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독식왕 : 클리어러 121화
코뿔소를 닮은 놈이 군주라는 사실을 안 것은 물론 놈의 정보창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름 : 제락스
레벨 : 82
스탯 : 근력 94/ 체력 72/ 민첩 70/ 행운 36
이력 : 오랜 세월 이계 군주 서열에서 69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락스 가문은 대대로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여왔다.
순위 변동이 잦은 왕위 쟁탈전 기간에도 꾸준히 같은 순위를 유지한 까닭은 자기네 영지를 지키는 것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행동은 평화와 안정을 중요시하는 성정에 기인한 바가 아니라, 대대로 숙명처럼 이어져 온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관 정도는 쉽게 바꿀 수도 있는 인물.
약점 : 두꺼운 피부에서 기인한 강력한 맷집이 강점으로 공격 능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다.
단거리 순간이동에 이은 몸통 박치기가 유일하게 경계할 만한 기술이지만 이 마저도 사용한 뒤에 커다란 빈틈을 노출하곤 한다.
나는 투시자의 눈이 굉장히 유용한 스킬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수보타의 말마따나 69위 군주 제락스는 크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내 수준에서는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인물.
일전에 대결의 탑에서 싸운 로치온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만약 로치온을 거치지 않고 이런 군주들을 계속해서 만났다면 정말 긴장감이 약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치온이 무턱대고 날 공격한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그에게 했던 말대로 언젠가는 싸움을 걸어 거만한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제락스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여느 때처럼 이계를 비추는 마법 거울을 통해 대리인을 찾던 그는 잠깐 숨을 돌리는 틈에 밝은 빛에 휩싸여 이곳으로 전송되었다.
넓은 방 안에 두 무리가 대치한 상태. 그리고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싸우라는 메시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능력을 가진 이에게 강제로 이곳에 옮겨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놈들이 그 일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대체…….’
동그란 눈알을 쉴 새 없이 굴려대던 그는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불현듯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의심이 많은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
혹시 자기 아래 순위의 군주 사이에 생긴 변고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로치온은 충분히 아메리오를 물리치고 그 성을 차지할 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었다.
자기처럼 절대 다른 영지를 침범하지 않고 전쟁을 멀리하기로 유명한 아라돈.
그가 슬라둠의 영지를 차지한 것은 그곳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 단순히 와전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슬라둠이 아라돈에게 영지를 빼앗기기 전에 그곳을 버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일이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할 수는 없다.
제락스는 자신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혹시, 혹시…….’
생각의 범위에 한계를 두지 않으니 상상력이 저절로 부풀려져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슬라둠과 아메리오가 죽은 것은 아라돈과 로치온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와서 저 이계인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닐까?’
자칫 비약이 심한 가정일 수 있지만, 실상 그것 말고는 갑자기 벌어진 여러 가지 일의 전말을 모조리 풀어낼 단서가 없었다.
‘젠장!’
제락스는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내가 이제껏 쓸데없는 걸 고민했던 거야?’
자신은 그저 바로 아래 순위를 차지한 로치온이 움직이지 않기를 바라고, 대리인을 찾아 빨리 이계로 진출할 수 있기만을 바랐는데 현실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싸움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한 적이 없는 그는 갑작스럽게 내몰린 결투 상황에 눈만 끔벅끔벅할 따름이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병사 이십여 명도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다.
그사이 돌격대인 트레앙과 칼리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왔다.
쿵! 쿵! 쿵!
거인이 된 트레앙이 붉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자 그 기세에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은색의 고운 털을 가진 여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지만 사나운 눈매가 저절로 심장을 오그라지게 만들었다.
“군주님! 명령을!”
병사 하나가 마지못해 군주를 재촉했다. 하지만 제락스는 입술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무리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병사가 군주를 대신해서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막아라!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워라!”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라는 것은 꽤 설득력이 있는 명령이었다. 적들의 흉흉한 기세에 맞서려면 적어도 그 정도 각오는 필요해 보였으니까.
갑주를 입은 방패병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곧이어 날아드는 공격.
꽝! 꽝!
트레앙과 칼리타의 공격은 마법으로 코팅된 방패마저 우그러뜨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들이 방패병들과 대치한 사이, 허공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올려다보자 사납고 거대한 맹수들이 방패 위를 훌쩍 뛰어 넘고 있었다.
“크릉!”
“크르르릉!”
방패를 잡은 병사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가장 안쪽에 포진한 예닐곱 명의 궁수가 암젤이 소환한 사자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퓩! 퓩! 퓩!
