사연을 생각하며 로치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의를 생각한다면 개인적인 관계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한다.
“음…….”
군주의 증표를 갈무리한 그는 방을 나섰다.
7
티코이는 파티원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같은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결투의 탑에서 돌아온 멤버들이 어떤 상태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목욕 후에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고, 요리할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
여전히 거실에 열려 있는 차원문 앞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문 안쪽이 일렁이더니 불쑥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서 오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여우 귀를 쫑긋거리며 기뻐하는 티코이를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혼자 남겨져서 파티원들을 기다리는 기분은 결코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포지션상 조력자의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는 그의 입장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멤버가 티코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우! 마카롱은 준비해 놨냐옹?”
암젤의 말에 뒤따라 나온 트레앙도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카롱! 마카롱!”
“트레앙, 목욕부터 하셔야죠.”
집사이자 어쩌다 보니 트레앙을 돌보는 역할까지 맡게 된 수보타가 말했다.
“우우…….”
트레앙은 방금 결투의 탑에 다녀와서 흥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수보타가 그녀의 빨개지는 볼을 보고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일단 하나만 드시고 이따 씻고 나와서 한 개 더 드세요. 식사해야 하니까 간식은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웅!”
트레앙이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과 식사까지 마친 나는 소파에 앉아 여유 있게 다음 퀘스트가 무엇인지 확인했다.
과자 한 개를 입에 집어넣고 퀘스트창을 연 나는 그곳에 나타난 단 한 개의 퀘스트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특수 퀘스트 : C-001 던전에 생성된 ‘이계의 통로’를 완성하라.]
‘뭐야, 이게?’
C-001 던전에 생성된 이계의 통로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물론 알고 있었다. 바로 칼리타가 발견했던 바위틈의 구멍을 일컫는 것.
그곳으로 이계인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 임시적으로 구멍을 메꾸어 둔 상태였다.
차라리 통로를 봉쇄하라든지, 아니면 통로로 진입한 이계인을 물리치라는 거면 이해하기 쉽겠는데, 통로를 완성하라는 건 무슨 뜻이야?
나는 더 자세한 정보를 열람하기 위해 퀘스트를 터치했다.
[특수 퀘스트 : C-001 던전에 생성된 ‘이계의 통로’를 완성하라.]
수락 기한 : 퀘스트 생성 시로부터 48시간.(퀘스트 열람 시 자동 수락)
기간 : 모든 관련 퀘스트를 완수할 때까지.
내용 : 이계로 넘어가 퀘스트를 수행하라. 모든 퀘스트를 완수하면 ‘이계의 통로’를 완성할 수 있다.
보상 : 경험치 100,000, GP 200,000
세부 정보를 보고 나서야 대충 이 퀘스트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이계의 통로를 발견하고 나타났던 메시지 중에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통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이계의 통로를 완성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음…….”
언제든 이계를 오갈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
이계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괜찮네.’
나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