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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06화 (106/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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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106화

    4

    “응?”

    아메리오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로치온의 스킬에 이미 몇 번은 쓸려 나갔을 법한 시간이 지났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인다. 자신의 옆에 십여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도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리번대는 중이었다.

    허공에 나타나는 문자.

    [이곳은 결투의 탑입니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나갈 수 없습니다.]

    “상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자 여러 명의 인간이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는 덩치 큰 거미형 마수도 보인다.

    선두에 서 있는 남자가 물었다.

    “네가 아메리오냐?”

    “너는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 들어봤자 곧 뒈질 테니까.”

    “뭐라?”

    군주인 자신에게 감히 이 따위로 말을 하다니.

    방금 전까지 죽음의 위기에 있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가슴에 불이 붙었다.

    “하나만 묻자. 아라돈은 어떻게 됐지?”

    “아라돈?”

    아메리오는 현재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어지러운 전장에 있었던 탓에 판단력이 더욱 흐려졌다.

    “어휴. 알았다, 알았어. 피곤한데 일단 죽이고 봐야지.”

    남자가 늘어놓는 말.

    저 어린 자식은 누군데 감히 나한테 저 따위로 말을 하는 거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상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맨 먼저 키가 큰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뛰어왔다.

    무식하게 휘두른 그녀의 주먹에 부하 두 명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어흥!”

    곧이어 무서운 맹수가 튀어나왔다.

    아메리오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로치온의 스킬에 목숨을 잃는 편이 차라리 더 나았을 거라는 사실을.

    5

    “다시 한 번 묻겠다. 아라돈은 어떻게 됐지?”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허우적거리는 아메리오에게 창을 겨누고 물었다.

    “어, 어떻게 됐냐니…… 그게 무슨 말…….”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 말해.”

    “그는 사, 살아 있다…….”

    “앙앙.”

    ‘파이어 볼트.’

    꽈르릉-!

    고작 3서클 마법이지만 지옥불의 화력으로 떨어진 파이어 볼트는 아메리오의 몸뚱이를 까맣게 태워 버렸다.

    [서열 70위 군주 아메리오를 처치했습니다.]

    [군주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50,000, GP +85,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92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쉽네.”

    아메리오의 레벨은 78에 불과했다. C급 던전을 공략하기 전이라면 몰라도 90레벨이 넘은 내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이곳에 전송된 순간부터 이미 패닉에 빠져 있어 상대하기가 더욱 수월했다.

    이놈의 말을 들으니 아라돈은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지 못해도 일단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피곤함이 어깨를 짓누른다.

    ‘얼른 집에 가서 자야지.’

    6

    전투가 끝났다. 처음에는 아라돈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뜻하지 않게 뒤집어져, 그는 거의 병력이 손실되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

    아라돈과 로치온은 조용한 방에서 독대를 했다.

    “다시 만나는 건 이백 년 만이군.”

    “그때는 말없이 떠나서 죄송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습니다.”

    “왜 이곳에 먼저 왔나? 복귀하려면 자네 땅으로 가는 게 순서 아닌가? 자네 동생이라면 분명 형에게 군주 자리를 내어줄 텐데.”

    “상황이 그때와 같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의 영지는 이미 헤레디투스의 직영지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꼭두각시 군주에 불과하죠.”

    “……그랬군. 자네도 마음이 괴롭겠어.”

    “모두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남았더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죠. 오히려 바깥에 있는 지금이 더 기회를 잡기 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아라돈은 반짝이는 로치온의 눈을 보고 내심 감탄을 했다.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고 성 안에만 박혀 있던 자신과는 생각 자체가 다른 인물이다.

    “설마 복수할 생각인가?”

    “네, 그것이 제 남은 삶 동안에 이루어야 할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을 텐데.”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은 엄연히 다릅니다.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기면서 침묵이 찾아왔다.

    아라돈은 자기 앞의 잔을 쳐들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무거운 얘기만 하고 있군. 자, 한 잔 드세나.”

    둘은 웃음을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아라돈이 말했다.

    “오늘 나는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 그래서 한 가지 생각한 게 있네만, 자네도 속세로 돌아왔으니 군주 자리 하나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아메리오의 영지를 자네가 다스리는 게 어떻겠나?”

    “아닙니다. 영지를 주신다면 차라리 슬라둠의 영지를 주시지요.”

    아라돈은 로치온이 고사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메리오가 자신보다 서열상 앞서기 때문.

    아버지와 동시대에 싸웠던 어른에 대한 예우이겠지만 군주 자리는 애초에 예의를 따져 나눠 갖는 것이 아니다.

    그는 로치온의 성격상 자신이 거듭 권유한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차라리 기회를 봐서 또 말을 꺼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로치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아메리오가 사라졌던 게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하하! 그것 말인가?”

