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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88화 (8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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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88화

    다시 여러 줄기의 번개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그것들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라돈 일행을 휩쓸고 사라졌다.

    “잘하셨습니다.”

    수보타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안 싸우는 거야? 시시해!”

    트레앙이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뭐 나도 잘못한 결정 같지는 않았다.

    그때 방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굵은 빛이 떨어졌다.

    그것은 방 안에 하나의 인영을 데려다 놓았다.

    “응?”

    빛줄기와 함께 나타난 남자는 키가 크고 날렵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는 적지 않아 보이지만 어쩐지 얼굴에 장난기가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로 왔네? 심지어 그것도, 젊어!”

    한참 자기 몸을 만져 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신이 조성오인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죠?”

    “나도 이름만 들었어. 자네가 대장 같아 보여 찍었을 뿐이지. 나는 피오리오라고 하네.”

    “네?”

    나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피오리오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전설의 창술사로 자주 거론된 인물이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썼다는 창과 방어구를 사용했었다.

    “헉! 피오리오!”

    나뿐 아니라 수보타까지 놀랐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알아?”

    “알고 말굽쇼. 전설의 창술사 피오리오. 일개 군단과 맞먹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혹자는 그것이 과장이라고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분명…… 만 년도 전에 죽었을 터인데…….”

    수보타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도 피오리오가 실존 인물인지 몰랐다. 그저 가상현실 게임 설정 안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오! 나를 기억하는 자가 있다니 놀랍군. 그래, 그 전설의 창술사가 바로 나라네.”

    그의 복장은 평범한 가죽옷이었다. 심지어 창도 들고 있지 않다. 때문에 아무리 전설의 창술사라 해도 수보타의 증언이 없었다면 믿기 힘들었을 터였다.

    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자네는 모르고 있는 건가? 이상하네?”

    그제야 메시지가 나타났다.

    [‘스페셜 게스트’와 파티를 맺으면 결투의 탑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장과 아이템에 관련한 사항은 NPC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나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게임 개념으로 이해해 보았다.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피오리오는 히든 캐릭터라는 것일까?

    2층을 클리어해서이든, 아니면 처음으로 동맹을 맺어서이든 어쨌든 그와 파티를 맺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모양이다.

    “저희를 도와주러 오셨다고요?”

    “응, 나는 만 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자네를 돕기 위해 이렇게 육신을 얻어 다시 태어났네. 나를 환생시킨 이가 말하기를, 자네가 결투의 탑을 정복하여 왕이 되도록 도우면 내게도 완전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더군.”

    “음.”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나를 각성시키고 게임을 하게 만든 이는 절대자급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 직접 군주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내게 대리하게 만드는 걸까?

    “잘 알겠습니다. 그럼 파티를 맺도록 하죠.”

    “파티? 잘은 모르겠지만 동료가 되자는 뜻인가?”

    “네.”

    “그러지.”

    피오리오가 벌쭉 웃으면서 다가왔다. 나 역시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와 악수를 했다.

    [피오리오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결투의 탑에서 SP를 소모하여 ‘스페셜 게스트’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아아…….’

    무조건 파티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소유 던전의 몬스터를 동원할 수 있는 것처럼 피오리오도 포인트를 소모하여 불러올 수 있다는 뜻 같았다.

    ‘그런데 SP가 뭐지?’

    내 물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메시지가 나타났다.

    [SP는 특수 퀘스트를 달성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특수 퀘스트는 달성하지 못해도 페널티가 없고,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군.’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러지.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너무 딱딱하게 대할 것 없네. 그냥 다른 동료들처럼 편하게 대해주게. 어차피 대장은 자네니까.”

    “네.”

    피오리오는 꽤 활발한 인물이었다. 비록 만 년 전 사람이라 해도 겉모습은 20대나 다름없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그에게 말했다.

    “무기와 방어구가 필요하시겠네요.”

    “응, 나도 맨몸으로 그냥 보내져서 난감하던 참이네.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

    “잠깐만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쓸 일이 없어진 피오리오의 창과 피오리오 방어구 세트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건!”

    피오리오의 동공이 확장됐다.

    “내가 소싯적에 쓰던 것인데, 어찌하여 자네가 이것들을 가지고 있나?”

    내가 볼을 긁적이자 그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 그렇게 따지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어쨌든 고맙네. 잘 쓰겠네.”

    그는 창을 들더니 당장 몸을 움직여 기술을 선보였다.

    몸놀림이 현란하고 창을 휘두를 때마다 돌풍이 이는 것이, 과연 일류 창술사라고 할 만했다.

    동작을 멈춘 그가 말했다.

    “아쉽군. 아직 내 실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하는 느낌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차차 예전 능력을 되찾게 될 겁니다.”

    “그래?”

    피오리오가 안심한 얼굴로 창을 붕붕 휘두른다.

