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독식왕 : 클리어러 073화
“좋아, 계획대로 하자.”
“저는 따라가면 안 되겠죠?”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를 믿고 기다려.”
“네…….”
대화가 끝났을 때 마침 수보타가 차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정중하게 찻잔을 놓고 방긋 웃었다.
“두 분 무슨 대화를 그렇게 진지하게 나누시나요?”
나는 수보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응?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주인님?”
“너도 같이 가자.”
“어디를요?”
“전에 나를 도와서 싸우겠다고 했지?”
“네, 그랬…… 었죠.”
집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찾은 수보타는 곧 레벨이 올랐다고 자신이 가진 전투력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동레벨대 능력자들에 비해 자신의 능력치는 형편없었다.
당장 암젤과 아린만 봐도 바로 느낄 수 있다. 수치는 57이더라도 그보다 30~40은 에누리를 해야 할 것이다.
수보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잘하는 것만 하면 돼.”
2
데이비드 정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길드장에게 직접 전화를 받다니.
미국에 있을 때도 그와는 전혀 말을 섞어보지 못했다. 그저 먼 발 치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길드의 수장이라는 지위를 떠난 그는 이른바 구름 위의 존재였다. 일반적인 게이머의 경지를 벗어난, 닿고 싶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그를 멀리서 보고 나서 피스&호프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만큼 든든한 존재가 버티고 있는 길드는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으니까.
니콜라스 알렌은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아이돌이자 목표였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OG라…….’
지난번에 길드장실로 들이닥친 조성오라는 놈은 별것 아닌 상대였다.
아이템을 직접 제조하는지, 아니면 공수하는 다른 루트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게이머로서의 능력은 자기보다 한참 밑이다.
동료가 몇 명 더 있는 것 같지만 보고된 바로 다섯을 넘지 않았다.
한마디로 박철웅 패거리가 그에게 당한 것은 순전히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자기도 아니까 허겁지겁 여길 찾아온 것이겠지.
조성오를 죽이는 것은 이틀 뒤에 결행하기로 했다. 알아본 바로 얼마 전 D급 던전을 공략하고 또 다른 D급 던전을 예약한 모양이니까.
그곳은 마침 피스&호프의 입김이 닿는 던전이었다.
‘아깝기는 해도…….’
신기한 아이템을 만드는 자이지만 아이템이야 어차피 소모품일 뿐이다.
그게 없다고 던전을 공략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권력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복이 되었군.”
한때는 그의 존재가 화가 되나 싶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다시 길드장의 주목을 받게 한 복덩이로 바뀌었다.
데이비드 정의 입술 끝은 추켜올라간 채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니콜라스 알렌과 통화한 뒤로 계속 그 상태였다.
‘제가 직접 보상을 할 겁니다.’
길드장이 직접 하사하는 보상이란 과연 무엇일까?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욱 즐거웠다.
그때 인터폰이 울려 그의 즐거운 공상을 깨뜨렸다.
“띠리리리.”
목청을 가다듬고 점잖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지난번에 찾아왔던 조성오라는 분이 동료 세 분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요?”
데이비드 정은 인상을 구겼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즐거운 상상 속에 있던 인물이 여기 찾아왔다고?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크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아마 리에고 등불 차기 물량을 가져왔든지, 아니면 새로운 아이템을 자랑하러 왔겠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게 던전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훈련실로 모시세요.”
“훈련실 말입니까?”
“네, 그리고 다른 직원들 눈에는 가급적 띄지 않게 조용히 모시도록 하세요.”
“잘 알겠습니다.”
훈련실이라는 것은 지부장실이 있는 최상층에 함께 있는 장소다. 길드 건물 내에도 훈련실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자기가 말한 곳은 지부장 개인 훈련실이었다.
어떤 길드든 일정 규모 이상이라면 길드장이 직접 던전 공략에 나서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길드장씩이나 돼서 저급 던전을 공략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훈련 시스템으로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설로 몬스터를 직접 죽이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등급을 올리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일부 욕심 많은 게이머는 연습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데이비드 정은 이번엔 다른 이들에게 연락했다.
이틀 뒤에 성오를 죽이는 데 동원하기로 되어 있던 인원들. 지부 빌딩 내에 있는 카오스 게이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네, 저를 포함해서 다섯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다섯 명이라…….’
데이비드 정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작전에 투입될 인원은 총 열 명이었다. 이 중 절반이 외부에 있고 다섯 명만 빌딩 내에 있다는 것이다.
‘상관없겠지.’
비서 말대로라면 이곳에 찾아온 것은 조성오 본인을 포함해 네 명이라고 했다. 조성오가 리더일 것을 감안하면 다 고만고만하거나 그보다 떨어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가 호랑이굴인지도 모르고 기어들어 오는구나.’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훈련실로 들어갔다.
