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독식왕 : 클리어러 093화
“당신은 연합할 군주가 없나요?”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 하지만 너무 오래 교류를 하지 않아서 동맹을 맺자고 하는 것이 어려운 입장이야. 더구나 아메리오가 나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나와 손을 잡는 것을 꺼리겠지.”
“흠…….”
나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아메리오가 서열 70위 군주라면 다음번 결투의 탑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아메리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자네와 비교해서 말인가?”
“네.”
“그자가 더 우위에 있다고 보아야겠지.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네.”
“……얼마나 차이가 나나요?”
“큰 차이는 없을 거야. 직접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유능한 부하를 여럿 데리고 있지 않나? 힘을 조금만 더 키운다면 아메리오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은 아메리오와 맞붙지 말고 시간을 끌어주세요. 다음번 결투의 탑에서 제가 놈을 처치하겠습니다.”
“……할 수 있겠나?”
“네, 걱정 마세요. 단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것만 감안해 주세요.”
“미안하네. 내가 부족해서 자네를 부담스럽게 하는군.”
“저 때문에 마음을 바꾸신 거잖아요. 실력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어쩔 수 없죠. 자제분들의 잠재력도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 잘 가르치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
아라돈은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는 별이 별로 없군.”
“네, 공기가 탁해서요.”
“언제 우리 쪽에 한번 오게.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자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될 거야.”
“네.”
“이만 가겠네. 이자가 발버둥을 치는군.”
나는 아라돈과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 한 번 몸이 휘청거린 뒤, 한호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나와 악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미안합니다.”
나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 같으니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한호와 나는 편의점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사실을 설명했다.
꽤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한호의 얼굴은 마치 이야기책을 듣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한호가 아라돈의 대리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퀘스트 달성 메시지가 뜨지 않는 이유.
그것은 한호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를 못하는 거겠지.
대리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양쪽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 일인 듯했다.
나는 이한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데 부담을 갖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아라돈의 대리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냥 기억 삭제 스킬을 사용하면 되니까.
‘그래도 승낙을 해주면 좋겠지만.’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대리인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더구나 나는 인간적으로도 한호가 마음에 들었다.
연인의 복수를 위해 목숨까지 불사하는 남자.
다소 아날로그적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이 있다.
한호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자기 앞의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하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내 몸에 이계의 군주가 빙의되었다고요? 그리고 그자는 성오 씨의 동맹자고?”
“네, 대리인의 조건이 까다로워서 적합자를 찾았다는 기쁨에 의향도 먼저 묻지 않았네요. 죄송합니다.”
한호는 고개를 저었다.
“의향을 묻다니요. 아마 지금 얘길 그 자리에서 들었으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직접 경험한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데.”
“이 일은 백 퍼센트 과장님 의사에 달린 일입니다.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저는 대리인이 돼보지 않아서 그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거든요.”
아까 아라돈의 말을 듣자니 대리인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적합자를 찾아도 이런 식이니, 과연 군주들이 아직 이쪽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과장님의 약혼자를 죽였다는 놈들을 처리하는 일은 이것과는 무관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문제는 떼어놓고 생각하세요.”
“…….”
한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낮에 제가 뭐라고 했었죠?”
“네?”
“목숨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성오 씨가 도와주면 제 목숨은 성오 씨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인데, 모르고 당할 뻔한 거잖아요. 나는 범죄자들이 죗값을 받지 않는 현실이 지긋지긋합니다. 복수가 끝난 뒤에도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에요. 더 할 일이 생겼다는 게, 솔직히 기쁩니다.”
“그 말씀은…….”
“네, 대리인인지 뭔지 받아들이겠습니다.”
[특수 퀘스트 - ‘아라돈의 대리인을 찾아라’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50,000, GP +80,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71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특수 퀘스트는 평범하게 경험치와 GP를 보상으로 주었다. 그 단위가 제법 커서 아쉽지는 않았다.
한호가 말했다.
“이렇게 된 김에 서로 말은 편하게 하는 게 어때요? 나이 차이가 열 살도 더 나는 동생한테 계속 존대하기가 그런데.”
“하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너도 편하게 해. 형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형……?”
형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이 말을 하는 것이 영 어색했다. 한호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흐트러뜨렸다.
“하하. 너 같은 녀석이 세상의 명운을 쥐고 있다니, 참.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네.”
