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독식왕 : 클리어러 117화
“응, 게이먼.”
전화를 한 것은 사업 쪽 일을 담당하고 있는 루카스 게이먼이라는 부하였다. 그 역시 피스&호프에서 데리고 나온 인물 중 하나이다.
게이머는 아니지만 업무에 관한 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업이라는 게 꼭 사람이 많아야 잘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부길드장님, 급히 알려드릴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급히? 무슨 일인데?”
노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이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피스&호프 한국 지부장 미셸.
하지만 게이먼이 연락한 것은 그녀 때문이 아니었다.
“아부다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술탄 빈 칼리파가 길드장님과 부길드장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군요. 바로 한국에 올 의향이 있답니다.”
“술탄 빈 칼리파?”
노아는 깜짝 놀랐다.
“설마 아부다비 석유 산업의 그 칼리파?”
“네, 맞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칼리파가 왜 우리를?’
술탄 빈 칼리파는 거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가진 재산은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랍에미리트 사업 재단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자이니까.
노아는 대답했다.
“당장은 바쁜 일정이 없으니까 그쪽이 원하는 날짜에 약속을 잡아줘.”
“알겠습니다, 부길드장님.”
전화를 끊고 나서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칼리파는 관련 업계에서는 유명하다 못해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공식 석상에는 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스포츠 구단을 몇 개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들 모두 대리인을 내세워 운영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가 베일에 싸여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집안의 분쟁 때문에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미성년자 신분으로 후계자가 된 것.
국제 정서상 성인이 될 때까지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대리인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단히 바쁘다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마도 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사전 조율 없이 갑자기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다.
노아는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3
나는 노아의 연락을 받고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다. 한창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노아는 물론 티코이도 오늘 약속은 꼭 나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다름 아닌 전에 추그니다킹 뿔을 대량 예약했던 중동의 거부를 만나는 약속이란다.
그에게는 고마움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고마움은 그가 없었더라면 PHASE 1의 ‘부’ 퀘스트를 달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고, 미안함은 갑자기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나오게 되면서 선주문 했던 추그니다킹 뿔 계약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티코이의 말로는 그가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라는 했다. 인맥으로 알아두면 결코 손해 볼 것이 없을 거라나.
그와 연결이 되면 아랍의 많은 거부와도 저절로 연결이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솔직히 이런 약속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이 컸지만, 사업에 관한 한은 노아와 티코이의 말을 듣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메인 퀘스트 중 하나가 돈과 연관이 있는 만큼 사업도 소홀히 여길 수만은 없었다.
호텔 복도에는 정장을 입은 아랍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한 명이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확인을 하더니 정중하게 인사하고 안내를 했다.
나는 투시자의 눈으로 복도에 있는 자들이 꽤 수준 높은 게이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아와 티코이의 말을 듣는 것보다 이 광경을 보고 오늘 만날 인물이 얼마만큼 대단한 사람인지 느꼈다.
호텔 룸에 들어가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노아와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방 안에도 정장을 입은 아랍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두 사람에게 떨어져서 정중한 자세로 서 있었다.
게이머는 아닌 것으로 보아 경호원보다는 중동 거부의 비서쯤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성오 씨! 어서 와요!”
노아가 밝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인물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통 의상을 입은 그를 보고 나는 멈칫했다.
생각보다도 매우 어려 보였기 때문. 중동의 거부라기에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을 상상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술탄 빈 칼리파입니다.”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
칼리파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기에 예의상 한마디를 했다.
“지난번 일은 미안했습니다. 갑자기 카오스 게이머 닷컴 쪽과 문제가 생겨서 상점을 철수해야 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한국어로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라는 것도 곧 깨달았다.
테이블 위에 처음 보는 장치가 놓여 있었다. 붉은 센서가 깜박이는 그 기기가 동시 통역되는 지금의 상황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두 분이 길드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너무 반가워서 저도 어떻게든 두 분 사이에 끼고 싶었거든요.”
“네?”
나는 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아는 내 생각을 알아채고 얘기했다.
“성오 씨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눴어요. 칼리파는 게이머계의 동향과 아이템 시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사업 방향과 목적을 듣고 자신도 꿈꾸던 일이었다고 말했어요.”
