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독식왕 : 클리어러 107화
이러든 저러든 무조건 로치온이라는 군주를 만나야 된다는 거지?
차원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충분히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결투의 탑에서 패배를 한다는 건 곧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테니까.
내 고민은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이한호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
“잘 지냈어요, 형?”
“응, 갑자기 미안한데 우리 만나자.”
“오늘요?”
“사실은 내가 아니라 그쪽 사람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해서.”
이한호가 말하는 그쪽 사람이란 아라돈을 일컫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라돈이 로치온에 대한 정보를 주려는 것임을 알았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만나서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2
한호를 만난 곳은 예의 그 다방식 카페였다. 여러 번 오다 보니 이곳 분위기에 꽤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한 잔에 천오백 원이라는 커피 가격이 참 마음에 든다.
한호는 먼저 나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형.”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오랜만이군.”
“아…….”
바뀌려면 예고나 하고 바뀔 것이지.
“잘 있었어요? 아라돈.”
“덕분에 잘 있었네. 인사가 늦었네만 아메리오를 처치해 줘서 고맙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아라돈은 자기 앞에 있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곳의 차는 참 달군. 독특한 풍미가 있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믹스 커피 몇 박스를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시간이 좀 있나요? 그때보다 여유 있어 보이는데?”
“이 친구가 나를 받아들여 주기로 해서 큰 문제는 없다네. 다만 아직은 적응기라 한 번 접속하면 꽤 오랫동안 대기를 해야 해.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 모양인데, 참 부끄럽군.”
“뭘요. 이제부터 열심히 강해지면 되죠.”
아라돈은 잠시 동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네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강해졌군.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이걸 얘기하려면 아주 긴 설명을 해야 해요. 그럴 시간은 없지 않나요?”
“그래. 이유보다는 강해진다는 자체가 더 중요하지. 내가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건 한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서네.”
“혹시 그 사람이 지금 막 70위 군주가 된 로치온인가요?”
“응? 알고 있었나?”
“네, 저도 그에 대해 궁금하던 참입니다.”
“잘됐군.”
아라돈은 내게 로치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수보타에게 들어 아는 것도 있고 새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최근의 이야기는 당연히 전혀 새로운 내용이었다.
“로치온이 70위 군주가 되기로 한 게 저와 만나기 위해서라고요?”
“그렇네. 그는 자네와 만나기를 대단히 고대하고 있어.”
“혹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일단은 호기심 때문이겠지. 자네가 이쪽 세상에 만들어낸 변화가 무척 크지 않은가? 두 번째는 호감이라고 생각하네.”
“호감이요?”
“호감은 때론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끼리도 생길 수 있는 거지. 자네 덕분에 로치온은 자신의 꿈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네. 자넬 본다면 아마 감사를 표할 지도 모르지.”
“음…….”
아라돈의 말을 들은 결과 나는 로치온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나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데, 설마 하니 못된 생각을 가지고 만나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라돈과 사이가 돈독한 것도 긍정적으로 볼 문제였다. 비록 서열은 낮아도 아라돈은 오더 성향의 가치관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와 가까운 사이라면 로치온도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더 성향이 강한 군주일 확률이 높았다.
‘동맹자 추가 확정이네.’
나는 마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3
아라돈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당장 로치온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졌고, 무엇보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PHASE 4 메인 퀘스트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열쇠를 꺼내는 것을 보고 암젤이 다가왔다.
“그건 성에 가는 열쇠 아니냐옹?”
“응,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서.”
“싸우러 가는 거 아니냐옹? 다른 멤버는 안 불러도 되냐옹?”
“가서 동맹을 맺고 오려는 거야. 걱정할 거 없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너도 집에 있어.”
“안 된다옹! 주인님만 혼자만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다옹!”
“그래, 그럼 따라오든지.”
수보타가 로치온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던 게 생각났지만 뭐 나중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까.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암젤과 둘이서 차원문을 통과해 결투의 탑으로 갔다.
심지어 나는 옷도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나를 그렇게 만나 보고 싶어 하는데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나 역시 로치온을 만나 보고 싶었다. 수보타도 그렇고 아라돈도 그를 괜찮은 인물로 평가했으니까.
우리는 귀환서를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결투의 탑 3층에 입장했습니다.]
[군주 서열 70위 ‘로치온’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오 분의 대기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결투가 시작됩니다.]
메시지는 대결이 성사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잠재적 동맹자를 만나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이런 자리에 작정하고 전투 의욕을 불태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오 분이 지나자 맞은편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꽈르릉!
그리고 등장한 한 명의 군주.
신장이 2미터는 됨직한 건장한 남자였다. 검은색의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날이 시퍼런 창을 들고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얼굴에 착용한 가면이었다.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절로 무시무시한 아우라가 뿜어 나왔다.
“당신이 조성오인가?”
