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독식왕 : 클리어러 087화
내 대답에 아라돈 진영 전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랬군. 얼마 전 슬라둠이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도 무척 당황하던 참이오. 슬라둠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성에 있던 병졸들도 모조리 흩어져 버렸지. 슬라둠의 영지는 말 그대로 죽은 땅이 되어버렸소. 물론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가 집어삼키겠지만.”
“당신은 슬라둠과 전쟁을 하고 있지 않았나요? 왜 그의 땅을 차지하지 않은 거죠?”
“나는 내 영지를 늘릴 생각은 추호도 없소. 우리 것을 지키고 가꾸는 데만 해도 벅찰 정도지. 깜냥 이상의 것을 가지려고 하니 전쟁과 반목이 끊이질 않는 것이오. 순간의 욕심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불행의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지.”
“흐음…….”
듣다 보니 무슨 현자가 하는 말을 듣는 것 같다.
의식이 바른 것은 알겠지만 쉽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나라면 싸우고 있는 적이 없어지면 당연히 그 땅을 차지했을 것이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내가 당하기 전에, 그리고 서열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른 군주들과 싸웠겠지.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카오스 군주들의 행태가 싫다면 그것을 꺾기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당신의 신민들을 지키기 일 아닌가요?”
“흠…… 당신이 싸우는 이유가 그것이오? 당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 들어온 싸움이지만 게이머의 직감으로 지금은 이렇게 대답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침묵이 넓은 방을 뒤덮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런 일이 펼쳐지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아라돈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과 싸워야 할 이유를 못 찾겠소. 하지만 당신이 나를 꼭 쓰러뜨려야 한다면, 그 싸움을 거부하지도 않겠소.”
그의 말에 양옆으로 도열한 신하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틀어쥐었다.
“하아…….”
‘어떡해야 되지?’
이 싸움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라면 싸워서 이기지 않고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메시지가 나타났다.
[당신은 오더 성향의 군주에게 ‘동맹’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동맹을 받아들이면 결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간주, 해당 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지. 사람 고민하게 만들고 말이야.
무슨 악취미인지, 단순히 극적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허무해졌다.
‘동맹이라…….’
이게 어떤 식으로 게임에 영향을 미칠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국면을 무리해서 대결로 끌고 가는 것보다는 동맹을 택하는 게 나아 보였다.
아라돈이라는 군주가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대화의 흐름과 관계없이 절반은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탑의 이름 자체가 결투의 탑이니까.
자신들이 뭔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딱 한 명, 바로 방금 입을 연 조성오라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말이오?”
“저와 동맹을 맺는 겁니다.”
내 말에 방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동맹이라…….”
아라돈은 그 말이 갖는 의미를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싸움을 피하고 이 자리에서 웃으면서 헤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동맹이란 앞으로도 이어 나가야 할 지속적인 관계.
그리고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기브 앤 테이크를 하는 것이다.
이자와 공통의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희들에게 남은 길은 싸움뿐입니다. 하지만 군주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그것은 저희 둘 다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소. 그리고 우리가 동맹을 맺어서 함께 도모할 일이 뭐가 있겠소?”
나는 아라돈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점은 나도 궁금하다. 하지만 시스템이 굳이 ‘동맹’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었다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쓰임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네 세상의 군주들은 본인들의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세상을 침범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오스 군주를 모두 쓰러뜨려야 하지요.
저는 오늘 당신을 만남으로써 이계의 군주가 모두 그 음모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되레 당신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올곧은 사상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념은 존중하지만, 그것에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지적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질서를 옹호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제껏 받지 않아도 될 모멸과 무시를 당하며 늘 군주 순위에서 최하위로 밀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소.”
“당신은 그렇지만 당신의 신민들은 어떤가요? 당장 자식들만 해도 당신과 생각이 같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답답하고 고집 센 아버지 때문에 받지 말아야 할 모멸을 감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라돈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그는 양옆의 자식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숙인 채로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수만 년 동안이나 안됐던 일이 갑자기 바뀔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놈들을 쓰러뜨리고 판을 뒤집지 않는다면 당신네 세상에 질서가 뿌리내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으음…….”
