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독식왕 : 클리어러 080화
어떻게 보면 가장 골치 아픈 퀘스트이기도 하다. 만약 이번에 획득한 던전을 통해서도 흔적을 못 찾으면 다시 또 다른 던전을 공략해야 하니까.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제발…….’
왠지 느낌상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지금까지 흐름은 대체로 물 흐르듯 이루어졌으니까.
짐작컨대 나를 각성시키고 퀘스트를 부여하고 있는 이는 이계의 군주들을 제거할 목적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퀘스트의 배치며 흐름은 자연스럽게 내 성장을 유도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는 집중을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던전 메뉴로 들어가 D-002 코어에 접속했다. 눈앞에 떠오른 둥그런 홀로그램을 중심으로 밝은 빛이 퍼져 시야를 완벽하게 덮었다.
벌써 여러 번 같은 경험을 하지만 이 기분은 뭐라 형언하기가 힘들었다. 코어와 동화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특별한 무엇을 찾아내는 작업.
마치 고도의 명상을 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나는 조심스럽고도 꼼꼼하게 코어를 중심으로 퍼진 가지들을 하나하나 따라갔다.
이번에도 역시 특별한 느낌은 감지되지 않았다. 십여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뒤에 희미하게 번져 오는 한 조각 빛을 발견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갔다.
‘음…….’
내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5
네 번째 NPC-수보타를 제외하고-가 있는 장소는 F급 던전이었다. 등급이 높은 던전이었다면 고생을 할 뻔했는데, 역시 퀘스트의 흐름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당장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신청을 했지만 가장 빠른 날짜가 이틀 뒤였다.
나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린 때의 사건을 생각하면 현실에 적응 못 한 NPC가 곤혹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방법만 안다면 던전의 비밀 통로를 찾아서 한 시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지만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켜 보았다.
노아를 제외하면 딱히 연락을 할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계속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켜자마자 수신음이 울렸다.
“나 참.”
혀를 차며 핸드폰을 다시 끌려고 했는데, 발신자의 이름이 보였다.
김유진.
“음…….”
이 이름을 보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깨어난 직후, 그리고 깨어나기 전에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준 유일한 현실 친구이다.
그런 친구에게 지난번 던전 공략 때 기억 삭제 스킬을 사용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일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오야!”
목소리 톤이 생각보다 높아 핸드폰을 조금 멀리 떼었다.
“응, 유진아.”
“왜 전화 안 받았어? 너 요즘 TV에 나오던데. 그게 진짜야? 노아 알렌이랑 길드를 만들기로 했다고?”
“그게…….”
기억 삭제보다 더 곤란한 일이 있었다. 아마 유진이는 내가 자기네가 아닌 다른 길드에 들어간다는 데에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내 의지랑 상관없이 그렇게 된 일이라…….”
“무슨 그런 말이 있어? 섭섭하게 나한테는 왜 말 한마디 안 했니?”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서. 그냥 언론에 먼저 알려진 거지.”
“그게 말이 돼? 방송사 인터뷰도 했던데.”
“하하.”
“웃지 말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 좀 해봐.”
나는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내일 시간되면 밥이나 같이 먹을까?”
“그래, 좋아.”
6
다음 날.
유진이는 이번에도 나를 데리러 왔다. 다행히도 암젤은 티코이네 집에 놀러 가고 없었다.
웬만해서는 내 옆을 떠나지 않지만 요즘에는 가끔 이렇게 다른 NPC들을 보러 가고는 했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나에게 유진이가 말했다.
“TV에 밥 먹듯이 나오는 애가 차는 왜 아직 안 샀니?”
“밥 먹듯이 나오지는 않지. 인터뷰 한 번 한 건데.”
유진이는 자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토라진 모습이었다. 대놓고 툴툴거리지는 않지만 매사 쿨하기 그지없는 성격이라 조금만 달라져도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게 말이야…….”
자동차가 출발하자 나는 입을 열었다. 기억 삭제 스킬을 사용한 미안함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유진이에게 만큼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특별한 능력?”
유진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분명 나와 한 번 던전 공략을 했는데 내가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너한테는 아직 안 보여준 능력이야.”
“그래? 그게 뭔데?”
“아이템 제조 능력.”
“뭐?”
유진이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아이템을 제조하는 90퍼센트 이상은 브레인형 게이머들이다. 그들과 일반 전투형 게이머와는 분명한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
알려지기로 양쪽 모두의 능력을 가진 게이머는 여태 하나도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쪽 능력이 꽤 괜찮은 편이거든.”
“그래?”
유진이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암거래 사이트에 내가 만든 아이템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걸 노아 알렌이 본 모양이야. 그래서 나한테 연락을 한 거지. 나도 그 사람이 나한테 길드를 만들자고 해서 깜짝 놀랐어.”
