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독식왕 : 클리어러 100화
“허억. 허억.”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늘어뜨리고 한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사체가 되어 쓰러진 황철민에게 고정된 시선.
곧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민희야…….’
그동안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지만 그것을 이루고 나자 짙은 허무가 밀려들었다.
놈을 죽였지만 사랑하는 연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호는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오는 손을 보았다.
“형.”
“성오야.”
“여기서 끝이 아니잖아.”
그 말을 들은 한호의 동공에 빛이 돌아왔다.
나는 바닥에서 주운 두 개의 블러드 스톤을 한호에게 내밀었다.
변신형에 특화된 탓인지 나는 흡수할 수가 없는 스킬 스톤이었다. 만약 흡수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한호에게 양보할 생각이었지만.
한호는 양손으로 블러드 스톤을 받아들었다.
“황철민이 가지고 있던 스킬이야. 형한테는 딱 맞을 테니 걱정하지 마.”
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름대로 블러드 스톤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상성이 맞는 결정석을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철민이 남긴 스킬 스톤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굳히고 그것들을 꽉 움켜쥐었다.
양손에 들린 스킬 스톤에서 붉은색 기운이 뽑혀 나왔다. 그것은 가닥가닥 손등을 타고 올라와 피부에 스며들었다.
스으윽.
두 개의 블러드 스톤이 이내 쓸모없는 잿빛 돌덩이로 변했다.
한호는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에 들었던 한마디가 마음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자, 성오야.”
6
1층 세이브 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상황은 이미 정리된 후였다. 노아는 이번 싸움에 두 명의 동료를 붙여주었다.
카일과 캐미.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은 무뚝뚝한 얼굴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카일이라는 남자였다.
나는 처음 그의 정보창을 보았을 때 놀랐다. 레벨 135에 신체 강화, 웨펀형의 복합 능력자.
바닥에는 세 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다.
싸움이 끝난 지 좀 되었는지 그 시체들은 이미 절반가량 녹아 있었다.
카일은 내게 말없이 스킬 스톤과 스탯 스톤을 내밀었다.
“제게 줄 필요 없어요. 당신이 얻은 거잖아요.”
“아닙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노아가 말하길 자신의 동료들도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다만 브레인형인 자기보다 습득 속도가 늦어 시간이 더 걸릴 거라나.
나름대로 문장을 맞추어 본 카일이 말했다.
“당신은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돈, 충분히 벌고 있어요.”
해석하자면 나보다는 당신이 더 빨리 강해져야 하고, 노아에게 충분히 돈을 받고 있으니 이것을 팔 필요도 없다,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무뚝뚝한 표정을 보자니 대화를 길게 나누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결정석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카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입구 쪽도 클리어했다고 합니다.”
“으음.”
황철민 일당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다. 물론 2층에 올라왔던 세 명이 가장 강했지만 나머지도 만만치는 않았을 터.
나는 노아의 동료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과연 데이비드 정이 발차기 한 방에 기절했던 이유가 있다.
“끝났네요.”
나는 한호를 보고 웃었다. 한호도 나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절반쯤 허무가 담겨 있었다.
“고맙다, 성오야.”
그는 내 파티원들과 카일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7
입구 쪽을 맡았던 노아의 동료 캐미도 싸움으로 얻은 결정석을 내게 주었다. 같은 게이머인데도 왜 이 사람들이 결정석에 욕심을 갖지 않는지 의아했다.
캐미는 금발을 양 갈래로 땋은 생각보다 앳돼 보이는 여성이었다. 레벨은 129. 고스트와 매직형의 복합 능력자다.
그녀는 나보다는 암젤과 아린, 트레앙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오! 큐트 캣!”
“뷰티풀 걸!”
간간이 한글 단어가 섞여 나왔지만 카일보다는 공부가 될 되었는지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영어였다.
“저희는 이만.”
카일이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NPC들에게 푹 빠져 있는 캐미를 잡아끌었다.
“카일! 웨잇! 나 번호 받아야 돼!”
NPC들의 번호를 따려고 했던 건가?
노아의 동료들이 사라지자 한호가 내게 말했다.
“오늘은 정말 고맙다. 나도 이만 갈게. 혼자서 좀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응, 연락해.”
나는 멀어지는 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어제 비슷한 일은 겪은 터라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그가 빨리 마음을 추스를 수 있길 바랐다.
‘그나저나.’
이번 싸움으로 얻은 소기의 성과를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레벨은 하나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스탯 스톤으로 스탯이 적지 않게 오른 것이다.
나는 카일과 캐미가 내게 준 결정석들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스킬 스톤이 2종이고 나머지는 모두 스탯 스톤이었다.
힐, 분신, 체력 +6, 민첩 +5, 행운 +4.
‘힐’은 아린에게 주었고 ‘분신’은 직접 흡수했다.
[액티브 스킬 ‘분신’을 얻었습니다.]
[‘분신’은 마법 서클이 최하 2단계 이상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마법사 클래스 2서클 이후 활성화됩니다.]
‘그렇군.’