    “그러고 보니 이 창은 내가 쓰던 것과 조금 다르군. 뭐랄까, 무게감도 그렇고 마나가 휘감기는 감각도 그렇고,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은데…….”

    “제가 아는 장인이 손을 보았습니다.”

    “오! 그랬군! 이 옷도 마찬가지인가?”

    “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티코이가 직접 업그레이드한 것이니 피오리오 마음에도 들 것이다.

    “하하! 좋군! 좋아!”

    허리에 손을 얹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가 또다시 떨어진 번개와 함께 방에서 사라졌다.

    꽈광-!

    모든 절차가 끝났는지 차원의 문이 둥실 모습을 드러냈다.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지친 기분이다.

    “가자.”

    나는 앞장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3

    아라돈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가능성을 남겼다. 무턱대고 군주들과 싸워서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것만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긴 모든 군주가 악인이고, 모든 이계인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런 식이면 게임이 끝난 뒤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동맹은 어떻게 활용하는 거지?’

    당장 아라돈과 연락하는 방법도 모르겠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소파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암젤을 불렀다.

    “암젤.”

    “왜 그러냐옹.”

    암젤이 한쪽 눈만 살포시 뜨고 물었다. 딱 봐도 매우 졸린 얼굴이었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이리 와봐.”

    나는 내 옆자리 소파를 팡팡 때렸다. 암젤이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물어보라옹.”

    트레앙과 놀아주던 아린이 그것을 보고 부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아쉬운 입장이기도 해서 굳이 내려가라고 하지 않았다.

    “동맹을 맺은 군주와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그렇게 묻고 암젤의 이마를 주시했다. 대답을 해줄 때는 그녀의 이마에 있는 문신이 빛나곤 했으니까.

    반짝.

    ‘오…… 빛났다.’

    “동맹자와 연락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옹. 이계로 직접 건너가든가, 아니면 동맹자의 대리인을 찾아 그와 연결시키는 거다옹.”

    “대리인?”

    “이계의 군주는 모두 자기의 대리인을 찾고 있다옹. 그들을 통해서만 이쪽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옹.”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처음 결투의 탑에 들어갔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수보타에게 슬라둠이 대리인을 찾는 일에 집착했다고 들었지만 그게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그러면 군주들이 대리인을 찾으면 이쪽 세상을 지배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렇다옹.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다옹. 분발하라옹.”

    분발하라는 것은 암젤이 내게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암젤을 통해 날 각성시킨 이가 전하는 메시지일 터.

    “어쨌든 아라돈의 대리인을 찾으면 그를 통해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다옹. 뿐만 아니라 아라돈이 이쪽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옹. 진정한 동맹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옹.”

    “그렇군.”

    하지만 이걸로 납득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군주들도 자기 대리인을 찾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다는데, 71위 군주인 아라돈이 대리인을 찾을 때까지 어떻게 기다린다는 말인가?

    “이계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초대를 받는 등의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티켓을 얻을 수 있다옹. 하지만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권유하지 않는다옹.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다옹.”

    더구나 나에게는 티켓이 한 장밖에 없다. 이것을 고작 아라돈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쓴다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였다.

    “음…… 그러니까 방법은 대리인을 통하는 것밖에 없다는 거네.”

    “걱정하지 마라옹. 동맹을 맺은 군주의 대리인은 주인님이 직접 찾을 수 있다옹. 조건에 맞는 이를 지정하면 그가 아라돈의 대리인이 될 거다옹.”

    “그래?”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암젤 이마의 문신에서 빛이 사라졌다. 나 역시 용무가 끝났기 때문에 그녀를 들어 옆의 소파에 내려놓았다.

    “쿨…….”

    그녀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대리인이라…….’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신중해야 할 문제이다. 백 퍼센트 믿을 수 있는 인물, 그리고 동료로서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택해야 하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김유진이다.

    물론 실력으로만 보면 적절한 후보이기는 하지만 아라돈의 대리인으로 삼기에는 뭔가 맞지 않아 보였다.

    성격이 다르고, 성별도 다르니까.

    ‘유진이가 화낼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어쨌든, 시간이 필요한 문제인 것만은 분명했다.

    4

    서울시 던전 사고 처리 전담반.

    이곳에서는 고성이 오가는 중이었다.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같이 팀을 맺어 사냥을 하던 게이머끼리 던전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요?”

    “…….”

    드래곤파워 멤버들은 대답하지 않고 저마다 딴청을 피웠다. 뿐만 아니라 대놓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등 태도도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이병수라는 동료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을 하라고요!”

    “저희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젠장!”

    한호는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쾅!

    단단해 보이는 책상 모서리가 대뜸 부서져 나갔다.

    그것을 보고 드래곤파워 멤버들도 슬쩍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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