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독식왕 : 클리어러 082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귀남의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그의 몸 아래에 굴러 나오는 하나의 결정석.
나는 블러드 스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진짜 운이 좋은 놈이네. 안 나오면 더 패려고 했는데.”
나는 스킬 스톤을 집어 들었다.
[액티브 스킬 ‘유혹(B, Lv7)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흡수하시겠습니까?]
“그래.”
결정석에서 빠져 나온 에너지가 가닥가닥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스킬 ‘유혹’을 얻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스킬의 레벨이 Max가 됩니다.]
놈을 응징할 때 응징하더라도 아까운 스킬 스톤까지 없앨 필요는 없다.
나는 암젤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수고했어.”
“별것 아니다옹. 하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은 가급적 주인님에게만 쓰고 싶다옹.”
“딱히 유혹한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옹. 내게 남자를 홀리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옹. 이게 다 목석같은 주인님 때문이다옹.”
“목석…….”
남자를 홀리는 치명적인 매력. 여기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과연 이번 일로 NPC들이 일반인 남자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했다.
십 년이나 같이 지낸 나도 그녀들의 미모에 새삼 놀랄 때가 많으니까.
암젤이 바에서 귀남에게 사용한 것은 ‘반사’ 스킬이었다. 원래 그녀가 가진 스킬은 아니지만 블러드 스톤으로 흡수했더랬지.
결과적으로 그것이 유용하게 쓰인 것이다. 물론 반사 스킬이 없었더라도 작전에 큰 영향은 없었을 것이다.
귀남의 스킬이 암젤에게 통했을 리가 없고, 그 역시 암젤의 매력을 거부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기지개를 켰다.
‘쓰레기 처리하느라 잠잘 타이밍을 놓쳤네.’
늘 자던 시간을 놓치면 이상하게도 잠이 안 온다. 나는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
귀남은 눈을 떴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그는 손을 들어 자기 머리를 만졌다.
시뻘건 피가 끈적하게 묻어났다.
‘시발!’
그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조성오와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던전에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 쉽게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처음엔 조성오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지만 이제는 슬슬 불안감이 든다.
“조성오 씨!”
소리를 질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대신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
키릭! 키리릭!
어둠 속에서 거대한 거미의 신형이 나타났다.
“시, 시발…….”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던전에 들어가 정직하게 돈을 버는 건데.
당연하게도 그것은 너무 늦은 후회였다.
“캬아악!”
“으아아악!”
Chapter 25 - 변신 소녀
1
다음 날.
늦도록 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추리닝 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그곳에는 뜻밖에 누나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쉽게 누나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귀남이 사라졌으니 스킬이 끊겼겠지만 그게 어떤 식으로 누나에게 영향을 미쳤을지…….
“하아…….”
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퍼뜩 깨어나더니 나를 발견했다.
“성오야…….”
“응, 잘 잤어?”
“그게…….”
누나는 머뭇대며 말을 하지 못하다가,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말했다.
“미안해. 어제는 내가 미쳤었나 봐. 남자 때문에 너한테 돈을 달라고 하다니.”
“괜찮아. 누나 잘못 아니야.”
누나는 내 말에 더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 남자 안 만날 거야. 연락처도 지웠어. 내가 왜 그런 사람한테 빠졌었는지 이해가 안 돼.”
그것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웃는 얼굴로 누나에게 말했다.
“힘내, 누나.”
2
오늘은 F급 던전 공략을 하기 위해 예약한 날이다. 던전 공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던전에 NPC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잡은 예약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녀석일까.’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그저 스토리가 진행되는 대로 자연스럽게 NPC가 동료가 되었기 때문에 누굴 만나게 될지 미리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만날 NPC는 모두 한 번 이상은 인연을 맺었던 녀석들이다. 그 많은 NPC 중에 누굴 먼저 만나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이번에도 암젤, 아린과 함께 던전으로 갔다.
평온한 암젤과는 달리 아린은 상대적으로 더 초조해 보였다. 철저한 개인주의적 성격을 지닌 묘족과 대조되게 악사 출신인 그녀는 공감 능력이 발달한 NPC였다.
자기가 겪었던 일도 있다 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말라옹. 너처럼 허접한 몬스터들에게 휘둘리는 어설픈 녀석은 또 없을 거다옹.”
아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암젤,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얼른 아린한테 사과해.”
암젤이 흥 하고 고개를 꺾고 말했다.
“팩트 폭력 미안하다옹.”
“어휴.”
나는 암젤 대신 아린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때 네가 무사한 건 정말 다행이야. 빨리 가 보자.”
아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 주인님!”
레벨 70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F급 던전을 공략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엔 꼼꼼히 공략하여 경험치를 얻을 생각도 없었다.
돌개 보드를 타고 쭉 날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암젤은 내 돌개 보드에 태우고 아린은 따로 하나의 보드에 탔다.
‘정말 편한데?’
