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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72화 (7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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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72화

    “많이 당황하셨을 겁니다. 운영자인 제가 직접 한국에 오겠다고 해서요.”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정보창을 보고 나서 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오스 게이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제 운영자가 아닙니다. 피스&호프 부길드장에서 사임하면서 그쪽 일에도 손을 뗐으니까요.”

    “……운영자도 아니라면 왜 나를 만나러 온 겁니까?”

    노아는 볼을 살짝 긁었다.

    “조성오 씨, 저와 사업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이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충성심 높은 NPC에게 들었더랬지.

    “사업이요?”

    “카오스 게이머 닷컴은 비록 제가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중간부터는 거의 형의 의도대로 운영되었습니다. 저의 처음 의도와는 몇억 광년쯤 떨어진 사이트가 되어버렸죠.”

    “당신의 처음 의도라는 게 무엇인데요?”

    “현대의 패러다임은 던전과 게이머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는 각성 전에도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죠. 브레인형 게이머가 되고 그 변화를 몸으로 느끼면서 굉장히 가슴이 흥분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정해진 틀로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던 세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 기대는 점차 퇴색되었습니다. 여전히 던전과 게이머에 대해서는 밝혀야 할 게 많이 남았지만 이른 바 힘을 가진 자들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고 단단한 시스템을 만들어 개인의 부와 권력을 쌓는 데 이용하고 있죠. 결과적으로 무한한 가능성마저 재미없는 세상의 일부에 편입해 버렸습니다.”

    나는 노아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이자의 사고가 일반인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오스 게이머 닷컴을 운영하는 범죄자라는 사실을 떠나, 일반적인 견지에서도 보통은 아니다.

    뭐라고 할까……. 덕심이 내재된 인간형?

    덕후는 덕후를 알아본다고, 진성 게이머인 나는 이자의 사고회로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흥미를 갖는 분야가 다를 뿐이다.

    나는 게임, 이자는 던전과 게이머,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신문물들.

    “그렇다고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비약이 심한 것 같네요. 아시겠지만 저는 얼마 전 그쪽 직원들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지부장과 담판을 짓긴 했지만 내켜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네?”

    “조성오 씨 입장을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지만, 아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 남아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템 거래로 수입을 얻기에는 카오스 게이머 닷컴이 가장 낫죠. 게다가 조성오 씨가 아무리 뛰어난 게이머라 하더라도 피스&호프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이놈 뭐지?’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기는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노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곳에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발목이 잡힌 채 미라가 될 때까지 빨아 먹히는 거죠.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저와 사업을 하자고요.”

    “그 사업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뭐긴요.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죠.”

    “네?”

    “저에게는 자금과 인맥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오 씨는 기존에 없는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죠. 이 이상 좋은 조합은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휴…….’

    현실적인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일단 내뱉고 보는 것이, 역시 이 자는 덕후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당신은 손을 뗐다고 하지만 당신 형은 엄연히 그곳의 운영자 아닙니까? 어떻게 내가 당신을 믿고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노아는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났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더 이상 제 형이 아닙니다. 피스&호프에서 퇴사하면서 형제의 연도 끊었거든요.”

    “…….”

    “동양인의 관점에서 가족의 연을 쉽게 끊었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형과 저는 굉장히 다른 타입의 사람입니다. 아마 형제가 아니었다면 같은 길드에 몸담았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겠죠.

    그래도 하나뿐인 혈육이라 거부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니콜라스와 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요. 어쩌면 계속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저를 함정에서 구해줄 성오 씨 같은 존재를요.”

    “……부족합니다.”

    나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저 이 자가 하는 말을 듣고 고개만 끄덕인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마인드 리더를 사용해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지만 의도가 순수하다고 해서 현실의 간극까지 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증거 있습니까? 당신과 당신 형이 남이 되었다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것을 조작한 뒤, 이어폰을 끼워 내게 내밀었다.

    “들어보시죠.”

    나는 이어폰을 받아 들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혹시 소리를 통해 내상을 입히는 아이템은 아니겠지?

    하지만 순수한 노아의 표정과 나 하나 죽이자고 부길드장이 직접 와서 테러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의심을 거두었다.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자 노아가 오디오를 재생시켰다.

