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독식왕 : 클리어러 083화
눈앞의 적이 사라지자 트레앙의 시선이 내게 미쳤다.
“크으으…….”
그녀가 난폭하게, 하지만 매우 느린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쿵! 쿵……!
휘두른 주먹이 내 어깨 위를 스쳤다.
털썩.
덩치 큰 여자의 몸이 스르륵 무너진다. 형상이 마치 나를 끌어안는 것처럼 되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트레앙, 오랜만이야.”
완전히 잠이 들기 전에 그녀의 눈이 작게 뜨여졌다.
“주…… 주인님?”
“그래, 힘들었지? 푹 자.”
“으, 응…….”
3
우리 세 사람은 잠이 든 트레앙을 던전 안쪽으로 옮겼다. 그녀를 데리고 던전 밖으로 나가면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크아아!”
트레앙에게 얻어맞아 핀치에 몰려 있었던 던전 마스터가 기운을 회복하고 내게 달려왔다.
‘건샷 스피어!’
콰앙-!
바람 속성을 가질 수 있게 된 뒤 건샷 스피어의 격발 위력도 강해졌다.
폭발적으로 길어진 창이 던전 마스터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크르르릉…….”
무너져 내리는 몬스터.
[퀘스트 ‘다섯 시간 안에 던전 마스터 물리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1,000, GP +30,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70이 되었습니다.]
[기존 클래스를 진화하거나 새로운 클래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벌써 또 클래스를 선택할 때가 됐네.’
아직 웨펀마스터는 될 수 없다. 새로운 클래스를 고를 때가 된 셈인데, 나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빠르게 선택을 했다.
마법사.
기본 클래스이자 궁극의 클래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성장시키기가 까다롭고 초반엔 특히 운용하기 힘든 클래스지만 ‘무기 숙련가’가 된 지금은 부담이 없었다.
[‘마법사’ 클래스를 얻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클래스 숙련도가 최고도가 되었습니다.]
[1서클 마법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마법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세요.]
내 앞에 1서클 수준으로 습득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이 나열되었다.
다른 클래스들은 초반에 한 가지 스킬만 고를 수 있는데, 마법사는 그나마 스킬 위주로 싸우는 클래스답게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세 가지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어차피 골라야 할 것들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 손가락이 세 가지 패시브를 택했다.
[라이트], [파이어], [워터]
다른 속성도 고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1서클의 마법은 쓸 만한 게 거의 없기 때문에 포기해도 큰 영향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속성 패시브는 말 그대로 내 안에 속성의 기운을 녹여서 스킬을 사용할 때 이것들을 함께 발현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응용할 스킬이 없다면 쓸모가 없지만, 나는 이미 클래스 진화를 통해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가진 속성은 바람, 빛, 불, 물 네 가지가 되었다.
[스킬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라이트’의 레벨이 Max가 되었습니다.]
[‘파이어’의 레벨이 Max가 되었습니다.]
[‘워터’의 레벨이 Max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Max가 되었다고 해도 어차피 C급 스킬들이다.
내가 새로운 클래스를 얻고 스킬까지 습득까지 마쳤을 때, 누워 있던 트레앙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
그녀는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신장이 내 반밖에 되지 않는, 지구 나이로 치면 유치원생 정도의 꼬맹이이다.
잠기운을 떨쳐 내느라 얼굴을 찡그렸다. 천천히 눈을 비비고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린, 암젤을 차례대로 발견한다.
“……어? 응?”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듯 커다란 눈을 한 번 끔벅였다.
“암젤? 아린 언니?”
“왜 아린은 언니고, 나는 암젤이냐옹.”
“와앙!”
암젤의 불만은 트레앙이 터뜨린 울음에 묻혀 버렸다. 그녀는 아린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그래, 트레앙. 많이 무서웠지? 저기 주인님도 계셔.”
“오빠?”
뚝 울음을 그치고 나를 바라본다.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놀라서 내가 다 겸연쩍어질 정도다.
“오빠! 오빵~!”
주종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트레앙은 정신 연령이 낮기 때문에 그녀에게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기는 조금 어색했다. 그래서 오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쳤다.
“오빠~~! 어디 갔었어? 나 버린 거야?”
나를 붙잡고 서럽게 울어대는데,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불과 십 분 전 난폭하게 던전 마스터를 후려 패던 게 그녀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격차가 느껴지는 변신이다.
“버리기는. 나도 너처럼 갑자기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진짜?”
“응, 당연하지. 내가 우리 트레앙을 왜 버리니?”
“와아!”
트레앙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름 : 트레앙
성향 : 주인의 성향에 따름
스킬 :
폭주 - 화가 나거나 흥분하면 거인으로 변신해 괴력을 발휘한다. 레벨이 오를수록 폭주력이 증가하는 반면, 제어력은 강해진다.