그는 병원복 아래 자기 몸을 들여다보았다.
“이 문신 꽤 괜찮은데? 안 그래도 한두 개 그려 넣을까 했었는데 공무원이라 못했었거든.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갖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형은…… 긍정적이구나.”
“응, 그 일을 당하고도 성격은 안 고쳐지더라.”
“야옹.”
암젤이 퍼뜩 잠에서 깨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집에 언제 가냐옹.”
“헉!”
다시 한 번 한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양이가 말을……?”
“네, 성격 나쁜 말하는 각성수예요.”
8
중국 상해, C급 던전 입구.
여덟 명의 게이머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짭짤하네. 중국은 역시 기회의 땅이야.”
“돈이면 뭐든 다 되고 말이야. 확실히 한국보다 편해.”
개개인의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묵묵히 앞에서 걷고 있던 리더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자기 핸드폰 위로 떨어져 있었다.
“회사에서 메시지가 왔다.”
그 말에 모든 멤버가 발을 멈추었다.
“회사에서? 의뢰인가?”
“오! 좋은데? 확실한 줄이 있으니까 돈 나올 데가 끊이질 않네!”
“무슨 일인가요?”
무리의 2인자 역할을 하는 이가 리더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국에 들어가래. 처리해야 할 놈이 있다고.”
“그래요?”
멤버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잘됐네. 중국 음식도 슬슬 물리던 참인데.”
“한국 여자도 안고 싶고 말이야.”
리더는 핸드폰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역시 회사, 즉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온 연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늘 그런 것처럼, 별것 아닌 놈을 몇 처리하면 그만한 보상을 주겠지.
‘정도로 가지 않은 게 다행이야.’
게이머는 범죄를 저질러도 좀처럼 꼬리가 잡히거나 검거가 되지 않는다. 그 점을 노리면 일반적인 던전 공략을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쯤,
던전 안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면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오히려 손쉽게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Chapter 28 - 짚고 넘어가야 할 일
1
이한호가 아라돈의 대리인이 되고 나자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두 가지로 줄어들었다.
[명예] - 3. 레벨 80 이상의 카오스 게이머 처치하기
[영토] - 3. C등급 던전 한 개 획득하기
두 가지 모두 당장 손을 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아라돈의 전언으로 이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동맹자를 잃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라돈은 어차피 71위 군주이고, 그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인간적 관계를 맺고 난 다음이라 간단히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호가 그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도 걸린다.
‘어렵네.’
암젤이 지적했다시피 이계에서 나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인간적인 유대감 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른 공략만 신경 썼다. 하지만 현실이 게임이 되면서 전처럼 가볍게 생각하기 힘들어졌다.
몇 가지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요즘은 그래도 인터뷰 요청이 줄어드는 중이었다.
인터뷰 직후에 이슈가 되었다고는 해도 어차피 일개 길드가 창설되는 문제에 불과하다. 유능한 브레인형 게이머가 한국인으로 귀화한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연일 매스컴에서 떠들어 댈 정도는 아니다.
여기에는 피스&호프의 눈치를 보는 자들의 입김도 작용했다.
자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눈치 빠른 이들은 니콜라스와 노아와 관계가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노아였다.
“여보세요.”
“성오 씨, 뭐 하고 계세요?”
“그냥 있습니다.”
“잘됐네요.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지 않으실래요?”
“어딜요?”
“길드 등록해야지요. 동료들도 다 불러주세요. 귀찮지만 전원이 가서 등록을 해야 합니다. 그나마 한국은 절차가 덜 까다롭더군요.”
“아…….”
드디어 길드 OG가 발족하는 건가?
솔직히 길드라고 하기에는 머쓱한 구성이다. C급 게이머 여섯 명에 브레인형 게이머 하나가 추가된 거니까.
그나마 노아의 이름값이 무게감을 주고 있었다.
“성오 씨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지요.”
“네. 그나저나 노아 씨 귀화 문제는 어떻게 됐나요?”
“원래 게이머의 귀화 절차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는 한국어도 능통하니 걸릴 게 없었죠.”
“다행이네요.”
“제 한국 이름은 조노아로 했습니다.”
“조노아……?”
“성을 성오 씨와 같은 것으로 고른 것이죠. 저는 이미 성오 씨를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혹시…… 부담되나요?”
“아니요. 그냥 좀…… 갑자기 없던 형이 많이 생긴다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