    곧 내 귀에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부장이신가요?

    -아, 네! 길드장님. 한국 지부장 데이비드 정입니다.

    -전달 사항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한국의 판매자 중에 OG라고 있지요? 그자를 제거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네? 혹시 보고를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자는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사람입니다. 앞으로 저희 길드에 큰 이익을…….

    -못 들었습니까? 그깟 피라미 하나 죽는다고 우리한테 손해가 갈 일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네…….

    -걱정 마십시오, 지부장.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내가 합당한 보상을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처리하고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녹음 내용이 끊어졌다. 내가 제기하려던 의문을 노아가 먼저 해소해 주었다.

    “영어로 대화한 내용이지만 미리 번역을 해두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세상이니까요.”

    녹음 내용에 담긴 두 명 중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대화 내용에도 나오듯 피스&호프 한국 지부장 데이비드 정이다. 그가 길드장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니콜라스일 게 분명했다.

    OG란 나와 티코이가 카오스 게이머 닷컴 안에 개설한 상점의 이름이다.

    ‘지금, 길드장이 나를 죽이라고 지시한 거야?’

    내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노아가 말했다.

    “이런 내용을 알려드려서 죄송합니다. 형이 성오 씨를 제거하라고 한 것은 저 때문일 겁니다. 니콜라스는 제가 피스&호프를 그만둔 이유를 알고 있거든요. 한때 친동생이었지만 남이 되자마자 바로 싹을 밟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형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이죠.”

    “흠…….”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노아는 자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마냥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요는 피스&호프 길드장이라는 놈의 가치관이다. 이런 놈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계속 상점을 운영해 봤자 내 앞길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노아의 말대로 내가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 남기로 한 것은 울며 겨자 먹기였다. 당장 뚜렷한 대안이 없었으니까.

    노아는 진지하게 나를 마주 보았다.

    “제가 서둘러 한국에 온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정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저 때문에 생긴 일이고 성오 씨에게 신의를 증명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대화 내용으로 당신이 당신 형과는 완전히 갈라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뭘 증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 일에 당신이 나섰다가는 앞으로 우리 사업에 지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듣죠. 아시다시피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Chapter 22 - 사업 파트너

    1

    나는 니콜라스 알렌이 나를 제거하려고 사주한 일을 티코이와 상의했다.

    그 역시 내가 노아와 만난 카페 맞은편 건물에서 대화 내용을 들었다.

    티코이를 제외한 나머지 NPC들은 전투형, 그리고 집사니까 계획을 논의하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이렇게 나오다니.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요.”

    티코이의 표정이 침울했다. 아마도 암거래를 하자며 카오스 게이머 닷컴을 처음 추천한 것이 자기였으므로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면서 그를 격려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지도 못했어. 어떻게 내가 일주일 안에 30억을 벌 수 있었겠어? 게다가 내 예상인데 앞으로 노아와 거래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득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주인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내가 노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한 것은 일종의 감이었다. 하지만 티코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노아의 재력과 인맥, 그리고 노하우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그가 굉장히 유명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니콜라스는 형제도 죽일 수 있는 인물 같지만, 아무리 그라도 노아 같은 인물을 건드리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전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으니까요. 제가 더 알아본 바에 따르면 길드 내에서 형인 니콜라스보다 노아의 신망이 더 높다고 합니다. 그가 퇴사하자마자 따라 나가겠다고 한 게이머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는 딱 다섯 명만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래?”

    “네, 그 다섯 명은 노아의 충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카오스 게이머 닷컴 관련 업무였기 때문에 겉으로 나서지 않고 그림자로 조력할 가능성이 큽니다.”

    “음…… 어쨌든 노아와 사업을 하려면 일단 문젯거리부터 해결해야 돼.”

    “네.”

    작전 계획을 짜는 것은 두어 시간 정도 걸렸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뭔가 일사천리로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도 대강은 판단이 섰다. 카오스 게이머 닷컴이 아니라 데이비드 정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지난번 길드에 들렀을 때를 돌이켜 보면 피스&호프는 이원화된 조직이었다. 직원 대부분은 피스&호프가 곧 카오스 게이머 닷컴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말인즉, 지부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박철웅이라는 오른팔을 쳐 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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