남성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음성이기도 했다. 나는 가면 안의 얼굴도 분명 대단한 훈남일 거라고 짐작했다.
“당신이 로치온?”
“음…….”
로치온은 가벼운 신음성만 내뱉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가면 안에 얼굴을 숨기고 있어서 표정이 어떨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암젤이 내게 말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냐옹?”
“괜찮아. 혼자 왔잖아. 갑옷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 입고 있던 거겠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상대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틀렸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갑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뭐하러? 아라돈에게 듣기로 당신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거 하던데. 그……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한테 고마워할 것도 있다고 하고.”
“아라돈이 전달을 잘못했군.”
“응?”
“왜 갑주를 착용하지 않았지? 이곳은 결투의 탑이 아닌가? 아니면, 그 옷을 입고도 나를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
나 역시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싸우다니? 당신이랑 내가?”
“그렇다. 달리 또 누가 있지?”
“이곳의 이름이 결투의 탑이라고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어. 보기보다 순진하네.”
“순진하다라…….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퍼엉-
로치온이 갑옷 밖으로 자신의 마기를 뿜어냈다.
쿠구궁!
단순히 마나를 운용한 것만으로 공간이 흔들린 것은 처음 보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이 자식, 설마 진심이야?’
나는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달루스!”
반팔티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던 내 옷이 한마디 지시어로 소달루스 방어구로 바뀌었다.
“호오…… 그런 식으로 갑옷을 착용할 수 있는 거였군. 과연, 갑옷을 입었으니 이제 싸우자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잠깐!”
스윽-
로치온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에 이미 내 머리 위로 거대한 창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급히 옆으로 몸을 굴려 그것을 피했다.
콰앙-!
단순히 물리적 충격이 아니라 마나가 이용한 공격이라 그야말로 바닥이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재빨리 히루도의 창을 꺼냈다. 파괴신의 룬을 장착한 뒤 더욱 강력해진 무기.
로치온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순한 가면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살인귀의 형상처럼 소름끼쳐 보였다.
스윽-
이번에도 마치 바닥에 미끄러지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내게 접근했다.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공포심 때문에 나는 곧바로 S급 스킬을 사용했다.
‘백 개의 창!’
꽈과과광-!
날카로운 창끝이 백여 개로 갈라지며 적을 덮친다.
카가강-!
‘뭐지?’
나는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거의 딜레이 없이 사용한 스킬인데 그것을 하나하나 모두 막아낸다.
피하거나 쉴드를 만들어 방어한 것이 아니라 자기 창을 움직여 S급 스킬을 튕겨냈다.
그리고 찔러오는 백한 개째의 창.
콱!
“으윽!”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창끝이 어깨를 베며 피가 튀었다.
“감히 주인님한테! 각오하라옹!”
화가 난 암젤이 소환수를 불러냈다.
“크아앙!”
덩치 큰 사자 두 마리가 나타나 로치온에게 달려갔다.
“호오.”
로치온은 가벼운 감탄사만 내뱉었을 뿐 전혀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틈에 또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모루돈!”
먼저 의상을 바꾼 뒤 소환수를 불러냈다.
“카리스! 세루피!”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검은 회오리가 피어오르고 그 안에서 검은 뼈를 지닌 두 마리 소환수가 나타났다.
화염을 뱉어내는 불새와 검과 방패로 무장한 스켈레톤 병사.
나머지는 모두 슬롯 해제해서 검은 공예품을 만드는 데 썼지만 만약을 위해 두 마리는 남겨놓았다.
“크르르르.”
“캬아악!”
두 마리 검은 소환수가 로치온을 에워쌀 동안, 나는 인벤토리에서 회복제를 꺼냈다.
포션과 마나 포션.
두 개를 차례로 마신 뒤 적을 바라보았다.
검은 소환수는 내가 직접 컨트롤하지 않으면 움직임의 활력이 떨어진다.
사자를 상대하고 있는 로치온은 여유가 넘쳤다.
긴 창을 그저 두 번 휘둘렀을 뿐인데, 사자들은 배가 꿰뚫려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펑! 펑!
“캬아악!”
나는 세루피를 조종해 불을 토해내게 했다.
화르륵-
로치온의 시야가 가려진 틈에 카리스를 돌격시켰다.
쾅! 쾅!
‘통하는 건가?’
나는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는 카리스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잠깐 동안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꽝-!
로치온이 스킬을 날리자마자 카리스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버렸다.
[완전히 파괴되어 소환수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카리스가 슬롯 해제되었습니다.]
불새의 운명도 스켈레톤 병사의 것과 같았다.
콰악-!
창에 꿰어지자마자 와르르 부서졌다.
[완전히 파괴되어 소환수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세루피가 슬롯 해제되었습니다.]
‘뭐야, 이게.’
내 표정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로치온의 정보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