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68화 (68/245)
  • # 68

    독식왕 : 클리어러 068화

    7

    나는 바닥에 엎드린 슬라둠에게 걸어갔다. 슬라둠은 완전히 전력을 상실한 상태로 흠칫 몸을 떨었다.

    “뭘 그렇게 쪼냐? 덩치는 산만 한 놈이…….”

    슬라둠의 졸개들은 모두 일망타진되었다.

    “너, 너는 누구냐? 누구기에 나를 이곳에 불러내 수모를 주는 것이냐.”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인지 슬라둠은 평소에 쓰지 않던 머리를 썼다.

    부하의 말대로 처음에는 이면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는 문지기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들의 세계도 아니고 이면의 세계도 아닌 공간.

    애초에 이면의 세상으로 가는 데 이런 곳을 통해야 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눈앞에 있는 이놈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마련한 장소라는 뜻이다.

    “틀렸어, 바보야.”

    나는 슬라둠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너를 불러낸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네가 그런 걸 따질 입장이냐?”

    “헉!”

    슬라둠은 내 말에 자신의 처지를 자각했다. 열다섯의 수하를 잃는 동안 상대편은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지금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사, 살려다오!”

    “무식하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기고만장해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살려 달래? 넌 자존심도 없냐?”

    슬라둠의 눈알에 핏발이 섰다.

    “……비록 오늘은 열다섯의 수하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지만 원래 내 세력은 훨씬 크다. 목숨을 살려준다면 재물도 영토도 원하는 만큼 떼어주겠다.”

    “필요 없어.”

    “뭣이? 내 비록 지금은 네 발 아래 있지만 이래 봬도 72군주 중 하나이다. 그깟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할 것 같은가?”

    “군주는 군준데 제일 허접한 군주잖아. 72위.”

    “윽!”

    자존심이 상한 슬라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의 목줄기를 창으로 찔렀다.

    푹-!

    [서열 72위 군주 슬라둠을 처치했습니다.]

    [군주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33,000, GP +70,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군주 한 명 물리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50,000, ‘최고급 스킬 강화석’ ×1을 얻었습니다.]

    [레벨 50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기존 클래스를 진화하거나 추가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레벨 10마다 찾아오는 클래스 선택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이번에도 클래스를 추가하는 대신 기존 클래스를 진화하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선택할 수 있는 진화 형태는 두 가지.

    ‘마창사’를 ‘전설의 마창사’로, ‘신궁’을 ‘전설의 궁사’로 진화할 수 있다.

    그중에 나는 ‘전설의 마창사’를 택했다.

    [‘마창사’ 클래스가 ‘전설의 마창사’로 진화했습니다!]

    [창술 사용 시 위력이 증가합니다.]

    [창술 스킬 구사 시 마나양이 감소합니다.]

    [구사할 수 있는 스킬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무기술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전설의 마창사’ 클래스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전설의 마창사’ 숙련도가 최고도가 되었습니다.]

    전설의 마창사는 창술 클래스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이다. 따라서 추가로 얻을 수 있는 효과도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창술 스킬 구사 시 원소 효과를 추가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추가 스킬 한 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스킬 목록이 나타났다. 나는 큰 고민 없이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백 개의 창날’.

    스킬을 사용하면 창끝이 백여 개로 갈라지면서 위력이 증폭된다. 창이 정확하게 백 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스킬을 사용할 때 사용하는 마나의 양에 따라 위력이 달라졌다.

    이 스킬은 최종 진화 상태에서 얻은 기술답게 등급이 S였다.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고 결투의 탑이라는 곳까지 이르렀지만 결과적으로 싸움은 쉽게 끝냈다.

    나는 곧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적을 물리쳤으니 이제 집으로 보내주겠지.

    “…….”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냐옹?”

    ‘뭐지?’

    나는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생각했다. 분명 적은 모두 물리쳤을 텐데…….

    “아!”

    잊고 있었던 한 가지가 생각났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에 넓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만 나오지?”

    슬라둠의 철퇴를 맞고도 몸뚱이가 찌그러지기만 했을 뿐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던 놈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 요구에도 불구하고 놈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하긴, 내가 놈의 입장이라도 지금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 테니까.

    ‘제길.’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게 되다니. 나는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우리는 이만 갈 건데, 너는 여기서 쭉 살 생각이야? 생각해봐. 네가 우리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를 왜 죽이겠니?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돌아가는 방법을 안다면 혼자 가 보시든지.”

    나는 등을 돌렸다.

    “가자. 암젤, 아린.”

    문에 가까워질 동안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설마 이놈이 우리도 이곳에 끌려 들어온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문까지는 불과 몇 걸음이 남지 않았다. 이 문을 우리 힘으로 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회유도 통하지 않게 된다.

    ‘이 자식이…….’

    세 발짝, 두 발짝, 한 발…….

    “자, 잠깐만!”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렸을 뿐, 놈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난해? 왜 안 나오는데?”