아라돈은 아들 아루스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 자의 말이 타당하다고 보느냐?”
“아버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희에게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슬라둠 같은 저급한 군주에게 유린당하면서도 아버지는 그를 적극적으로 공격해 쓰러뜨리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희들의 능력을 다른 군주들에게도 보여줄 때가 왔습니다.”
아라돈은 이번엔 딸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저도 아루스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기에 말없이 따랐지만, 이대로 질서가 더 어지럽혀지면 저희 영지는 언제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다고 봅니다.”
두 자식의 말을 듣고 아라돈은 제법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표정이 굳은 채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으음…….”
내 옆에서 암젤이 속삭였다.
“이거 언제 끝나는 거냐옹? 슬슬 지루하다옹.”
“오빠? 우리 안 싸워?”
트레앙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나도 지금 같은 전개는 취향이 아니었다. 모든 게임 장르를 좋아하지만 전략 시뮬레이션 같은 장르는 플레이 시간이 너무 긴 데다 끝이 없어서 기피하는 편이다.
[오 분 안에 동맹이 성사되지 않으면 대결 모드로 들어갑니다.]
[대결 모드에서는 더 이상 동맹을 맺을 수 없습니다.]
‘큭!’
메시지까지 종용하자 나는 아라돈을 좀 더 몰아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라돈, 당신도 군주라면 웅심을 가지십시오. 당신 스스로 하라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 세계의 모든 카오스 군주를 물리치고 왕이 될 생각입니다. 저와 같은 길을 갈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지 선택하십시오. 만약 저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당신의 뜻이 관철되는 세상을 반드시 보여주겠습니다.”
이것은 꽤나 코큰 소리였다. 나는 그저 게임을 하고 있을 뿐, 이상을 실현시키겠다는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왕이 된다면 이계를 오더 성향의 왕이 지배하는 거니까. 모양은 조금 달라도 아라돈이 그리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왕이 될 생각이라니…….”
아라돈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만큼 내 말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자식들과 수하들까지 놀란 얼굴이었다.
“당신은 다른 군주들이 어떤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뜻은 잘 알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오.”
“어떻게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최대한 단호하게 말을 했다. 많지는 않아도 가상현실 게임 안에서도 협상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협상을 할 때는 자신까지 속이겠다는 마음으로 무조건 세게 나가야 한다.
아라돈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진심인가 보군…….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이런 말까지 나왔으면 동맹을 성사시키는 것은 이미 9부 능선을 넘었다는 뜻이다.
“일단 마음을 독하게 먹으십시오. 나약함을 버리고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일단은 세력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당장 슬라둠의 영토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십시오.”
“당신은 참…… 어려운 얘기를 하는군.”
“물론 수만 년이나 이어져 온 가풍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각오도 없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쪽 세상뿐만 아니라 이계도 격변을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나는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어려운 상대도 아닌데 싸워서 이겨 버리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먹으려는 찰나에 아라돈의 입술이 무겁게 떼어졌다.
“알았소. 당신과 동맹을 맺겠소.”
[71위 군주 아라돈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동맹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하지 않는 한 지속됩니다.]
“오늘 처음 보았을 뿐이지만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소. 무모한 꿈을 그토록 진지하게 말하는 이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당신 꿈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따라가 보고 싶은 생각은 드는군.”
아라돈의 결정에 아들과 딸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말대로 슬라둠의 땅에 들어가 우리의 깃발을 꽂겠소. 다른 군주와 분쟁이 발생하면 피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리고 우리 세력을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도록 하지.”
한 번 결정하고 나자 우직한 성품답게 각오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가 자신이 한 말대로 이행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앞으로 당신과 어떻게 연락하면 되겠소?”
“그게…… 음…….”
나는 혹시나 해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방법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좋소. 나중에 한번 우리 성에 들르도록 하시오.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어려워도 동맹을 맺은 축배는 들어야 하지 않겠소?”
[군주 아라돈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계행 티켓’ ×1을 획득했습니다.]
‘이런 식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