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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92화 (92/245)

# 92

독식왕 : 클리어러 092화

이한호를 대리인으로 지정하고 나서 몇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아라돈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메시지도,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메시지도 없었다.

‘아라돈이 거부한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라돈이 그렇게 까다로운 인물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다려 보자.’

어쨌든 이만큼 빨리 적합자를 찾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더구나 그 인물의 오더 성향이 B등급이라는 사실이 더 안심이다.

5

피스&호프 본사.

이곳 길드장실에 두 남자가 대면하고 있었다.

니콜라스 알렌과 피터 샌드버그.

피터는 노아가 나간 자리에 새로 부길드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니콜라스는 노아가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적당한 때 공개하려고 했지만, 노아 쪽에서 먼저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간간히 새어 나오곤 했던 형제간의 불화설이 요즘 들어 더욱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피터의 입장에서는 부길드장이 되었다고 해도 피스&호프는 어디까지나 니콜라스의 일인 독재 길드였다. 그 위상이나 역할이 일반적인 길드의 부길드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성가시겠습니다.”

나콜라스는 곧바로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챘다.

“그래 봤자 제까짓 놈이 뭘 할 수 있겠나? 이미 경고했네. 우리 길드에 반기를 들면 다른 놈들과 똑같이 대하겠다고.”

“네…….”

피터는 그것이 단순한 말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길드를 키운다는 명목하에 많은 피가 뿌려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터는 자신이 부길드장 자리에 오른 게 어부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바깥에 있는 노아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자신보다 유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면 지금의 자리가 더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긴 하지.”

니콜라스는 살짝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는 한국 지부장에게 연락을 해서 OG를 처리하라고 일렀었다. 하지만 그를 제거하기는커녕 되레 자신이 당하고 말았다.

그 후 노아는 그자와 길드를 만든다고 인터뷰를 터뜨렸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조성오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이고, 지금 같은 때 그를 건드린다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컨트롤을 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세계 곳곳에는 피스&호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뇌관이 깔려 있다.

이면이 범죄 집단이라는 사실은 간간이 이렇게 핸디캡이 되곤 한다.

물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피스&호프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동력원이 된 것이, 그리고 앞으로 길드를 더욱 키워줄 원동력도 바로 카오스 게이머 닷컴이니까.

피터는 이 상황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움직일 수 있는 말이라면 충분합니다. 말에게 지시를 내려 처리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렇지.”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믿어보겠네.”

“감사합니다!”

피터는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가 언급한 ‘말’이란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관련을 맺고 있는 범죄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정상적인 루트로 얻을 수 없는 아이템들을 조달해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길드에 넣어주지는 않지만 그만큼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었다.

관계가 관계이니 만큼 말들은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내리는 지시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들로서도 손해가 아닌 것이,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지니까.

되레 그들 쪽에서 일감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피터가 길드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니콜라스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주 작은 변수에 불과하다. 노아가 한국의 게이머와 손을 잡고 길드를 만든다고 해봤자 피라미 같은 집단에 불과할 터.

그 조직이 덩치를 키워 피스&호프를 위협할 정도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먼 후일의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종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조그만 변수도 용납하지 않는.

게다가 그 변수가 노아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다.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셰릴, 들어와.”

직통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한 사람. 셰릴은 그의 수행 비서였다.

피스&호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니콜라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니콜라스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노크 소리가 나고, 곧 한 명의 여성이 들어왔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대단한 미인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풍기는 아우라가 압도적이었다.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높은 실력을 지닌 게이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길드장님.”

“셰릴.”

니콜라스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너한테 부탁할 게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한국에 가주었으면 한다.”

“한국?”

셰릴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길드장이 왜 자신을 아시아의 변방에 보내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쪽 상황이 길드장님께 흡족하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저까지 보낼 필요가 있으신가요?”

“별것 아닌 일이긴 하지. 너를 보내는 것은 개미를 머신건으로 쏘아 죽이려는 것과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노아는 무시할 수 없는 놈이야. 변수가 커지기 전에 그것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

셰릴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담겨 있었다.