어떤 마법인지 대강은 알 수 있었지만 더 확실히 알기 위해 스킬 정보를 보았다.
[분신]
타입 : 액티브
등급 : B
레벨 : 30/30(Max)
효과 : 자신과 닮은 분신을 만들어낸다. 사용자의 클래스가 여럿일 경우, 그중 한 가지만 지정하여 능력을 흉내 낼 수 있다. 등급과 레벨이 오를수록 분신의 숫자와 지속 시간이 늘어난다.
분신의 숫자 : 2
분신의 레벨 : ×50%
지속 시간 : 20초
‘괜찮은 걸 얻었네.’
2서클 마법 중 ‘미러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이것과 거의 동일한 기술이다. 대다수의 다른 마법과 마찬가지로 내 능력이 커질수록 더 높은 능력을 발휘하는 마법이었다.
‘어쨌든 당장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스탯 스톤을 여러 개 흡수한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레벨 8~9가 올라야 얻을 수 있는 스탯 포인트를 확보한 거니까.
물론 레벨이 오르는 것은 능력이 전반적으로 모두 상승한다는 의미니까 단순히 스탯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의 싸움으로 크게 능력이 향상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퀘스트도 하나 달성했고.’
명예 퀘스트를 달성하고, 영토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한 동력도 얻었다.
Chapter 30 - C급 던전
1
‘C급 던전…….’
PHASE 3의 하나 남은 퀘스트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아직 난감했다.
현실에 있는 던전은 피라미드 구조로 존재한다. F~A급까지 있으며 등급이 올라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고 난도가 상승한다.
게이머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나누어진 감이 있지만, 어차피 숫자가 많지 않은 A급 던전은 소수의 게이머들만 클리어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갖는 대중의 관심은 적은 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적다기보다 노출된 정보량이 너무 적다. 최상위 게이머들은 굳이 A급 던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그 정도 수준의 게이머들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구에 응할 동기도 부족했다.
그런 현상은 꼭 A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서 던전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상대적인 정보량이 부족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소량의 정보로 C급 던전이 어느 정도 난이도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D급 던전을 공략했던 것도 결코 쉽게 해냈다고 볼 수 없다. 지금 나와 파티원들의 실력으로는 냉정히 말해 D급을 공략하는 정도가 딱 맞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D급 던전 몇 개를 공략해 레벨을 올린 다음 C급에 도전하는 것이 안전하고 이치에도 더 맞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한호와 연결된 아라돈이 말하기를 70위 군주 아메리오가 자신을 공격해 올 전력을 모으는 중이라고 하지 않은가?
아라돈과 이한호를 배제할 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거라면 더 서둘러야 했다.
D급 던전 하나를 공략하는 데 최소 일주일씩 걸린다고 해도 지나치게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었다.
‘음…….’
황철민 일당을 죽이고 얻은 스탯으로 내 능력치는 꽤 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만 국한된 얘기라서 다른 NPC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었다.
파티에 포함된 NPC들은 나와 보조를 맞추어 성장하지만 레벨과 무관하게 얻은 스킬, 스탯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번일로 파티원 전체의 전력이 올랐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당장 내 레벨을 올리지 않고 전력을 상승시키는 쉬운 방법은 아군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다.
‘노아에게 또 도움을 요청해 볼까?’
황철민 일당과 싸우면서 보여주었던 카일과 캐미의 능력은 가공할 만했다. 레벨도 120을 훌쩍 넘기는 그야말로 일류 게이머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당연히 공략이 쉬워질 것이다.
“아니…….”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노아의 동료들이고 그들이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한 상황이라고 해도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한 공략에 포함시키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고 여겨졌다.
던전\공략, 게다가 C급 정도 되는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나 파티원들의 모든 능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물론 유진이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억 삭제 스킬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카일과 캐미는 그녀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게이머들이었다.
내 수준으로 사용하는 기억 삭제 스킬이 그들에게 제대로 작용을 할지는 의문이었다.
‘아군을 늘린다라…….’
내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생각이 미쳤다.
검은 소환술사.
소환술을 사용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아군이 늘어난 것과 동일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미 그 효과는 D급 던전을 공략할 때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이 능력은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다. 사용되는 마나양이 아주 커서 계속 마나 포션을 복용해야 하고, 나 자신은 소환수를 다루는 데 집중하느라 직접 싸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C급 던전을 공략하는 내내 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다.
부담을 줄이면서 인원을 늘리는 법.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스테이터스창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클래스 목록에 미처 의식하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공예사.
지난번 퀘스트 보상으로 얻어놓고 나중에 확인할 요량으로 정보만 확인하고 지나쳤던 클래스.
검은 공예사라는 직업은 여전히 가늠하기 힘들었다. 공예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공예품의 범위가 어디까지 적용될는지.
‘혹시 사체도 공예품에 해당하나?’
몬스터의 부산물을 가지고 공예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내가 하는 합성이나, 현실의 브레인형 능력자들이 하는 일도 거기 포함되니까.
하지만 단순히 부산물이 아닌 사체 자체를 공예품으로 가정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