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독식왕 : 클리어러 086화
티코이가 업그레이드한 장비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30퍼센트 정도의 성능 향상을 이루었다.
수치상으로 보면 처음과 그대로인 것 같지만 유니크급 장비를 이 정도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 못지않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티코이라는 뜻이다.
새로운 장비도 얻었겠다, 이제는 결투의 탑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 나는 파티원을 모두 모았다. 암젤과 아린은 각오를 굳힌 얼굴이었지만, 수보타만은 매우 긴장한 얼굴이었다.
“걱정 마. 너한테는 직접 싸우라고 안 할 테니까.”
“정말인가요?”
반사적으로 기뻐했다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다.
“그것 참. 아쉽네요.”
수보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상대 군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거나 대화를 하게 될 경우에 대비해서였다.
우리 파티에는 이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따로 없다. 첫 번째 싸움에서 그를 얻은 것은 행운이라고 할 만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양?”
모두 모여서 방어구를 착용하자 트레앙이 들뜬 얼굴로 물었다.
“나쁜 놈 때려잡으러 가는 거야.”
“진짜? 나쁜 놈, 미워!”
트레앙이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움찔하게 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녀도 나와 동일하게 70레벨이 되었으므로 작은 일에 변신을 할 만큼 자제력이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수보타가 나서면서 트레앙의 볼을 꼬집었다.
“아유~ 우리 예쁜이. 나쁜 놈이 싫었쩌용?”
금세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싸늘한 눈으로 수보타를 올려보는 트레앙.
수보타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번엔 반대편 볼까지 꼬집었다.
“아유~ 우리 트레앙! 귀여워 죽겠쩌용!”
고오오-
트레앙에게서 살기등등한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보고 아린이 재빨리 그녀의 입에 과자 하나를 물려주었다.
“착하지? 우리 트레앙. 불쌍한 아저씨 때리지 마.”
“우적우적.”
과자를 씹는 동안 천천히 트레앙의 노기가 가라앉았다.
“큰일 나기 전에 얼른 그 손가락 치우라옹.”
암젤이 수보타에게 충고했다.
“응? 어라?”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수보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좋아, 가자.”
나는 차원문의 열쇠를 꺼냈다.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이차원의 공간에 들어가면 최소 몇 시간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입장하기 전에 준비를 갖출 것을 권유합니다. 정말 지금 사용하시겠습니까?]
“응.”
과정은 전과 같았다. 거실 가득 하얀 빛이 가득 차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커다란 문이 등장했다.
“티코이, 다녀올게.”
“네. 여러분,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이번에는 결투의 탑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 더 짧았다.
소우주처럼 신비롭게 생긴 공간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생성되어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왔다.
“우왕!”
트레앙이 그것을 보고 마주 달려갔다. 반면 수보타는 깜짝 놀라 달아나려 했다. 그전에 내 손에 뒷덜미가 붙잡히긴 했지만.
휘오오-
또다시 대면하게 된 황량한 공간. 완벽한 이질감이 드는 이곳의 분위기 탓에 절로 탄성을 내뱉게 된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것인지.’
이만한 능력이 있는데 왜 직접 군주들을 죽이지 않고 날 더러 대리하게 하는 것일까?
이미 한 번 겪었기 때문에 지시하는 메시지가 없어도 알아서 마탑으로 걸어갔다.
1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 쪽에 전에 보지 못한 단상이 하나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 한 권.
익숙한 장치였으므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책 위에 손을 올리자 귀환서를 사용할 때처럼 밝은 빛이 우리 전부를 뒤덮었다.
화악-
[결투의 탑 2층에 입장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PHASE 2의 클리어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부 : S, 명예 : S, 지위 : A, 영토 : S, 동료 : A]
[11,500BP를 얻었습니다.]
[배틀 포인트로는 소유한 던전의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군주 서열 71위 ‘아라돈’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오 분의 대기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결투가 시작됩니다.]
전체적으로 지난번보다 성적이 좋았다. 예상대로 초과 달성한 퀘스트들은 S급 판정을 받은 듯하다.
주어진 배틀 포인트는 11,500.
단순히 생각해도 지난번보다 받는 포인트 단위가 커졌다. 아마도 PHASE가 진행될수록 난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거기 맞춰 포인트 단위가 상향되는 모양이었다.
S급이 2,500BP, A급이 2,000BP라고 계산하면 숫자가 맞다.
또 한 번 고민이 시간이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티코이한테 다른 던전 마스터도 개조하라고 하는 거였는데.’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기도 했다. 티코이가 개조한 던전 마스터는 누군가 한 번은 쓰러뜨려야 하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검은산 던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쓰러뜨려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까지 할 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펼쳐질 싸움이 점점 어려워질 것을 감안하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
획득한 던전이 늘었으므로 당연히 선택지가 늘어났다.