니콜라스는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돌아오면 합당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피터 같은 자에게 부길드장 자리는 너무 무겁지.”

그제야 셰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니콜라스는 셰릴을 한국에 보내기로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이 정도면…….’

쥐새끼 한 마리가 빠져나가기에는 과분한 덫을 놓은 셈이다.

그에게 이미 노아는 혈육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

그 사실을 노아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6

나는 새벽 두 시에 한호에게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지금 나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잘 때는 핸드폰을 꺼놓기 때문에 연락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 화면에 이한호라는 이름이 뜨자마자 직감했다.

‘됐구나!’

아니라면 그가 이 시간에 내게 연락했을 리 없다.

“여보세요.”

“성오 씨.”

음성이 거칠었다. 금방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목소리.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저는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성오 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이유 없이 머리가 아프고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방금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전화를…….”

나는 어렴풋이 짐작을 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지금 와주시겠습니까?”

“병원으로요?”

“네, 저도 병원 앞에 나가 있겠습니다.”

“꼭 지금이어야 되나요?”

“……몇 시간 뒤에는 연결이 끊길 겁니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한호가 있다는 병원이 어디인지 물었다.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암젤이 잠에서 깼다.

“무슨 일이냐옹?”

“따라와. 같이 갈 데가 있어.”

7

한호가 있다는 종합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 앞 화단에 걸터앉아 있는 한호가 보였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멍한 얼굴이었다.

“과장님.”

“아! 성오 씨.”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원복을 입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피부에 전에 없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갈고리 모양의 문신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했다.

아라돈의 몸에 나 있던 검은 털. 그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진 문신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연결이 됐나요?”

“네.”

대답과 동시에 눈알이 뒤집어졌다. 잠시 휘청했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했다.

“자네로군.”

방금 전과 음성이 확연히 바뀌었다. 말투와 분위기로 지금 말하고 있는 이가 한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라돈이 그의 몸을 빌려 말을 했다.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거였군.”

그는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네가 사는 세상은 참…….”

경이로운 표정으로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한마디만 내뱉었다.

“다르군.”

“기분이 어떤가요?”

“그냥 좀 거북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워 입고 있는 기분이야. 아까는 가관이었지. 내가 들어오는 것을 이자가 거부하는 바람에 상당히 고생을 했어. 이자에게는 미리 알라지 않았던 건가?”

“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대리인과 연결되는 것은 나 혼자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네. 이자에게 제대로 승낙을 구하도록 하게.”

“하지만 거절하면 어떡합니까. 적합한 대리인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할 수 없네. 본인이 계속 거부한다면 나도 이자의 몸을 빌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요?”

“군주는 대리인을 통해 이 세상에 나온 다른 군주들을 식별해 낼 수 있네. 그리고 내 수하들을 불러낼 수 있지.”

“부하들에게도 대리인이 필요한가요?”

“글쎄…… 방법은 아직 모르겠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네. 카오스 군주들도 만약 나처럼 대리인을 얻는다면 머지않아 이곳에 전화가 번지게 될 거야.”

“…….”

“자네를 부른 것은 전할 말이 있어서네. 아직 처음이라 이 자의 몸을 오래 빌릴 수가 없거든. 가급적 용건만 말하도록 하겠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자네 말대로 곧바로 슬라둠의 땅을 차지했네. 하지만 그것이 다른 군주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일이 돼버렸지. 특히 아메리오가 가장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네.”

“아메리오요?”

“70위 군주지. 걱정과 질투가 많은 성격이라 내가 슬라둠의 땅을 차지한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라네. 더 세력이 큰 군주들은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아직 신경 쓰지 않는 눈치지만.”

“그럼 아메리오가 당신에게 전쟁을 걸어올 거라는 말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놈의 성격상 혼자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다른 군주와 연합을 도모한다는 말을 들었네. 아마 자기가 백 퍼센트 이긴다는 판단이 서고 나서야 움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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