아닌 게 아니라 이놈이 있으면 앞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방향만 적절히 잡아주면 되었기 때문에 운전하는 것도 힘들지 않다.
가끔 가다 앞을 막는 몬스터가 있다면 가볍게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평균 한 개 층을 통과하는 데 40~50분 정도가 걸렸는데, 나중에는 지루함 때문에 졸리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느껴져?”
나는 보드를 운행하며 암젤에게 물었다.
“응? 방금 뭐라고 했냐옹?”
녀석은 내가 운전하는 보드 앞쪽에 앉아 편안하게 졸고 있는 중이었다.
“NPC가 있는 게 느껴지냐고.”
내 말에 암젤은 몸을 세우고 가만히 집중을 했다.
“느껴진다옹. 하지만 아직은 희미하다옹.”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앞서 두 번에 비해 NPC의 감각이 약하게 전해졌다. 내가 느끼기에 긴가민가한 정도였기 때문에 암젤에게 확인을 한 것이다.
총 여섯 개 층의 던전을 4층까지 공략하고 한숨을 돌렸다.
‘내일까지 올 것도 없겠네.’
사냥에 대한 욕심을 접으니 던전 공략은 그저 드라이브나 마찬가지였다. 도시락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남은 층은 5층과 6층뿐.
6층에 입장했을 때 암젤이 털을 곤두세웠다.
“느껴진다옹.”
“그래?”
나는 눈을 빛냈다. 그저 오늘 한 일이라고는 보드는 탄 것뿐이지만 지루함 때문에 심신이 늘어지던 참이었다. 암젤의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린은 내내 진지한 얼굴이었다.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은 나조차도 배워야 할 정도.
“크아아아!”
갑자기 들려온 괴성에 보드를 멈추었다. 이미 6층도 십 분가량 날아왔기 때문에 이제 슬슬 던전 마스터가 나올 참이었다.
이 던전의 마스터는 노말한 형태의 몬스터이다. 게임으로 치면 레벨 낮은 오크 로드쯤 되는 수준에 외모와 덩치도 비슷했다.
울음소리만으로 상황이 그려졌다.
지금 던전 마스터는 누군가와 싸우는 중이었다.
“크아아!”
쾅! 쾅!
던전 내부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전해진다. 느낌 상 다른 게이머들이 마스터를 사냥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NPC를 만나기 전에 느껴지는 특별한 감각이 강해졌다.
‘설마…….’
짐작 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직접 확인이 필요했다.
다시 보드에 올라타고 심층부를 향해 날아갔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뜻밖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녹색의 근육질 몸뚱이를 가진 던전 마스터가 자기와 신장이 비슷한 거인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근육질의 여자.
아름다운 용모지만 그보다는 터프한 기질이 더욱 돋보인다. 지구상의 어떤 보디빌더도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와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안광을 빛내며 그야말로 포악하게 던전 마스터를 두드려 패고 있었다.
두드려 팬다는 표현은 정확하다.
둘이 맞붙어 있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웠으니까.
던전 마스터는 여자에 대적하지 못한다기보다는 맞으면서도 차마 손을 못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선생님에게 체벌을 당하는 학생처럼, 반항심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선생님과 싸울 수는 없는 것 같은 상황.
우리 세 명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트레앙?”
큰 목소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던전 마스터를 폭행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인데?’
나는 트레앙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NPC들처럼 변신을 할 수 있는데, 그 변신을 촉발하는 방식이 조금 특이했다.
분노를 하거나, 아니면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가 될 경우 거인으로 변해 무차별한 폭력을 휘두른다.
과거 파티에 속해 있을 때는 변신을 했을 때 최소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와 흡사했다.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공격하던, 마치 파괴 에너지 그 자체인 것 같던 모습.
나는 시험 삼아 다시 불러보았다.
“트레앙.”
“크으…….”
트레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온다.
쿵! 쿵! 쿵!
젠장.
“암젤!”
암젤이 내 부름에 빠르게 응했다.
“어흥!”
허공에 나타난 호랑이 한 마리.
뻐억!
크레앙이 호랑이의 안면을 후려쳤다.
정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암젤이 소환한 호랑이는 그녀 실력으로 대적할 수 없다.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앞뒤 판단 없이 공격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그 위용에 레벨 69짜리 호랑이마저 위축될 지경.
“크릉”
“크아앙!”
하지만 점점 트레앙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앞으로 동료가 될 그녀가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린!”
“네, 주인님!”
척하면 척.
암젤뿐만 아니라 그녀도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챘다.
아린이 하프를 들어 ‘수면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흥분 상태이기도 하고 레벨 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트레앙에게 금세 효력을 발휘했다.
“으, 어, 으으으…….”
거칠게 휘두르는 주먹의 세기가 약해지고 그것이 호랑이가 아닌 허공을 휘두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녀의 동작이 느려진 것을 보고 암젤이 소환수를 사라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