나는 이번에도 가성비가 좋은 아스도라퀸+를 소환하기로 했다. 대신 이번엔 두 마리.
11,000BP를 사용했다.
번쩍! 번쩍!
두 줄기 번개가 떨어지고 대형 거미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트레앙이 까르르 웃었다.
도끼를 꺼내 싸우려 드는 것을 아린이 말리고 설명을 해주었다.
대기 시간이 끝났다.
[전투가 개시됩니다.]
오더 성향의 군주라는 아라돈.
과연 어떤 군주일까?
눈앞에 여러 줄기의 번개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우르르릉!
2
소환된 군주와 그의 수하들은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슬라둠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운데 서 있는 위풍당당한 인물이 분명 군주 아라돈일 터.
그 역시 슬라둠처럼 반수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인간형의 모습에 더 가까워서, 문신처럼 피부에 검은 털이 돋아 있고 머리 위로 한 쌍의 뿔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딱히 짐승의 형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의 옆에 있는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인의 귀와 꼬리를 가진 자들이 있지만 대체로 인간형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각자 활이나 창, 혹은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슬라둠의 병사처럼 정연한 모습은 아니어도 개개인이 매우 용맹해 보였다.
“여기는…….”
아라돈은 나지막이 그렇게 내뱉고는 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허공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우리 쪽을 응시했다.
아마도 싸우라는 식의 메시지가 나타난 것이리라.
나는 수보타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희들은 전에 여길 어떻게 건너오게 된 거지?”
“슬라둠은 다른 군주들보다 빨리 이계로 넘어가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대리인을 찾으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파장이 맞는 인간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스스로 이계로 나가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사이비 마법사가 알려준 주술을 읊는 중에 갑자기 이곳으로 전송이 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다는 거네?”
수보타 이 녀석이 왜 우리에게 문지기라고 불렀고 슬라둠이 그 말을 믿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은 누구요?”
아라돈이 굵직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조성오라고 합니다. 당신은 군주 아라돈입니까?”
“그렇소. 보아하니 당신들은 이계의 인간들 같군. 왜 내가 당신들과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소?”
‘오오…….’
이건 생각지 못한 전개다. 수보타가 군주 아라돈은 평화와 정의를 숭상하고 전쟁을 꺼린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이번에도 슬라둠 같은 군주가 나왔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싸움부터 하려고 들었을 테니까.
“저도 당신과 싸워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을 했다. 정말 이자가 오더 성향의 군주이고,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면 전개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소. 반대로 나는 당신을 모르지. 이게 어떻게 된 연유인지 설명해 주겠소?”
갑자기 그의 옆에 있던 젊은 이계인이 끼어들었다.
“아버지! 모든 사람이 아버지처럼 상식이 있고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껏 대화를 시도했다가 잘된 적이 한 번이라고 있나요?”
아버지? 이라돈의 아들인가? 이제 보니 그의 몸에 울긋불긋 검은 털이 돋아 있는 게 아라돈을 닮긴 했다. 머리에 작은 뿔도 나 있었다.
“아루스, 대화를 게을리하면 네가 증오하는 무리와 다를 것이 없다. 만약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최소한 시도라도 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에게서 고고한 인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음…….”
어제 내 마음속에 돋아났던 한 가닥 의심이 다시 피어올랐다. 상대가 올곧은 이성을 가진 정직한 인물이라도 시스템이 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싸워야만 하는 건가?
“저 역시 당신처럼 이곳에 보내진 사람입니다. 이곳은 결투의 탑이라는 곳이죠. 나를 이곳에 보낸 누군가는 내가 이계의 군주를 모두 쓰러뜨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계의 군주라……. 과연 당신네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계인일 수 있겠군.”
“아버지, 저들은 어차피 카오스 군주들의 병졸이 되기 위해 각성한 자들입니다. 저자가 하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만해라. 너는 느낄 수 없느냐? 저자는 다른 각성자와는 다르다. 게다가 군주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고 하지 않느냐.”
“그 말을 믿으십니까?”
“아루스.”
이번에는 아라돈의 반대편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네가 더 열심히 수련을 했더라면 금세 알았을 것이다. 우리 실력으로는 저자들을 쓰러뜨릴 수 없다.”
“누나…….”
냉정하고 강단이 있어 보이는 게 아들보다는 딸이 더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었다.
“네 누나 말이 맞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나는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다.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그 전에 먼저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꾸나.”
대화의 바통이 다시 내게로 넘어왔다.
“당신은 오더 성향의 군주입니까?”
“……그렇소. 그건 왜 묻는 거지?”
“저도 오더 성향의 게이머입니다.”
“게이머?”
“우리 쪽 세상에서는 각성자를 그렇게 부릅니다.”
“오더 성향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아라돈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헉 소리를 냈다. 그의 의심에 찬 시선이 수보타에게 향했다.
수보타는 움찔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혹시 슬라둠을 사라지게 한 것이 당신이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