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독식왕 : 클리어러 069화
나는 긴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야, 네 주인은 죽었잖아.”
수보타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아…….”
한편 나는 수보타가 보인 의외의 행동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녀석, 생각보다 의리가 있는데?’
슬라둠 집안의 노예가 되어 얻어맞는 게 일상인 삶을 수만 년이나 살았을 텐데 다른 자와 주종 계약을 맺길 거부하다니.
가히 멍청할 정도의 충성심이다.
수보타가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슬라둠 님……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어떻게 살긴 뭘 어떻게 살아? 나랑 계약을 맺으면 되지.”
나는 아까보다 더 진지한 마음으로 제안을 했다.
생각해 보니 놈과 계약을 맺는 게 좋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놈은 이계에서 수만 년 동안이나 살았다. 그 말인즉, 그곳의 역사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을 거라는 뜻이다.
어떤 역사책을 본다고 하더라도 녀석이 몸으로 체득한 정보만 하지 않겠지.
“어때?”
내 물음에 수보타가 또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먼 곳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가,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 시키가!”
보다 못한 암젤이 수보타의 얼굴을 할퀴었다.
“끄악! 뭐하는 거냐! 이 재수 없는 고양이야!”
“뭐? 재수가 없어? 오냐 너 죽고 나 살아보자옹!”
아쉽게도 암젤의 희망이 실현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암젤이 서너 번 더 수보타의 얼굴을 할퀴는 걸 지켜보다가 그녀를 만류했다.
“자자. 그만해, 암젤. 앞으로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데.”
“동료는 무슨 동료냐옹!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옹!”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수보타에게 다시 물었다.
이번엔 한층 더 인자한 목소리였다.
“어떡할래? 수보타?”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수보타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수많은 상념이 지나갔다.
슬라둠 일가와 맺은 인연은 그야말로 미운정의 초절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매를 맞고 구박만 받는 일상이었지만 몇 대를 거슬러 오면서 싹튼 애틋함 때문에 자식에 자식, 그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얻어맞으면서 꿋꿋하게 군주를 보좌했다.
‘허어…… 인생이 무상하구나.’
그는 먼 곳을 바라보려 했다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암젤과 눈이 마주치고 얼른 시선을 바로 했다.
“어흠!”
목청을 가다듬은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계약을 맺도록 하지요.”
“잘 생각했어.”
나는 어느새 집에 가기 위해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만약 가상현실 게임이었다면 이런 쓸모없는 녀석은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면 뭐든 달라질 수 있는 거니까. 티코이도 계약을 맺은 뒤 누구보다 유능한 동료가 되지 않았던가.
수보타가 무릎을 꿇고 털이 복슬복슬한 손을 내밀었다.
“주인님을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충심으로 받들겠나이다.”
이 녀석이 말하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라는 표현은 좀 섬뜩하다.
나는 수보타의 손바닥에 내 손을 올렸다.
“나도 너를 끝까지 돌보겠다.”
맞닿은 손에서 빛이 분사되었다.
[수보타와 주종 계약을 맺었습니다.]
[수보타는 NPC에 준하는 존재로 파티의 일원으로 인정됩니다.]
곧이어 기다리던 메시지.
[결투의 탑 첫 번째 대결을 승리했습니다.]
[이계의 군주 하나가 제거되었습니다.]
[공석인 군주 자리는 유저 조성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계의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내 몸에서 빛이 났다.
수보타가 그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인님!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이계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잠시 후 우리 앞에 커다란 문이 나타났을 뿐이다.
Chapter 21 - 메인 퀘스트 PHASE 2
1
차원문을 통해 거실로 돌아오자 그곳에서 근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는 티코이가 보였다.
“주인님! 무사하셨군요!”
“응, 별거 아니었어.”
방실대며 우리를 맞이하던 티코이는 갈 때보다 인원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자는 뭐죠?”
지목을 받은 수보타는 다른 의미로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빠져나온 세상이 그가 이제껏 살아온 곳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아까 주종 계약을 맺은 뒤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가 무엇보다 신기했다.
‘능력이 올랐어?’
수보타 일족은 원래 전투를 주업으로 삼는 종족이 아니다. 그쪽으로 재능이 전무하니만큼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힘 있는 자의 집에 들어가 집사나 잡부가 되는 것이었다.
제법 머리 회전이 좋고 가사에 능했으므로 좋은 집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갖춘 셈이다.
‘내가! 내가 이토록 강한 힘을 갖게 되다니!’
넘치는 힘을 느끼고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깨달았다.
“주인님! 앞으로 주인님을 보좌해 적을 섬멸하는 데 일익하겠나이다!”
“아니, 됐어.”
내 눈에는 수보타의 스탯이 보였다. 레벨 50이 되었는데도 근력의 수치는 15에 불과했고, 그나마 민첩이 30, 행운이 40이었다.
한마디로 전투용으로는 쓸모가 없는 파티원인 셈이다.