“그럼 그 길드는 던전 공략보다 아이템 제조 쪽에 더 치중하는 길드인 거야?”
“응, 뭐…… 그렇지.”
“안됐다.”
“뭐?”
“너는 던전 공략 쪽에 더 흥미가 있을 것 아니야. 재미없지 않니? 아이템 제조나 사업 같은 건?”
‘역시…….’
유진이는 나와 영혼이 닮은 친구이다.
“어쩔 수 없지. 전투 능력보다 이쪽에 더 재능이 있으니까. 나는 돈을 벌어야 할 의무도 있고.”
“음, 그렇긴 하지.”
거짓말을 좀 섞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최대한 잘 설명해 준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딴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지 마.”
“얘는? 나 못 믿니?”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매우 밝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자동차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시키면서 유진이가 말했다.
“원래는 너한테 얻어먹을 생각이었는데 오늘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내가 살게.”
“자꾸 얻어먹어서 미안한데.”
“걱정 마. 다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몇 배로 받아먹을 거니까.”
“하하.”
나는 여전히 대봉이네 분식 같은 가게가 취향이지만 오늘 온 레스토랑은 매우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유진이가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라고 했는데 나는 들어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유진이와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대부분이 게임 얘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자연히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갔으며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심지어 나는 요즘 게임을 거의 못 하고 있는데도 십 년 전 게임 얘기 갖고서 진지한 토론이 가능했다.
‘역시 유진이는 소울메이트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레스토랑 안으로 커플 한 쌍이 들어왔다. 우연히 그들을 쳐다본 나는 깜짝 놀랐다.
커플 중 여자 쪽이 누나였기 때문이다. 유들유들한 인상의 남자는 친절한 태도로 누나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데이트를 하는 모양인데 굳이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누나가 요즘 표정이 밝고 옷차림이 화려해졌다 했더니, 역시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남자 쪽의 인상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잘생기기는 했는데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일었다.
‘누나가 저런 타입을 좋아했었나?’
마치 TV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제비상인데 말이지.
얼핏 보았더니 누나의 표정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유진이 못지않게 쿨하고 강단 있는 누나가 그런 표정을 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동시에 위화감이 생긴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유진이가 내 시선을 좇아 누나가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머? 언니 아니야?”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녀는 그 쪽으로 가서 아는 척을 했다. 누나가 깜짝 놀라고, 이내 나를 발견했다.
나는 멋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때 누나의 남자 친구로 보이는 자가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로 걸어왔다.
‘뭐야, 이 사람.’
나는 이 상황이 껄끄러웠다.
‘매형 될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려는 건가?’
내가 어색을 표정을 짓고 있는데,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권태수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남자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군요. 조성오 씨 아닙니까?”
“네…….”
“솔직히 얼굴만 봐서는 긴가민가했는데 누님의 성이 조 씨라서 확신을 했습니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뷰에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달라고 하는 건데.‘
초면에 친한 척을 하는 남자를 못마땅하게 올려다보던 나는 순식간에 시야를 채우는 메시지를 보았다.
정보창.
그도 게이머였던 것이다.
이름 : 박귀남
레벨 : 7
성향 : 카오스(Chaos) B/ 오더(Order) - = 카오스
업적 : -
랭킹 : 185,394
스탯 : 근력 4/ 체력 5/ 민첩 6/ 행운 10
스킬 : 패시브 - 유혹(C, Lv7)
이력 : 지방에서 이름을 날리는 호스트였던 박귀남은 어느 날 각성을 하고, 자신의 재능을 업그레이드해 줄 스킬을 손에 넣었다. 서울로 상경한 그는 호스트 생활을 청산하고 일반인 여성을 상대로 자신의 스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여성을 상대로 사기를 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본인은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며 힘들게 던전 공략을 하는 게이머들을 비웃고 있지만, 그를 거쳐 간 여자들은 모두 불행에 빠졌다. 정신 착란은 기본이고 자살한 여자만도 다섯 명에 이른다.
‘이런 씨…….’
내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하니 카오스 게이머였다니.
여자를 상대로 데이트 사기를 치면서 카오스 성향을 갖게 됐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했다.
그동안 가족을 돌보느라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누나가 이런 놈에게 속고 있는 걸 생각하니 속에서 불이 솟구쳤다.
내 인상이 험악해진 것을 보고 권태수, 아니, 박귀남은 흠칫 놀랐다.
“식사하는데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뵙죠.”
놈은 주춤대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누나는 나를 흘긋 보고 고개를 숙였다.
동생에게 데이트 현장을 들켜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화가 났다.
마침 식사도 마쳤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유진아.”
유진이는 내 생각을 눈치 채고 웃음을 지었다.
“오! 누나를 배려하는 동생. 멋있는데?”
배려는 무슨, 누나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나는 가게를 벗어나면서 박귀남에게 스킬 하나를 걸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