어스퀘이크 - 땅의 기운을 이용해 강력한 진동을 일으킨다. 레벨이 오를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이력 : 변신족 라카노는 일족 최후의 전쟁 때 모든 것을 바쳐 몬스터와 격전을 치렀다. 트레앙의 어머니는 어린 딸마저 전쟁에 참가시킬 수가 없어 야심한 밤에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흘려보냈다.
바구니를 발견한 조성오 일행은 거기 담긴 편지 때문에 라카노족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움을 주기 위해 현장에 달려갔을 때는 이미 일족이 전멸을 당한 뒤였다.
어린 트레앙을 버리고 갈 수가 없어, 주종 계약을 맺고 파티에 포함시켰다.
[트레앙을 동료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
[트레앙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동료] -2. ‘NPC 1인 영입’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히든 퀘스트 ‘검은 공예사’를 얻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검은 공예사’ 숙련도가 Max가 되었습니다.]
[패시브 스킬 ‘손재주’를 얻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스킬 레벨이 Max가 됩니다.]
[‘손재주’의 부가 효과로 ‘합성’의 숙련도가 높아졌습니다.]
[한 번에 합성할 수 있는 수량이 늘어납니다. 합성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앗.’
나는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NPC 동료를 얻으면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이런 것은 더 긴장감 있게 확인하고 싶었는데.
‘검은 공예사라고……?’
지난번 검은 소환술사 때처럼 처음 보는 클래스였다. 똑같이 ‘검은’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을 보니 무슨 시리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몰랐던 클래스가 이렇게 많았다니.’
두 번 연속이라면 낮지 않은 확률이다. 공예사라는 클래스가 무엇인지는 물론 알고 있다.
각종 재료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클래스다. 아무래도 서브 클래스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내가 이것을 얻은 것은 다른 중요 클래스를 대부분 얻고 난 뒤였다.
공예사가 되고 나서 느낀 것은 역시 전투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선물로 호감도를 높이거나 상점에 팔아 돈을 벌 수 있지만 그것이 게임 진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다만 패시브 스킬 ‘손재주’의 영향으로 합성의 숙련도가 높아진다는 점은 좋았다. 그만큼 많은 양의 합성을, 확률 높게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가상현실 게임에 있을 때보다 지금 더 유용한 클래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검은 공예사라니.
단지 ‘검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뿐이지만 왠지 검은 소환술사처럼 오리지널과 큰 차이가 있는 클래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를 때는 직접 확인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정보창을 열었다.
이름 : 검은 공예사
숙련도 : Max
특징 : 흑마법의 대가 크라지온은 자신의 마법을 봉인당한 뒤, 유배지에 감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자잘한 도구를 이용해 공예를 하는 것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흑마법사인 그는 공예 과정에서 놀라운 기술을 발현한다. 바로 자신의 공예품에 어둠의 마나를 불어넣어 일시적으로나마 생명력을 갖게 한 것.
새로운 가능성을 본 그는 공예술에 더욱 공을 들여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검은 공예술을 이용해 유배지에서 탈출하였으며 자신의 마법을 봉인한 자를 찾아가 복수에 성공한다.
크라지온 이후에 이 기술을 사용한 사람은 알려진 바 아무도 없다.
‘공예품에 어둠의 마나를 불어넣어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다고?’
일시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그 생명이라는 것이 지속성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떤 맥락에서는 검은 소환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능력이었다.
‘잠깐만…….’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약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검은 공예품’을 ‘검은 소환수’로 부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는가?
호기심이 일었지만 당장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뭐, 바쁠 거 없으니까.’
나중에 여유를 갖고 시험해 보면 될 일이다.
[트레앙은 F-003 던전의 마스터입니다.]
[그녀의 지위가 주인에게 이양됩니다.]
[F-003 던전의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공략도 하지 않고 던전 마스터가 되다니,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다.
그리고 가장 기다렸던 메시지.
[메인 퀘스트 PHASE 2의 모든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차원문의 열쇠’ ×1을 얻었습니다.]
나는 숨을 돌리고 말했다.
“이제 그만 가자.”
던전에서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트레앙이 파티에 합류하며 레벨이 올랐기 때문에 그녀의 품격에 맞는 의상을 새로 맞춰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상점에 데리고 들어가 새 방어구를 사주었다.
경험상 F~D급 던전의 상품은 큰 차이가 없었다. 티코이가 업그레이드를 하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불편이 없을 것이다.
방어구와 함께 전용 무기인 도끼도 사 주었다. 날 부분이 유독 커다랗게 디자인된 무기로, 그녀의 방어구처럼 변신 상태에 맞추어 사이즈가 달라진다.
트레앙의 방어구는 모양이 특이했다. 마치 원시인의 그것처럼 모양이 어설픈 가죽 옷이다.
투피스로 위아래가 분리된 의상이었다.
새 옷과 무기를 받아 들고 트레앙이 아이처럼-실제로 아이의 모습이지만- 기뻐했다.
“오빠,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라니! 도가 지나치지 않냐옹, 꼬맹이!”
암젤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트레앙과 일정한 거리를 띄우고 있었다. 그녀가 폭주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