    공간이 워낙 넓어서 목소리만 들어서는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 진짜로 살려주는 거냐?”

    “우리는 네 군주 슬라둠처럼 막나가는 사람들이 아니야. 죄 없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모토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숨어 있으면 두고 갈 수밖에 없어. 우리도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거든.”

    “…….”

    “잘 있어라.”

    “아, 알았다. 나 여기 있다.”

    기둥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미는 덩치 조그만 몬스터.

    소매가 긴 천 옷을 입고 있는데, 머리통의 생김새가 쥐를 닮았다. 나이가 많은지 수염이 길고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

    나는 암젤에게 눈짓했다.

    “잡아!”

    “오케이!”

    고양이와 쥐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생명력은 바퀴벌레처럼 질기지만 동작은 잽싸지 못한 몬스터가 치타를 소환해 퇴로를 만든 암젤에게 금방 붙잡혔다.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틀리기는.”

    나는 암젤에게 붙잡힌 녀석에게 다가갔다.

    “나는 분명 죄 없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네놈이 슬라둠에게 말해 우리를 공격하게 만든 사실을 잊었단 말이야?”

    “헉!”

    쥐 머리를 한 몬스터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건…… 슬라둠 님이 화가 났을 때는 누구든 그 화를 풀 대상이 필요하다. 아군이 죽는 것보다 네놈들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라는 말이냐? 너희라면 안 그랬겠냐고!”

    제법 설득력을 갖추어 항변했지만 당연히 나는 봐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애초에 놈을 죽여야 이 탑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히루도의 창으로 놈의 몸통을 찔렀다.

    푹-

    “끄악!”

    “응?”

    분명히 창이 놈의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이제 보니 아까는 슬라둠의 철퇴를 맞고 납작해졌었는데 어느새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뭐야, 이놈?’

    나는 계속해서 쥐 몬스터를 찔렀다.

    푹! 푹! 푹!

    “으악! 끄아악! 이 악마 같은 놈아 그만해라!”

    놀랍게도 이 믿지 못할 상황은 십여 분 동안 계속되었다.

    “왜 죽지 않지?”

    “헉! 헉!”

    쥐 몬스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의미 있는 대미지는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제야 놈의 정보창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 수보타

    레벨 : 6

    스탯 : 근력 6 체력 8 민첩 10 행운 20

    이력 : 수보타는 이미 십 세대 넘게 슬라둠 집안을 보좌해왔다. 스스로도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까먹었을 정도.

    3대 슬라둠의 원정을 따라나섰다가 마녀가 만든 불사의 약을 물인 줄 알고 잘못 마셨다가 불사의 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된 게 그에게는 그리 행운이 아니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고약한 성품을 가진 슬라둠의 화풀이 상대가 되었으니까.

    약점 : 없음.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

    나는 정보창에 드러난 이력을 보고 기가 막혔다.

    ‘불사의 약?’

    어차피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일이니 그런 게 있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결투의 탑에 처음 들어와서 이런 황당한 일을 겪게 됐다는 것은 어이가 없었다.

    레벨이 6밖에 안 되는 놈을 불사라는 이유 때문에 죽일 수 없다니.

    게다가 놈을 죽일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야.”

    “응? 아, 아니, 왜요?”

    수보타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는 순간이지만 측은지심이 생겼다.

    죽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삶을 살았으니 일면 불쌍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이다.

    ‘어떻게 한다?’

    나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궁리를 했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내키지 않지만…….’

    가상현실 게임에서 스토리를 진행할 때, 동료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그냥 죽일 것이냐 하는 기로에 놓일 때가 많았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어쨌거나 스토리는 계속 진행이 된다.

    한마디로 동료로 받아들이면 꼭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레벨이 6밖에 안 되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 놈을 살려준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니까…….’

    동료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버리는 방법도 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너 할 줄 아는 게 뭐냐?”

    괜히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닌지 수보타가 눈을 반짝 빛냈다.

    “저는 수만 년 동안 슬라둠 일가에서 집사로 지냈습니다. 요리, 세탁, 청소 못 하는 게 없지요.”

    “집안일이 특기라고……?”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앞으로 NPC들이 더 늘어날 경우를 대비해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티코이는 맡은 일이 많은 상황에서도 아린을 돌보고, 내가 찾아갈 때마다 정성 들여서 대접을 한다.

    나는 티코이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짜지? 집안일에 자신 있는 거지?”

    희망을 느낀 수보타가 찌그러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물론이고 말굽쇼!”

    “그럼 나랑 주종 계약을 맺자.”

    “주종…… 계약이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수보타의 표정이 흔들렸다.

    “저는 슬라둠 가문과 계약을 맺은 몸입니다. 어찌 한 몸으로 이중의 계약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슬라둠 가문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이십시오.”

    수보타는 의연한 얼굴로 등을 꼿꼿이 폈다.

    내게는 그 모습이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하고 배째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0