3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티코이가 주었던 장치를 작동시켰다.
CCTV 교란 장치.
던전이 생긴 영향으로 기술은 짧은 시간에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신문물의 다수는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수가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다.
물론 이것들은 던전에서 추출된 결정석이나 재료를 응용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CCTV 교란 장치는 범죄자가 많이 사용하는 도구로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웬만큼 보안 설비가 갖추어진 곳에서는 이미 대비가 이루어져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티코이는 이 장치에 조금 조작을 가했다. 그의 손을 거쳐 업그레이드된 교란 장치는 시장에 풀린 적이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를 막을 수 있는 설비도 없었다.
CCTV 교란 장치는 카메라 자체의 기능을 상실케 하지는 않는다. 일정 거리에 있는 생명체를 아예 카메라에 표시되지 않도록 만든다.
따라서 CCTV에 비친 나와 NPC들은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직원이 안내하는 방향은 지난번과는 달랐다. 사람이 없는, 외따로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여기서 끝낼 생각인 거군.’
데이비드 정은 아마도 내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직원은 우리를 앞장서서 걸어갔다. 지부장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지부장실로 가는 거 아니었나요?”
“지부장님이 손님들을 훈련실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훈련실.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게이머들이 연습을 하거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설이다.
지부장실에서 싸울 수는 없을 테니 꼼수를 쓰는 것이 분명했다.
‘뭐, 조용한 곳이면 오히려 땡큐지.’
훈련실 문을 열어주고 직원이 우리에게 인사했다. 나는 떠나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네?”
나를 마주 본 그녀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기억 삭제!’
시간이 멈추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말하십시오.]
“나와 NPC들이 오늘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해줘. 아니, 나라는 사람 자체를 잊어버리게 해.”
조그만 빛이 생성되어 직원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21분 분량의 기억이 삭제되었습니다. 사라진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됩니다.]
나는 NPC들과 함께 훈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보타는 놀란 얼굴로 두리번댔다.
“여기는 어딘가요? 설마 이 건물이 던전이었던 겁니까?”
수보타는 티코이의 도움으로 이쪽 세상에 필요한 지식을 얻어가는 중이었다. 던전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헷갈릴 만도 하다.
훈련실 안은 홀로그램 이미지로 가득했는데, 그것은 거의 실제와 다름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신기하네요.”
아린도 곧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조성오 씨.”
“지부장님.”
각자 마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친구분들과 함께 오셨군요. 절 또 어떻게 놀라게 하려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신 겁니까?”
속내를 감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짜증이 났다. 애초에 데이비드 정은 매우 간사한 인상이었다. 겉과 속이 달라 보이는 인상은 꽤 노골적이기도 해서 방송에는 자주 나와도 인기 있는 인물은 못 되었다.
다만 피스&호프의 지부장이라는 지위가 후광을 비춰주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지부장님 놀래켜 드리려고 온 거.”
“하하! 조성오 씨야 황금알을 낳는 거위 아닙니까. 저희 카오스 게이머 닷컴 VIP이기도 하고요.”
맘에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데이비드 정의 뒤로 그림자 여럿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눈앞에 차례로 드러나는 정보창이, 그들이 카오스 게이머임을 말해주었다.
데이비드 정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어쩌면 좋습니까? 상부에서 거위의 배를 가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어맛!”
내 갑작스러운 외침에 데이비드 정과 그의 졸개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고 놀랄 줄 알았냐, 시발 놈아?”
“뭐?”
자존심 강한 데이비드 정의 눈썹이 휘어졌다.
“우리도 너 잡으러 왔다, 이놈아.”
이름 : 정태환(데이비드 정)
레벨 : 66
성향 : 오더(Order) - / 카오스(Chaos) B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41,731위
스탯 : 근력 26 체력 49 민첩 48 행운 35
스킬 :
액티브 – 더블 고스트(A, Lv50), 피부강화(B, Lv30)
보상 : 더블 고스트(20-10%), 피부강화(60-50%), 근력 5(70-45%), 체력 4(60-45%), 행운 5(50-35%)
레벨66. 지난번보다 1이 올랐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내 레벨도 57이 되었으니까.
아직 9라는 차이가 있지만 내게 이 정도 차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반적인 게이머와 나는 능력의 질 자체가 다르니까.
데이비드 정의 뒤에 도열한 카오스 게이머들은 레벨이 40~50 사이였다.
던전에서 기습한 놈들보다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유형 자체도 평범하다. 신체 강화형 둘에 고스트 하나, 그리고 매지션 하나.
“잠깐만 기다려.”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퀘스트 메시지를 기다렸다.
[메인 퀘스트 [명예] - 2. 카오스 게이머 다섯 명 이상 처치하기가 자동 수락되었습니다. 기한은 14일입니다.]
“좋아, 이제 싸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