    아라돈은 근래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로치온에게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비밀이지만 락시움의 아들인 로치온은 믿을 수 있었다.

    로치온의 동공이 크게 뜨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라네. 그게 아니라면 슬라둠과 아메리오가 갑자기 증발한 이유가 없지 않겠나? 나도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그런 장소가, 또 그런 인물이 있을 거라고 믿지 못했을 거네.”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기로 유명한 아라돈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로치온은 조성오라는 이계인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아라돈은 로치온의 표정을 살피고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본 사실에 의하면 결투의 탑이라는 곳에는 서열이 낮은 순서로 불려가는 것 같더군. 자네가 조성오를 만나보고 싶다면 아메리오의 영지를 차지하게.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리가 마련되지 않겠나?”

    “아…….”

    로치온은 아라돈이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7

    다음 날 로치온은 비어 있는 아메리오의 성에 들어갔다.

    군주의 상징인 인장을 찾아 그것을 손에 쥐고 선포했다.

    “나 로치온이 이곳의 새로운 군주가 될 지어니, 신하될 자들은 나에게 무릎을 꿇어라!”

    아메리오의 표식이 새겨져 있던 인장이 벗겨지고, 대신 로치온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새로운 군주를 뵈옵니다!”

    “영원히 군주를 섬기겠나이다!”

    남겨진 영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신민들이 혼란을 수습하고 자리를 잡았다.

    아메리오의 부덕함에 영지를 떠났던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울러 로치온이 복귀했다는 소식은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가 아메리오를 제거하고 새로운 군주로 등극했다는 소식.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헤레디투스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군주들이 이계에 관심을 둔 사이 착실히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있던 왕은 변방에서 들려온 반갑지 않은 소식에 미간을 찡그렸다.

    Chapter 32 - 새로운 동료

    1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이제야 몸 안에 남아 있던 피로감이 말끔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내 마시는데 대뜸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계 서열 70위 군주 자리를 ‘로치온’이 차지했습니다.]

    [이미 정복한 층에 들어온 군주는 도전자로 간주됩니다. 도전자와의 결투는 원하는 때 할 수 있습니다.]

    [‘차원문의 열쇠’ ×1을 얻었습니다.]

    “뭐라고?”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바로 어제 아메리오를 죽이고 결투의 탑 3층에서 승리했는데, 그 자리를 벌써 다른 군주가 차지했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결투의 탑이라기에 그냥 위층으로만 쭉 뚫고 올라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승리한 층에 다른 군주가 들어서는 일도 있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메인 퀘스트를 공략하는 것과 무관하게 도전자와는 언제든 싸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차원문의 열쇠를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로치온이라고?”

    당연히 이름을 보아봤자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내게는 이런 경우 의견을 물을 수 있는 NPC가 있다.

    식사를 한 뒤 티코이의 집으로 건너갔다.

    “로치온이라고요?”

    수보타가 반문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한참 생각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생각났습니다. 군주 락시움의 아들 이름이 분명 로치온이었습니다.”

    “락시움은 또 누구야?”

    “최근의 왕위 쟁탈전에서 꽤 선전을 했던 인물입니다. 매우 드물게도 오더 진영을 규합하여 헤레디투스와 격전을 벌였었죠.”

    “오더 군주라고?”

    “네, 역사상 단 한 번도 오더 군주가 왕이 된 적은 없습니다. 그 불문율이 이번에 깨질 뻔했더랬죠. 저는 물론 왕위 쟁탈전과 관련 없는 무능한 돼지를 섬기느라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듣기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해골 가면을 쓰고 나타날 때면 마치 전장에 죽음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았다고 하죠.”

    “유명한 사람이었나 보네? 그런데 왜 그 사람의 아들도 군주가 된 거지? 군주 자리는 대물림을 하는 거 아니야?”

    “거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락시움이 선전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은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죠. 그 일로 크게 상심한 아들 로치온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어디 보자…… 약 이백 년 전의 일입니다.”

    “얘기를 들으니까 더 모르겠는데?”

    “그렇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아들이니 저도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싶긴 하네요.”

    나는 수보타에게 들은 말을 정리해 보았다.

    아버지라는 인물이 그렇게 대단했다는 것을 보면 아들도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어쩌면 서열만 70위지 실력은 그것보다 훨씬 뛰어날 수도 있다.

    ‘오더 군주라는 말이지…….’

    무작정 싸워서 쓰러뜨려야 할 카오스 군주와는 다르게 오더 군주와 대면할 때는 한 가지 선택지가 더 발생한다.

    동맹을 맺는 것.

    하지만 그가 아직도 오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더 군주이기는 해도 동맹을 맺길 꺼린다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에휴.”

    나는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접고 PHASE 4 메인 퀘스트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러나.

    [70위 군주 로치온과 결투를 벌이기 전에는 메인 퀘스트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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