수보타는 자기의 새로운 꿈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저, 정말이요?”
“응, 너는 그쪽에 재능이 없어. 포기해.”
“풉!”
수보타와 계약하고 나서 시종 불쾌한 얼굴이었던 암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할 일은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거야. 수만 년 동안 했으니까 잘할 수 있지? 네 입으로 그랬잖아.”
“네. 네…… 물론입지요.”
수보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면 그렇지.
아쉽긴 해도 주인님은 그 무식한 슬라둠도 손쉽게 제압하신 분이다.
그분을 도와 적과 싸우겠다고 하다니, 방금 전의 만용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졌다.
‘얻어맞지 않는 게 어디야?’
슬라둠 밑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꽃길이 펼쳐진 셈이다. 왜 자신이 아까 망설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2
나는 티코이네 집에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나왔더니 거실 가득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오, 티코이.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그렇게 말을 하는 찰나에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티코이가 보였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주인님?”
나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고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나이 지긋한 남성이었다.
잠깐 동안 뭐지? 하고 생각했지만 오래지 않아 이해했다. 수보타도 인간형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쥐였을 때는 볼품없었지만 인간형일 때는 외견이 제법 그럴듯했다. 영화를 보면 부잣집에 꼭 한 명씩 있는 젠틀한 집사의 모습 그 전형이었다.
수보타가 나를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식사가 마련되었습니다.”
수보타가 만든 음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신선했다. 같은 재료인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리를 했다.
데커레이션이 쓸데없이 화려한 감이 있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그가 만든 음식을 맛본 암젤과 아린의 눈도 커다랗게 뜨였다.
“응? 쥐가 만든 음식이 의외로 먹을 만하다옹?”
“와! 수보타 씨! 음식 솜씨가 좋으시네요!”
나 역시 감탄하면서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다. 티코이의 얼굴이 복잡해 보였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결정을 했다.
‘나중에 가족들한테 독립하면 수보타한테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해야겠구나!’
의외로 결투의 탑에 들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바로 이 녀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식사를 마친 우리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티코이는 신중한 얼굴로 우리가 겪은 일을 들었다.
“이계의 군주와 대결을 하게 만들다니, 그렇군요…….”
이번 일로 궁금했던 거의 모든 비밀이 풀린 셈이다.
앞으로 쓰러뜨려야 할 군주가 71인이나 된다는 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오늘 대결한 슬라둠을 떠올리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친 김에 물어보았다.
“수보타, 다른 군주들은 어떤 놈들이야? 강해?”
내 물음을 들은 수보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정말 그것이 주인님의 사명입니까? 군주들과 대결을 하는 것이?”
“갑자기 왜 그러냐옹? 똥 마려우면 화장실에 다녀오라옹, 쥐.”
암젤의 말마따나 수보타의 얼굴은 뒤가 마려운 것처럼 칙칙해졌다.
“주인님이 대단한 실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이미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군주들과 비교를 하면 아직…….”
그는 내가 주인이라 표현에 조심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결국 솔직한 게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말을 이었다.
“아직이라고 말씀드리기도 어렵습니다. 군주들은 수십만 년에 걸쳐 힘을 기르고 세력을 키운 자들입니다. 그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자, 자…….”
수보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내 눈치를 보았다.
“자살 행위라고?”
“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그의 말을 듣고 걱정보다는 안심이 되었다.
다른 군주들도 슬라둠처럼 허접하다면 퀘스트를 수행하는 보람이 없다.
이름으로는 거창한 독식왕이라는 타이틀이 그저 그런 놈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얻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겠지.
나는 보상보다는 게임 플레이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고로, 수보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응? 어라?”
수보타는 뜻밖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뿐 아니라 고양이와 연주가마저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인님은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 테고 다른 이들은 주인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리라.
이제 막 파티에 합류한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제 말 제대로 들으셨나요? 주인님?”
4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고, 드디어 메인 퀘스트 1이 막을 내렸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퀘스트 메뉴를 열어보았다.
‘역시…….’
에상대로 PHASE 2 퀘스트들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함부로 열어보았다가는 퀘스트가 수락되어 낭패를 볼 수 있으니 대충만 훑어보았다.
[부] - 2. 50억 벌기
[명예] - 2. 카오스 게이머 다섯 명 이상 처치하기
[지위] - 2. 랭킹 50,000위 안에 진입
[영토] - 2. 던전 두 개 이상 획득
[동료] - 2. NPC 1인 영입
전반적으로 PHASE 1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도가 조금씩 상향되었을 뿐.
더구나 이 퀘스트들은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씩 달성하다 보면 연쇄적으로 달성될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신경 써야 될 부분도 있기는 하다. 대결의 탑에서 슬라둠을 상대하기 전에 준비 시간 동안 메인 퀘스트를 달성한 정산이 이루어졌다.
그때 내 성적은 명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A 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