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공에 형성된 방어진에 막혀 꺾여 버렸다. 아린이 연주한 ‘방패의 곡’이 효력을 발휘한 것.
“크아앙!”
“크르릉!”
사자들이 무리 안으로 떨어지자 싸움의 양상은 금세 혼전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쏴라.”
나는 여유 있게 던전에서 소환한 토누크 궁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키익!”
“키이익!”
그들이 쏜 화살이 비처럼 날아가 상대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레벨이 낮지 않은 몬스터들이라 활을 쏘는 실력이 괜찮았다.
‘생각보다 더 쉬운데?’
나는 다른 것보다 상대 군주 놈이 아직까지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지금은 무조건 싸워야 할 상황인 데도 놈은 덩치가 아깝게 혼자 중얼대느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군주가 그 모양이니 병사들만 불쌍할 따름.
나는 마법을 사용하려 했던 처음의 생각을 버리고 의상을 소달루스 세트로 바꾸었다.
그 상태에서 새로 얻은 무기인 코리우스의 검을 꺼냈다.
청색 예기를 내뿜는 일직선의 날카로운 검.
꼭 웨펀마스터 클래스를 얻은 효과가 아닐지라도 가상현실 게임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검술의 기억이 몸 안의 세포를 밝게 깨우는 느낌이 들었다.
저절로 무기를 휘두르고 적을 베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는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다가 훌쩍 도약했다.
점퍼 세트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오른 것이지만 단번에 십여 미터를 가로지르는 것이 가능했다.
한 번 더 점프.
이번에는 처음 한 점프보다도 더욱 거리가 길었다. 나는 단숨에 NPC들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콰각!
내려친 검에 병사 한 놈의 어깨가 절단되었다.
“끄아악!”
새로 얻은 스킬들을 연속으로 사용했다.
‘삼단 베기!’
‘승월참!’
‘섀도 커터!’
삼단 베기와 승월참은 기본기에 가까운 스킬이지만 섀도 커터는 좀 특이한 기술이었다.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져 측면, 후면, 혹은 공중에서 나타나 빈틈을 노리는 기술.
기본기와 함께 사용하면 적을 혼란시키는 용도로도 효용이 크다.
“크아악!”
“으아아악!”
아군이 속절없이 쓰러져 가는 상황에서 제락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진 일방적인 싸움을 지켜보며 자기가 방금 내린 결론이 가장 현명한 것이리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가졌다.
싸움에 가세하는 대신 몸을 수그리고 뒤로 물러났다.
군주가 빠진 싸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락스의 정예들은 하나둘씩 목숨을 잃고 쓰러지고, 그들 중 몇 명은 자신들을 버린 군주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고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군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제거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결투는 군주를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제락스는 어깨를 움츠린 채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지?”
나는 귀찮은 생각이 드는 한편, 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제락스가 몸을 움찔 떨더니 대뜸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내게 말했다.
“귀인이시여! 제발 저를 당신의 부하로 거두어주시옵소서!”
제락스가 혼자 열심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슬라둠과 아메리오는 죽었는데 아라돈과 로치온은 살아남아 되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
그것은 분명 눈앞의 이 이계인에게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리라.
죽임을 당한 군주들과 더 크게 세력을 키우고 있는 두 군주.
목전에 펼쳐진 상황만 두고 보아도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어쩌면 이는 엄청난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군주들이 이계 진출에만 관심을 둔 상황이니까.
지금이라면 빈틈을 노려 세력 확장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년 69위 군주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단순히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더 높이 도약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라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로치온과 이 정체불명의 이계인이 자신의 편이 되어준다면.
머릿속에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
‘위기가 곧 기회라더니!’
포기하지 않고 살길을 모색했더니 그 이상의 길이 열린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못생긴 군주를 내려다보았다.
혼자 머리를 막 굴리더니 고작 내린다는 결론이 항복이었다니.
이놈 때문에 죽은 병사들이 새삼 불쌍해졌다.
[69위 군주 제락스가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시스템이 군주의 태도 변화를 인식한 모양이지만, 나는 놈의 소망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카오스 군주와는 동맹을 할 수 없습니다. 결투가 속행됩니다.]
이어진 메시지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코리우스의 검을 움켜쥐고 놈의 머리통을 향해 떨어뜨렸다.
“자, 잠깐만! 어째서! 아라돈은 되고 나는 안 되……!”
“시끄러!”
“끄아아악!”
맷집이 단단한 놈이라 한 번에 죽일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르게 NPC들이 제락스를 죽이는 일에 합세했다.
코뿔소를 닮은 군주의 비명이 결투의 탑 4층 안에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