“아…….”
나는 솔직히 그 이야기가 반갑지 않았다. 노아와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이 이상 모르는 사람을 개입시킨다는 것이 결코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사업은 부수적인 부분일 뿐.
어디까지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고 이계의 군주와 싸우는 일이다.
이런 비밀이 노출될 우려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노아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물론 칼리파 회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사업에는 파트너는커녕 투자자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요.”
노아가 말을 하는 동안 칼리파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손꼽히는 거부에 세계 재계를 흔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데, 역시 행동은 아직 어린 구석이 있어 보였다.
나는 모르긴 해도 칼리파가 고집을 피우면 어떤 형태로든 그를 사업에 참여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진하게 수긍하고 시무룩해 하는 것이 꽤 흥미로워 보였다.
‘나쁜 애 같지는 않네.’
노아가 계속 말했다.
“파트너나 투자자 형태로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방법이 꼭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네요.”
“그럼 뭐가 있지요?”
칼리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의 첫 번째 VIP 고객이 되시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첫 번째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 시스템을 정식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회장님께는 우리가 출시할 상품 정보를 우선 제공해 드리고, 원하신다면 일정 수량을 먼저 구입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처음에는 회장님이 왜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몰랐는데 카오스 게이머 닷컴 때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이트를 운영했던 사람으로서 그 인연을 가치 없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적인 이유보다도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
칼리파가 아이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가 내 손을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제의를 한 것은 노아인데 내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뭔가 생각하더니 불쑥 말했다.
“그런 호의를 아무 대가 없이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친구들께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제가 금전적인 대가를 드리면 어떨까요?”
노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우정의 증표로 드린다고 했는데 돈을 받으면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그때 뒤에서 잠자코 서 있던 아랍인이 말을 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그래야 저희 칼리파 님께서도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칼리파는 비서인 수하일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들 앞에서 돈 자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공짜로 VIP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노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고급 안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칼리파가 주도했는데, 게이머와 아이템에 대한 내용이 이야기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나머지 10퍼센트는 그가 운영하고 있는 축구 구단에 대한 이야기였다.
‘돈 많이 벌어서 추구 구단 하나 가지면 재밌겠네.’
칼리파와 같이 있다 보니 경제 관념이 약해져서인지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반쯤 억지로 나온 자리이지만 뜻밖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4
던전에 나가기 위해 아침에 일어난 나는 양치질을 하다가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았다.
[메인 퀘스트 [부] - 4. ‘100억 벌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보상 상자(유니크급 장비 제한)를 얻었습니다.]
“응?”
너무 뜬금없어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 허겁지겁 핸드폰으로 통장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오늘 아침 무려 300억의 돈이 입금되었다.
보낸 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어서 티코이에게 전화를 했다.
“네, 주인님.”
“나한테 300억이 입금됐는데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어. 네가 좀 알아봐 줄래?”
“알겠습니다.”
양치질과 세수를 끝냈을 때 티코이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아부다비 재단에서 보낸 돈입니다. 예전에 저희에게 입금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내졌습니다.”
돈이 입금된 통장은 티코이가 만들어준 비밀 계좌이다. 던전 관리소에서 만든 통장을 암거래에 쓸 수 없어서 추가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이 돈을 누가 보낸 것인지 깨달았다. 칼리파가 어제 VIP 고객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다고 했는데, 바로 그 돈을 보내준 것일 터.
나는 왜 나한테 돈을 보낸 것인지 이해가 안 됐다. 사업 쪽은 노아가 전담하고 있는데.
해서 노아에게도 연락을 해보았다.
“역시 성오 씨한테도 보냈군요. 저도 같은 금액을 받았습니다. 역시나 부자라서 그런지 통이 크네요.”
이무리 부자여도 600억은 통이 큰 정도로는 납득하기 힘든 액수다. 어제 분명 돈 자랑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어제 그가 소유한 축구 구단 얘기를 들어보니 구단주가 바뀌고 거부 구단으로 거듭난 바로 그 구단이었다.
구단주가 하도 돈을 펑펑 써 대서 이적 시장에 거품이 끼었다고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로써 메인 퀘스트 하나가 더 달성됐으니 내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